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2022년에 이미 천만 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내년이면 천백만 명을 넘어서 초고령사회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제는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하더군요.
노노케어라고 합니다.
늙어가는 나도 걱정이지만, 늙어가는 대한민국도 걱정입니다.
요즘은 뉴스를 보면 모든 게 다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틀 전엔 미국 외교전문지에 나온 기사가 하나 떴더군요.
한반도에 전쟁이 날 가능성이 1950년 이후 가장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본래 전쟁은 위기에 몰린 독재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시나리오잖아요?
전쟁이 나면 독재자들은 손해 볼 게 없고 국민들만 고통받는 것입니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큰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죠.
사는 게 그냥 행복하다, 그런 행복감을 느끼던 시대는 다시 못 올 것 같습니다.
낙관할 수 없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성도들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어떤 상황과 문제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한 대비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 믿음의 엔진입니다.
제가 배기량이 큰 차에서 작은 차로 바꿨더니 그 힘의 차이가 엄청나게 큰 게 느껴지더군요.
우리의 기도가, 믿음의 삶을 밀고 나가는 힘의 큰 차이를 만듭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고 살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해도 그나마 내 선에서 해결할만 하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처럼 평안히 인도해 주시지만, 때로 피할 수 없이 큰 시련을 만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손에 넘어갈 국가의 존폐의 순간입니다.
일상적인 기도생활이 없다면 위기에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느슨해진 기도생활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길 축복드립니다.
1. 히스기야는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지난 주 기도회 나눈 말씀에서 북이스라엘이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죠.
남은 것은 작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유다지파 다윗 왕조인 남유다 뿐입니다.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왕입니다.
히스기야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역대하29장2절에 나옵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역사서에 다윗왕과 같았다고 하면 그건 끝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히스기야시대에 태평성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래성 게임 아시죠?
이미 속으로 곪은 남유다의 죄악과 우상숭배, 도덕적 타락은 거의 쓰러져가는 깃발과 같았습니다.
히스기야의 고군분투로 간당간당 버티고 있었던 것이죠.
그 땅의 전쟁의 기세는 홍수 산사태가 모든 것을 쓸어가듯 거셌습니다.
앗수르왕은 십팔만 오천명의 대군을 보내 예루살렘성을 포위합니다.
예루살렘성은 누가 봐도 멸망의 기운이 가득한 것이죠.
산헤립은 먼저 항복을 종용하는 문서를 보냅니다.
히스기야는 이 사실을 이사야선지자에게 알리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그 편지를 펴 놓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5절부터 19절까지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기도하는 걸 당연한 듯 생각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무너질듯한 문제들을 만나면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있을까요?
물론 이때 상황을 더 자세히 기록한 역대서를 보면 히스기야가 기도만 하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기도가 예루살렘을 덮칠 멸망의 물줄기를 완전히 돌려 놓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기도에서 배울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구약시대 하나님이 성도들을 만나는 공식적인 장소였습니다.
역대하7장15절에서 하나님이 솔로몬 성전에 대해 말씀하시죠.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히스기야는 성경의 기록대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죠.
그래서 다니엘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쪽으로 문을 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절박한 문제가 생기면 교회에 가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든 집에서든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할 자격은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약속은 기쁨이 충만해지는 응답입니다.
예수님 말씀이시니 믿고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 15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기도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룹 천사들 위에 계신 하나님, 유일하신 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은 기도의 질을 가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만큼 기도의 양과 깊이가 다른 것입니다.
잘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이런 지식들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왕은 앗수르 우상의 제단을 본떠 예루살렘 성전에 세웠던 악한 불신자였습니다.
부모에게 배운 신앙은 아닌 것이죠.
이사야서6장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기도하다 그룹 천사들이 보좌하는 하나님 환상을 봅니다.
또 성막에도, 법궤의 덮개에도, 솔로몬성전에도, 그룹 천사가 하나님을 보좌합니다.
하나님이 그룹 천사 위에 거하신다는 히스기야의 믿음은 이런 것에서 나온 것이죠.
하나님이 유일신이고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모세의 율법서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우리가 늘 대화하는 상대가 누구인지가 이만큼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설교를 듣는지가 이만큼 중요합니다.
듣는 것이 믿음이 됩니다.
세상의 정보와 지식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항상 귀에 들리게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3)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합니다.
산헤립의 편지에는 하나님을 비방하는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었다간 이미 망한 다른 나라처럼 될 거라고 협박합니다.
순순히 항복하라는 것이죠.
이 편지를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고 나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히스기야왕이 오늘 기도로 승리하기 전 뼈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1차 침공했을 당시에 조공을 바쳐서 위기를 모면했던 일입니다.
앗수르왕이 정한 조공의 액수는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가치로 따지면 600억이란 계산이 나옵니다.
히스기야왕이 이 조공을 위해 성전 문의 금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주었다고 합니다.
비참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 앗수르가 다시 공격해 온 것입니다.
의지할 동맹국도 없고, 더 이상 조공 바칠 금도 없으니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다 잃고 나서 기도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히스기야가 오늘 간절히 기도해서 이 난국만 벗어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20장에 보면 왕궁의 보물고에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이 다시 채워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삶은 우리가 잃은 것들도 다시 돌려받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산헤립의 편지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건강검진 결과표가 산헤립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갚아야 할 빚과 각종 청구서가 산헤립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자존심을 긁는 사람들이 산헤립의 편지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마귀가 쉴 새 없이 산헤립의 편지를 우리에게 날려 보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편지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한다 해도 보장을 약속해 주신 걸 믿고 그 편지를 펼쳐 놓고 하나님께 먼저 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20절에 보면 이사야선지자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히스기야에게 전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직접 응답하지 않고 이사야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히스기야의 신앙의 실력으로 보면 직접 말씀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창구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정하신 선지자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나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시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음성을 직접 들으려고 하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악령의 소리나 자기 욕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오히려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안전하게 성경에 모든 문제의 답을 주셨습니다.
저도 이번에 19장 큐티를 하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은 구절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봐야 이뤄지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가서 간증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으로 항상 성경에서 꼭 맞는 구절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문제를 의논하고 방법도 내가 찾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초자연적인 특별한 응답에만 주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우리가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기본과 원칙을 주셨습니다.
나의 삶에 대해 기도하며, 성경 안에서 스스로 답을 구하고, 얻은 말씀대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게 기도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게만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A냐 B냐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도 분명한 확신을 주지 않으시면 모든 상황을 잘 검토해서 결정하면 됩니다.
혹 실수로 안 좋은 쪽을 선택했다 해도 하나님은 그쪽에서도 충분히 좋은 결과로 인도해 주십니다.
단 마지막 선택의 순간까지 하나님의 뜻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저도 집을 계약할 때, 계약하는 그 순간까지 속으로 계속 기도했습니다.
물론 오늘 히스기야와 같이 절박한 상황에서는 하나님도 비상한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이 결과가 마지막에 나옵니다.
35절,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하나님이 전쟁을 치르지도 않도록 단번에 혼자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마귀가 성도와 하나님 나라를 해칠 때 하나님은 그 정도 수준까지 구원해주실 수 있습니다.
큰 위기를 기도로 벗어난 성도들은 그 정도까지 해 주신다는 게 믿어지죠.
물론 하나님은 남유다가 좀 더 역사에 남아 있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히스기야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아무 희생 없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디까지 행하실 수 있는지 그 놀라운 이적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이걸 더욱 잘 생각해야 합니다.
희생없이, 또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는 기회가 되게 하는 게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가 좀 더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주는나의산성교회 2024년10월9일 수요기도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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