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F2QfjKaB5Oo&t=2613s
사람 사이가 불편해지면 다시 바로잡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감정이 멀어진 사람하고 다시 마음을 맞추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고린도교회에 가장 큰 문제는 성도들간의 다툼과 분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풀어야 할 과제도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분열 문제일 것입니다.
국민들도 둘로 나뉘고 지지하는 정당이 아니면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울사도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고린도교인들을 편지로 화해시키는 것은 더 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들을 때 잘못을 깨닫고 고쳐지길 기도하며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며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과 은혜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죠.
성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분리되면 고린도교회처럼 사람의 본성인 분쟁, 교만, 온갖 정욕의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그런 적나라한 우리 삶의 문제들을 교정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외적으로 드러난 바울파, 아볼로파와 같은 파벌 문제를 안팎의 원인을 따져 바로 잡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어떻게든 교인들이 계속 싸우다 최악의 경우 교회가 와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틈이 벌어진 가족이나 일터에서의 대인관계에 우리도 잘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파벌의 원인이 된 목회자들은 다만 교회를 위해서 세우신 주님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1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 속에는 목회자, 그리고 확장하면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 모든 성도들의 정체성 두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1)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꾼’으로 번역 된 헬라어 단어는 로마시대에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벤허 영화를 보면 유대 귀족이었던 찰톤 헤스톤이 친구의 배신으로 배 밑바닥에서 노 젓는 이 노예로 전락하잖아요?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들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선장이 되어 지휘하는 교회가 앞으로 나가도록 밑에서 봉사하는 일꾼들이라는 것이죠.
로마 함선이 전쟁을 할 때 지휘관의 작전에 맞춰 노예들은 노를 저어야 합니다.
배가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 때는 노예들도 사력을 다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이 배를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갑판에서 싸우는 병력만큼이나 많은 노예들이 배 밑에서 노를 젓는 것입니다.
맡은 일을 달라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성도들의 그림이 그려지죠.
일꾼들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예수님을 위해 그렇게 섬기는 종이라는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는 것에 신경 쓰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죠.
게다가 본인들이 원치도 않는데 자기들 이름으로 파가 갈라져 싸우고 있다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조차 기억 되기 원치 않는 것이 예수님의 일꾼들입니다.
우리 장로교의 교리를 정립한 사람은 종교 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칼빈입니다.
칼빈은 죽을 때 자기 묘에 비석도 이름도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정말 칼빈의 묘는 동네 공원묘지의 좁은 자리에 이름 없이 만들어졌습니다.
후대엔 누군가가 칼빈의 묘를 식별하기 위해 존 칼빈의 약자인 JC를 새긴 초라한 묘지석을 갖다 놓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다 보니 스위스 당국에서 약간 묘를 다듬고 간단한 비문도 새겨 놓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이름 없이 전 생애를 예수님을 위해 충성하고 이름 없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일꾼들의 소망인 것이죠.
모든 성도들이 따를 분은 예수님이시지 어느 사역자도 아닙니다.
사역자나 성도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입니다.
2)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담겨 있는 구원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밝혀졌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비밀을 전하는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전하고 가르칠 때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죠.
이 비밀을 맡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게 누군가에게서 복음의 비밀을 듣고 하나님나라로 초대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막중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처럼 생활을 해 나가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이 쉽지 않기에 모든 일꾼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무릎이 아파서 병원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다시 의사를 만났습니다.
의사가 좀 어떠냐고 묻기에 많이 좋아졌다고 대답했는데, 무미건조하던 의사 얼굴이 갑자기 화색을 띄며 너무나 기뻐하는 거예요.
매일 병을 고치는 의사도 자기 일의 결과가 좋다는 말에 그렇게 힘이 나는 것이죠.
우리가 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군들이니 항상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과 응원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서로가 그걸 알아주지 않아서 문제 많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맡겨주신 대로 복음을 위해 충성을 다합니다.
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복음을 위한 바울사도의 험난한 생애를 생각하면 겁이 날 정도지만 정작 당사자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꾼 된 이상 그런 충성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충성하는 것 같아도 실제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느냐에 따라 차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경 쓰지만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를 신경 씁니다.
예수님의 평가만을 생각하는 바울사도에게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3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이 말은 우리가 남의 평가를 묵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평가를 생각하고 맡겨진 일에도 충성한다면 사람의 기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울의 경우는 최선을 다해서 잘했지만 고린도교회의 평가는 나뉘었죠.
어떤 사람들은 열두 제자가 아닌 바울의 사도권을 미심쩍어 했습니다.
목회자로서 바울의 설교를 달변가인 아볼로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일에 항상 올바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나에 대해서도 너무 과민하게 판단하는 바람에 낙담하고 우울해질 때가 많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안했다면 모를까, 했지만 잘못했을 경우는 너무 자책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훌륭히 못 해낸 것이 죄는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해도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사람들을 속으로 판단하며 살잖아요?
부모들조차도 자식들을 판단합니다.
직장에서도 일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서로를 다 판단합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다닐 때 남편의 운전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절대적인 잣대로 공정하게 사람을 평가하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잣대로 이리저리 우리를 재보고 평가하지만 마지막 날에 우리를 평가하실 분은 공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이고 엄중한 일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책할 것이 없이 최선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판단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사라지고 대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인 것이죠.
남의 판단에 너무 신경쓰지도 말고, 나도 남을 판단하지도 않도록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께서 오실 때 속의 것이 드러나고 선악 간에 갚아 주실 것입니다.
5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교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대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충성스런 수고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맡은 일을 할 때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만 끝까지 충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2. 바울사도는 이 분쟁은 고리도교인들의 교만이 드러난 것이라 진단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신기하게 사람이 사나워지고 교만해 집니다.
사나워지면 싸우죠.
바울은 아볼로와 내가 언제 그런 모습을 보였었나, 있다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서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인들의 파벌은 당연히 내가 옳다는 교만에서 온 것이죠.
이런 갈등이 없으려면 우리가 본을 보였듯이 기록된 말씀을 벗어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록된 말씀은 구약성경입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 해서 다툼이 생길 때 해결 방법은 역시 말씀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에 치우치면 ‘네가 먼저 잘못했고, 내게 상처를 줬다’는 것만 생각날 것입니다.
내가 옳은 이유만 떠오를 것입니다.
말씀대로 따라야 이 문제도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지금 말하는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레위기 19장18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구약성경은 무조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건 일부 특수한 상해에 대한 법령일 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구약성경의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가르치신 것도 용서와 사랑입니다.
누가복음10장에 보면 한 율법교사가 주님을 시험하겠다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사람이 율법교사인 걸 아신 예수님께서 되물으십니다.
‘율법에 뭐라고 써 있느냐’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27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구약성경의 율법의 의미를 이 율법교사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답을 정리하십니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바울과 아볼로는 당연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죠.
서로 화가 나는 것은 상대가 내 생각과 다르고 자기 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같이 살고, 같이 일하다 보면 나하고 참 안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죠.
잘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한테 잘 맞춰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맞춰야지 저절로 잘 맞을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다시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돌아가 서로 생각을 조율하며 하모니를 이뤄야 하는 것입니다.
남과 조율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자기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린도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책망하죠.
7절,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으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내가 더 잘나고 능력 있고 가진 것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너희의 부유함으로 예루살렘교회의 빈곤함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많이 받은 자도 적게 받은 자도 균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많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9잘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더 나은 게 있다면 그것으로 다른 성도들의 약함을 담당하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임을 항상 기억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바울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따랐는지를 고린도교인들과 비교하며 깨닫도록 가르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좋은 집에 살며 널널한 시간에 교회에 모여서 누구누구를 놓고 판단하며 자기 자랑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 시간에도 바울사도는 정반대로 여전히 고난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10절,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절,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절,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 즉 참고
13절, 비방을 받은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복음의 일꾼된 제자들이 이 정도로 고초를 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게 보는 우리에게도 편치만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충성하는 성도들을 너무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고난 가운데 밀어 넣으시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열심을 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일꾼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물론 죄에 빠진 영혼을 구원해 내는 데는 큰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죄인들 스스로의 저항과 어둠의 세력의 방해가 늘 있죠.
그러나 그 또한 하나님의 허용하심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어떤 어려움이든 만날 수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복불복이고 운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한도 안에서만 만나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용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바울사도의 시련도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고난의 의미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교인들에게서도 드러난 치명적인 교만의 문제에서 바울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파탄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교만한 사람에겐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드러나는 작은 교만이나 우쭐거림도 수면 밑에 가라앉은 부분은 거대합니다.
나는 별로 교만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권력과 실력이 주어지면 나도 놀랄만큼 반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이나 사탄이 빠진 절대 악, 교만에 넘어지지 않을 유일한 장치는 고난밖에 없습니다.
내게는 상을 주시고 채찍 대신 당근을 주시면 잘할 것 같다면, 그건 인간 본성을 너무 모르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바울사도 정도 믿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왠만한 시험은 시험이 아닙니다.
한 오 년만 열심히 신앙생활 해도 주일 예배 나오고 헌금하고 신앙생활하는 게 어려워 시험에 걸릴 사람은 없습니다.
경건 훈련을 많이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시험과 고난을 잘 이깁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얼마나 교만해 질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바울사도는 삼층천 천국에 다녀온 사람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을 어지간한 고난으로 본성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웬만한 고난 같으면 지긋이 통과하며 그게 또 바울의 훈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혹여라도 믿음이 좋아지면 스스로 겸손해 질 수 있다는 건 착각입니다.
오히려 믿음이 좋아질수록 속 교만이 더 강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경우 육체의 가시도 주시고, 이렇게 개척해서 영혼을 갈아넣고 목회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비난받고 배신당하고 그런 것입니다.
혹독한 바울의 고난 목록은 예수님께서 오히려 바울사도가 치명적인 죄에 넘어지지 않게 주신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죠.
내 환경을 자물쇠로 잠가 놓고 꼼짝 못하게 하신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죄만 짓게 됩니다.
지금 당하는 일들이 힘들지만 반드시 내 영혼의 유익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그 고난의 종류도 다르고, 강도도 다 다르죠.
다만 그것을 관리하고 결과로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고난을 보면 저러고도 살아남았다는 게 기이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난 중에도 주신 사명을 다 완수하게 보호해 주신 것이죠.
시련을 주시면 반드시 감당할 힘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 무조건 마음을 겸손히 낮추어 하나님을 신뢰하며 잘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사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런 고난을 이겨냈을까요?
우리도 방법을 잘 알아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잘 이겨내야 하겠죠.
첫째는 바울사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이 이런 고통을 허락하셨다면 그 역시 나를 위한 것을 의심치 않게 되는 것이죠.
둘째는 바울사도가 이런 고난의 생애를 스스로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일은 안 하고 싶으면 언제든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 내가 그냥 하고 싶은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상대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 지는 짐이 있잖습니까?
그 짐을 지는 것이 바울사도에겐 지지 않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었기에 자발적으로 진 것이죠.
바울사도의 모든 환난은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진심의 크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구속해 주신 십자가 사랑에 대한 바울의 진심을 다 표현할 수 있도록 예수님이 거기까지 다 허용하신 것이죠.
그렇기에 고린도교회와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하는 것입니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결국 해산의 수고로 낳은 자식 같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오늘 이 결론을 주고자 한 것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바울사도가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박해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감당했듯이 그렇게 바울을 본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좀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며 말씀을 정리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스웨덴의 육상선수 중에 미카엘 에크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선수가 열아홉살 때 하프마라톤에 출전했는데, 2킬로를 달리던 중에 설사가 터져 버립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경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변이 흘러내린 채로 계속 달려 경기를 완주를 합니다.
그때 2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기자들의 관심은 일등한 선수가 아니라 바로 이 선수였습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그런 상태로 달렸습니까’라고 묻자 이 선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번 멈추면 다음, 그 다음에도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멈추는 게 습관이 됩니다’
마카엘 에크발 선수는 이후로도 멈추지 않고 달려서 2018년 스웨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오물 취급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달려갈 길을 다 완주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도를 따라가는 데는 멈춰야 할 다급한 일, 멈추고 싶은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오직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단단히 새기고 우리도 이 땅에서 달려가야 할 길을 끝까지 완주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고린도전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9장16절-27절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 (0) | 2023.11.30 |
---|---|
고린도전서6장1절-20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 | 2023.11.17 |
고린도전서2장1절-6절 (성령으로 보이신 십자가) (1) | 2023.11.03 |
고린도전서1장 (분쟁을 끝내는 십자가의 도) (1) | 2023.10.26 |
만일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전서15장12절-19절) (0) | 2021.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