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서 선지자 엘리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사가 기근 가운데서 제자들을 돌보았던 두 가지 기적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걸 보라는 게 최우선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램프의 요정 지니하고 다를 바가 없으신 것이죠.
기적의 속뜻을 알 때,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이 더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 북이스라엘땅에 칠 년의 큰 흉년이 있었습니다.
38절,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 앞에 앉은지라
흉년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 우상숭배와 아합왕조가 들여온 바알숭배의 결과였습니다.
영적인 흉년은 얼마 가지 않아 육적인 흉년을 불러올 것입니다.
성경은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길 축복하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흉년이 오면 마음과 삶에도 머잖아 기근이 옵니다.
세상의 물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영적 기근으로 인해 시작된 그 갈라진 틈을 메꾸지 못합니다.
삶의 곤고가 찾아오면 영적인 물, 은혜의 물을 부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길갈과 갈멜과 여리고를 왕래하며 엘리야 때부터 양육하던 제자들공동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2. 길갈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간 엘리사가 기근 중에 사는 제자들에게 소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자 합니다.
내게 있는 조건들이 좋지 않을 때, 우리는 거기에 맞는 소박한 것들로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죠.
38절하,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제자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음식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별다르게 가져간 재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 숙소에도 변변한 먹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국에 넣을 재료를 더 얻기 위해 제자 한 사람이 채소를 따러 나갑니다.
마침 호박처럼 생긴 채소를 발견하고 잔뜩 따왔는데, 실은 독성이 있는 식물이었던 것이죠.
그걸 모른 채로 썰어서 국 끓이는 솥에 넣은 것입니다.
국에 독이 있다고 소동이 벌어집니다.
이때 엘리사가 국에 가루를 가져다 던져 넣었더니 독성이 사라졌습니다.
엘리사가 넣은 가루는 무엇일까요?
자취하는 연예인들의 관찰 예능을 보면 음식을 만들어 맛보고는 뒤로 슬그머니 돌아서서 뭔가를 가져다 넣죠.
라면스프 같은 걸 털어 넣고 다급히 심폐소생을 하더군요.
엘리사가 집어 넣은 가루는 곡식 가루였을 것입니다.
지난 주 여리고의 나쁜 물을 고칠 때 넣었던 것은 소금이었죠.
소금이 무엇을 의미하냐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예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이든 죽은 것을 살렸다, 심폐소생을 했다 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가루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독이 있는 솥에 의문의 가루를 던져 독이 제거되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망의 독을 갖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사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사망의 독이 살아가는 동안 이곳저곳을 점점 더 오염시키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 사망의 독을 없애려면 밖에서 무언가를 집어 넣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 해독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던져져서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OECD회원국 중에서 부동의 1위입니다.
두 시간마다 세 명씩 자살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20년이 이어지고 있다는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면 우리가 이런 사회에서 버티고 사는 게 기적 같죠.
사망의 독이 퍼진 인간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돈이 많고 고민이 없으면 우울증에 안 걸릴까요?
30년 동안 행복을 연구했다는 연세대 서인0교수의 말에 의하면 불행의 요인이 사라진다고 행복이 오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적으로 굉장히 맞는 이야기죠.
전에 어떤 작가 집사님이 나와서 간증하는 데, 무려 12년간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더군요.
뭐가 부족한 분이 아닙니다.
이분이 콜로라도에 가서 미국 국방부 시스템을 관리하는 IT일류 기업의 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콜로라도의 하늘이 그렇게 파랗고 자연이 아름답다고 하죠.
우울증에 걸리고 나니까 정말로 모든 풍경이 회색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매일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며 지냈다고 하더군요.
공황장애가 살려고 애쓰는 병이라면 우울증은 죽으려고 애쓰는 병이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을 믿고 나서부터 서서히 그 죽음의 덫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죽음의 독이 퍼진 인생을 해독하기 위해선 예수님이 우리 속에 오셔야 합니다.
출애굽 때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에 던져 넣은 나뭇가지, 여리고 죽음의 샘물에 던진 소금, 오늘 사망의 국 솥에 던진 가루.
공통점은 사망의 독을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시면 우리에게서 사망의 독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또 살면서 간혹 죽음 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제 속에 예수님이 개입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가서 매달리고 문제를 의논하고 간구하면 반드시 맹독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3. 적은 양의 떡으로 백 명의 제자들을 먹이게 하신 기적입니다.
42절, 한 사람이..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먹게 하라
사회적 재난이 오면 성도들에게도 고통이 옵니다.
엘리사와 제자들도 우상의 땅에 내려진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근 중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들을 엘리사를 통해 먹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한 사람이 엘리사에게 가져온 먹거리는 무리들이 먹기엔 충분치 않은 양이었습니다.
보리떡 이십 개와 채소 한 자루였죠.
엘리사가 사환에게 떡과 채소를 나누어 주라고 하니 사환이 말하죠.
이걸로 어떻게 백 명이 먹겠습니까?
우리가 종종 하나님께 되묻는 질문이죠.
이게 될까요? 이것으론 부족할 텐데요? 불가능한 거 아닌가요?
엘리사가 말합니다.
43절,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하셨느니라
우리의 지난 날을 생각해 보면 참 희한한 게 있죠.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돈으로도 먹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참 적은 사랑으로도 살았고, 거미줄 같은 의지로도 살았죠.
하나님의 채우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인 계산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만일 세상의 계산으로만 살려고 한다면 만족한 답이 안 나올 때 늘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충분히 계산이 나온다고 해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예측 못할 수많은 변수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여러 가지 결핍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산법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엘리사를 통해 적은 떡으로 백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이로부터 칠백 년 뒤 직접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의 식탁을 차려 주셨죠.
구약과 신약의 두 사건은 한 분 주님의 몸을 떼어 온 백성을 먹이시는 대속의 상징입니다.
이것까지 묵상한다면 오늘 말씀에서 더 깊은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죠.
4. 오늘 엘리사가 제자들과 지내는 모습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지내셨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구약성경시대에 선지자가 제자들을 키웠다는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사무엘선지자 때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동체에 대한 언급이 잠깐 나오죠.
엘리사와 제자들의 공동체는 신약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생활을 엿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대체 이 골치아픈 인간을 창조하셔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일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셨던 모습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고 먹고 잠도 함께 잤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그렇게 영원히 살기 위해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게 어땠을까요?
제자들이 삼년 넘게 예수님과 즐겁게 생활한 것을 보면 하나님과 사는 게 만족스럽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기들의 흠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 신성을 느낀 뒤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우리 속이 뻔히 보일텐 데, 어떻게 불편해서 함께 살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불식시킨 것은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이 분은 정말 변치 않으실 분이다’
‘내 잘못과 허물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끝까지 사랑해 주실 분이다’
나를 조건 없이 정말 사랑해 주는 사람과 산다면 불편하기는커녕 평안히 곁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왕적인 신이 되어 다스리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릴 게 없어서 또 신하를 만드셨겠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사랑했던 것,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때 하나님은 백년에나 한번 뵐 수 있게 멀고높은 자리에 계시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을까요?
이미 성령하나님께서 나를 품고, 끼고 살고 계시잖아요?
천국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항상 대면해서 산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을 때를 상상해 봅니다.
주님께 배우며, 사역도 함께 했고, 식사도 함께 나누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서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저도 상상하며 어제는 저녁 산책을 하며 그때 제자들처럼, 주님이 곁에서 걷고 계신 듯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습니다.
성도님들께도 권합니다.
주님이 우리 집에, 그리고 내가 가는 모든 곳에서, 지금 내 옆에 계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며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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