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열왕기하2장19절-25절)

남수연 2024. 9. 5. 02:39

열왕기서나 역대서를 읽을 때는 먼저 숲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무작정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들을 보면 길을 잃고 배회하기가 쉽습니다.

열왕기서는 수많은 왕들이 나오고 전쟁이야기가 많아 영 가닥이 잡히질 않죠.

그래서 성경은 안내를 들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열왕기서는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영어 성경 이름으로는 ‘Kings’입니다.

열왕기서는 다윗왕이 죽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나라가 둘로 나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분단 된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불렀고, 남쪽은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열왕기서는 같은 시대에 살던 북쪽왕과 남쪽왕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먼저 멸망해 왕조가 끊어지고, 남유다는 마지막 시드기야왕 때 바벨론에 멸망하며 열왕기서가 끝납니다.

오늘 본문은 북왕조가 멸망하기 백여년 전 이야기입니다.

남유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우리가 열왕기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아마도 엘리야일 것입니다.

엘리야의 제자가 엘리사죠.

이 둘이 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왜 유능한 선지자들을 북이스라엘에 두셨을까요?

분단 이후 곧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북이스라엘의 신앙을 바로잡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죠.

본문 앞에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내용이 나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구했던 대로 영감의 갑절을 받고 선지자의 사역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정도 배경을 알면 열왕기서를 읽을 때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두 가지 사건은 엘리사의 첫 사역입니다.

여리고 샘물을 고친 것과 벧엘의 젊은이들을 심판한 내용이죠.

이 두 사건이 나란히 나온 것은 선지자를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 사역의 샘플이라고 보면 됩니다.

구원과 심판이죠.

이것은 지금도 죄인 세상에서 똑같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땅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과 심판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에 휩쓸려 이것을 놓치지 않게 모두가 각성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1) 여리고의 샘물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요단강에서 승천한 뒤 엘리사는 가까운 여리고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간청합니다.

19,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여리고는 역사가 깊은 도시입니다.

오아시스 지역인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렀죠.

물이 풍부해 수목이 많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지금은 물이 나빠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는 성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토산이 익지 못한다는 것은 과실만 낙과된다는 게 아니라 아기들이 유산되고 동물이 낙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그 원인을 연구해 보니 수자원에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죠.

여리고성에 있는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여호수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제일 먼저 함락한 곳이 여리고성입니다.

기생 라합이 살던 곳이죠.

여리고성에서 하나님은 아무 생명도 살리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받을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여리고성의 멸망입니다.

심판받은 성이 다시 부활하면 안되죠.

그래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대해 영원한 멸망 선언을 합니다.

여호수아6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런 저주를 받은 여리고 성읍에서 누가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로부터 4백여년이 지나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벧엘 사람 히엘이 용감하게도 여리고를 다시 건설합니다.

바알숭배가 극치를 이루던 아합왕 시대였던 걸 생각하면 하나님의 저주 따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죠.

히엘이란 한 개인이 어떻게 큰 성읍의 터를 만들고 방대한 성곽을 쌓았을까요?

히엘은 대단한 부자였고 부동산 사업가였을 것입니다.

저주받은 여리고땅을 국가로부터 싸게 사들여서 신도시를 건설한 것이죠.

그런데 열왕기상 16장을 보면 히엘이 성읍의 터를 쌓을 때 장남을 잃고 성문짝을 달 때 막내 아들을 잃었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수아의 예언이 그래도 이뤄진 것이죠.

그렇다고해서 심판의 저주가 풀린 것은 아닙니다.

두 아들이 죽는다는 예언은 심판이 영원하다는 증거일 뿐이지 아들들이 죽은 대신 여리고가 회복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리고는 여전히 생명을 이어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 무성한 아름다운 신도시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만 생명이 결실하지 못하고 계속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구소멸 지역이 되는 것이죠.

여리고는 영원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사람끼리의 노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심각한 성읍의 문제를 연구하다 여호수아가 저주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풀어주실 수가 있는 것이죠.

여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두려운 심판을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은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선지자 엘리사에게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마을사람들의 간청을 듣고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20절을 보니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라고 하죠.

그리고 물 근원에 이 소금을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여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심판의 저주를 풀고 그 성읍에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해석이 되실 것입니다.

심판받은 세상을 대표하는 여리고이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죠.

왜 하필 소금을 넣었을까요?

성경에서 구원은 무조건 예수님을 상징하기에 소금은 예수님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설탕을 넣었다 해도 예수님이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잘 발견하도록, 성경에서는 주님을 상징하는 것들을 성별 해서 다루어 줍니다.

소금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도 성경 여러 곳에서 가르쳐 놓으셨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역대하 135절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소금, 언약, 다윗의 자손이 나오죠.

심판받은 여리고가 구원받은 것은 역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언약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신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여리고처럼 사람이 살겠다고 하나님을 찾아오는 데 왜 그들을 다시 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전쟁 직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세계 180위였습니다.

어떻게 지금처럼 10위권까지 올라설 수 있었겠습니까?

1세대의 믿음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죠.

부모세대가 하나님께 처절하게 간구하고 매달린 결과 생명을 얻고, 종려나무 성읍과 같은 풍성함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께 나아온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반대로 벧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벧엘은 성경에서 유서 깊은 신앙의 명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고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자다 사닥다리 환상을 보고 제단을 쌓았던 곳이죠.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금송아지우상의 신전을 세운 곳이 이 벧엘입니다.

선조들의 신앙의 장소를 금송아지 섬기는 곳으로 둔갑시켜 버린 곳이죠.

엘리사는 여리고의 샘물을 고치고 여기 벧엘로 올라갑니다.

벧엘에는 엘리야를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에서 아이들이 몰려 나온 것이죠.

우리말 성경은 어린아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청년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엘리사의 저주로 암곰 두 마리에게 희생당한 아이들이 사십이 명이라고 하죠,

그게 그때 엘리사를 모욕했던 전체 인원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아이들 중에서’ ‘사십이 명이 찢겼다고 합니다.

사십이 명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아이들이 왜 그렇게 떼를 지어 몰려 나왔겠습니까?

벧엘의 젊은이들이 혼자 성으로 들어가는 엘리사를 방해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몰려나왔던 것입니다.

어른들의 사주를 받았겠죠.

금송아지 성읍인 벧엘에 우상숭배를 책망하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오는 걸 막은 것입니다.

벧엘에는 북이스라엘 각처에서 금송아지여호와에게 제사하러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벧엘 주민들은 양도 팔고, 금송아지 모형도 만들어 팔고, 숙박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던 것이죠.

엘리야가 없어져서 속이 시원했는데, 엘리사라니.

아예 초장부터 접근을 막겠다는 의도인 것이죠.

23절에 보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그렇게 조롱하고 야유하죠.

엘리사가 아마도 대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네 스승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다며, 너도 한번 올라가 봐라

그렇게 이기죽거리며 하나님의 선지자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사람관계에서 남을 모욕하는 것은 정말 행하지 말아야 할 악입니다.

아무리 유서 깊은 신앙의 도시라 해도 당대에 하나님을 거부하면 그들에겐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 세대가 심판을 받은 것은 더욱 비참한 일입니다.

여리고가 생명을 이어가는 것과 반대로 벧엘엔 생명이 끊어진 것입니다.

지난 달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일도 안 하고 구직도 안 한 채 그냥 쉬었다는 청년들이 44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중 335천명은 일할 생각이 없어서 쉬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이 청년들의 의욕을 꺾고 있는 것이죠.

그에 따라 파생 될 심각한 사회문제들도 걱정입니다.

또 회의적인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3%가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청소년 중 절반 이상이 하루 세 시간 이상 게임에 시간을 보내고, 23만명은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우울한 통계입니다.

한때 천만 명을 자랑하던 우리 부모세대의 신앙이 자식들에게 전수되었다면, 우리 아이들이 인생의 목적도 모른 채 저렇게 살고 있지는 않을텐데요.

벧엘의 부모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껴안고, 거기서 얻는 재물을 쫒으며 사는 동안, 자식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잃은 것과 뭐가 다릅니까?

오늘 이 두 성읍의 결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한때는 저주받았던 성읍이 하나님께 돌아와 생명을 풍성히 얻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유서 깊은 신앙의 성읍이 자녀 세대까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자녀들의 믿음을 엄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여리고와 같이 결실이 없고 죽어가는 문제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할 때 치유와 결실의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24년9월4일 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