너무 잘 알려진 성경 본문이죠.
우리 모두가 다 까마귀를 통해 주시는 은혜로 살았던 때가 있기에 항상 마음에 와닿는 말씀입니다.
1. 오늘 북이스라엘이 삼년 반 가뭄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죠.
그래도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 신앙이 이어지고 정치적으로도 다윗왕조가 계속 이어지며 비교적 나라가 안정적이 됩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은 초대왕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는 기형 신앙을 이어갑니다.
정치적으로도 끊임없이 쿠데타가 일어나 왕조도 계속 바뀝니다.
심지어 겨우 칠일 동안 왕좌에 앉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배반하는 사람들의 결말을 너무나 선명하게 대조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걸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가뭄 심판의 원인은 북이스라엘 최악의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바알신을 섬기는 북쪽 시돈국가의 공주입니다.
아합왕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도 모자라 이세벨의 신 바알제단을 수도 사마리아에 세우고 섬겼던 망령된 자입니다.
성경은 아합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더라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이고 바알과 아스다롯 사제 850명을 양성합니다.
국교를 아예 바알종교로 바꾸자는 거죠.
하나님이 두고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왕의 가문이 잘못하면 그들만 심판하시지 왜 백성들도 가뭄의 고통을 당하게 하십니까?
이미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벗어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뒤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숭배를 끝장내려 할 때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말하죠.
‘너희가 언제까지 머뭇거리느냐 하나님 편에 서라.’
그랬는데도 백성들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유기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게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행복의 원천이신데, 하나님을 떠나 사는 걸 그냥 두시는 게 가장 큰 불행 아니겠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을 멀리할 때 온갖 문제들이 생기고 삶이 곤고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기근을 주시는 건 그대로 멸망하라는 게 아니죠.
하나님 백성이기에 심판을 통해서 돌이키려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가뭄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엘리야가 이 본문에서 갑자기 등장하지만 아합왕을 상대하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을 찾아가 경고합니다.
1절,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땅은 대부분 비와 이슬에 의지해 농사를 짓는 천수답입니다.
비 뿐만 아니라 농사에 중요한 이슬도 없다는 것은 최악의 가뭄입니다.
엘리야의 가뭄 선고는 전쟁의 선전포고보다 더 두려운 것이죠.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알았기에 아합왕이 그런 재앙을 듣고도 당장은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문이 현실이 되면 엘리야는 체포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숨기십니다.
3절,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동안 하나님은 말씀을 대언 할 선지자를 숨기신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남유다의 멸망을 경고했던 예레미야도 40년간이나 박해를 당하면서도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심판의 경고를 계속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선지자를 숨기신 것은 혹독한 가뭄이 확정되었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도 없고 말씀도 없다면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그만큼 컸다는 뜻인 것이죠.
고난의 때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있으면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말씀을 더 듣고, 읽고, 말씀에 유념하면, 고난도 유익이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는 고난은 그냥 개고생이 될 수 있습니다.
3. 엘리야는 그릿 시냇물과 까마귀가 물어온 고기와 떡으로 살아갑니다.
그릿시내로 추정되는 현재 장소를 보면 거기가 은신 할 곳이 별로 못됩니다.
가뭄에 사람들이 물을 구하러 요단강 근방으로 모일 것은 너무나 당연하잖아요?
매일 양식을 까마귀가 날라다 준다는 것도 불안 불안하죠.
뒤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바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아합의 고위 관료였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 백명을 빼돌려 오십명씩 숨겨 두고 떡과 물을 주고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오바댜에게 보내시면 삼 년 반 은신하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안전하지 않은 은신처와 매일 까마귀를 기다리게 하신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험하게 하시는 연단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삼 년 반 뒤에 바알사제 450명과 살아계신 신이 누군지를 놓고 대결하죠.
하나님만 제물에 불을 내려 태우셔셔 승리합니다.
그리고 삼 년 반 동안 닫혀있던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길 기도할 때 하나님은 큰 비를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전부 다 이론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실전은 이론만으로 치를 수 없습니다.
삼년 반 동안 엘리야가 무엇을 했겠습니까?
야고보서가 힌트를 주죠.
5장17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북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비와 이슬이 없길 매일 기도한 것입니다.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도 어려운 기도지만 비가 오지 않게 하는 기도도 어렵습니다.
소풍 날 비 안 오길 기도한다고 비가 안 오지 않잖아요?
삼 년 반의 가뭄 동안 엘리야는 매일 하나님만 바라고 경험하는 실전 신앙을 훈련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신앙의 훈련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 듯 우리라고 내 힘만으로 못 살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구질구질하죠.
그러나 그것보다 문제는, 내 힘으로 살아 버릇하면 내 힘으로 안되는 일을 만날 때 실전을 치를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하루하루에서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훈련을 익히면 어떤 실전도 치러낼 수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엘리야의 음식 봉사를 담당한 것은 까마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까마귀들에게 엘리야가 먹을 고기와 떡을 나르게 하셨을까요?
제가 기가 막힌 영상을 하나 보았는데요.
까마귀가 입에다 호두를 물고 높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는데 차들이 지나다니는 차도에 냅다 호두를 떨어뜨리더군요.
그런데 거기가 그냥 차도가 아니라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떨어뜨린 호두 가까운 전신줄에 앉아서 호두를 지켜봅니다.
지나가던 차바퀴에 호두가 깔려 부서지는 순간 까마귀가 잽싸게 내려오더니 횡단보도 턱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녹색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건너가자 까마귀도 사람처럼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그리고 바닥에 깨진 호두를 맛있게 집어 먹는 거예요.
정말 기가 막히죠.
먹다가 신호가 바뀌자 곧바로 하늘로 날아 올라가더군요.
하나님이 까마귀를 사용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까마귀는 일곱 살 정도 어린이 지능을 가졌고 사람을 알아 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까마귀에게 초자연적인 명령을 하셨지만 까마귀의 자연적인 지능도 이용하신 것입니다.
사실 가뭄으로 대지가 타들어 가는 데 날짐승들이라고 배불리 먹겠습니까?
그런데 잡식성 조류인 까마귀가 배달 사고를 내지 않고 충실하게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는 것은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이용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에서 참 힘든 시기가 있었죠.
월급이 한 달 생활비가 되기는커녕 통장에서 다 빠져나가고 한 푼도 남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한 달을 살아가려면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쓸 것을 쓰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게 꼭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걸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좀 풍족하게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건강도 좀 눈에 띄게 차도가 있으면 질환으로 고생하시는 성도님들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꼭 일용할 것만 주시기에 때로 인내하기가 힘들죠.
꽤 알려진 큰 규모 교회인데, 담임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목회를 한 이래로 교회 재정을 여유 있게 채워주신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까마귀가 물어다 준 꼭 하루치 고기와 떡으로 교회도 살아간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오죽 잘 아셔서 그렇게 인도하시겠어요?
하나님 스타일을 아니까 이제는 여유 있고 풍족할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하루하루 주신 것에 감사하며 마음이 풍족하면 그것도 괜찮더군요.
다만 우리 삶에 가뭄을 주셨다면 까마귀도 보내주심을 믿으면 됩니다.
5. 그러나 시냇물도 마르고 까마귀도 더 이상 음식을 가져다 주지 않을 때가 옵니다.
하루 하루 말라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엘리야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지만 까마귀가 오늘도 고기를 물고 올지 사실 불안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분명히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하셨잖아요?
의심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그동안도 너무 잘 인도해 주셨고, 지금 앞에 있는 일들도 잘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지만 염려를 완전히 놓고 살지는 못하죠.
지금보다 더 나빠지면 어떡하나, 이대로 형편이 나아지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아마도 우리 평생에 믿으면서도 한편 의심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믿었던, 의심하고 불안해 했던, 까마귀는 아침 저녁으로 거르지 않고 음식을 가져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게 왜 근심하고 염려하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6. 시냇물이 마르자 엘리야를 사르밧의 과부에게로 보내십니다.
9절,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현재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급원을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이게 끊어지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저도 연금으로 살다보니 연금 고갈 같은 뉴스가 나오면 슬그머니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엘리야가 시냇물만 바라보고 까마귀가 가져오는 음식만 의지했다면 개울물이 말라갈 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뭄에 개울물 마를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당연히 다음 과정의 다른 인도하심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죠.
시내가 마르고 까마귀의 공급이 끝나면 하나님은 새로운 공급자를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으심을 믿고 땅의 것만 보고 살지 말고 하나님과 땅을 번갈아 보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2023년10월25일 수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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