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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하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5장에서 서모와 동침한 부도덕한 일에 대해서 격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책망합니다.
오늘 6장에서는 교회 성도들 간의 소송문제와 고린도 도시에 만연했던 매춘과 음행에 대해 엄격한 목소리로 훈계합니다.
고린도교회 문제는 지금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지난 달 인천의 한 교회에서 교인들 간 금융 사기가 터졌다는 기사가 났죠.
기사 제목이 ‘교인 간 금융거래주의보’였습니다.
평소 투자의 귀재라고 불렸던 한 권사의 권유에 교인들이 줄줄이 금융사기에 걸려들게 된 것입니다.
약속한 투자 수익금이 나오지 않자 사기임을 알게 된 교인들이 결국 권사를 고소한 것이죠.
4백여 명이 670억 원대의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또 이제는 아무도 교회를 성범죄 청정지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내게 해당되는 것에 잘 순종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1. 성도들이 일반 법정에서 서로 고소한 문제에 대해서입니다.
1절,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아니하느냐
교회 내에 아마도 금전적인 문제나 사업관계에서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2절에서 작은 일이라고 한 걸 보면 형사 사건은 아니겠죠.
그런데 성도들 간의 문제가 생겨 법에 고소한 게 잘못입니까?
교회가 성도들의 민사소송 문제를 다룰 능력이 있을까요?
교회에서 시비를 가리다 교회 분위기가 안 좋아지느니 차라리 세상 법정에서 해결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사도는 꽤나 강경하게 성도 간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게 창피하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또 이상적인 교회상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신앙이 어떻게 세상 문제에는 무용지물이냐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잖아요?
신앙에 관련된 일은 교회에서 해결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세상 방식으로 해결하죠.
우리와 달리 이슬람을 믿는 국가들 가운데는 꾸란을 근거로 한 종교법 샤리아가 곧 헌법인 나라가 많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도 율법이 사회법이었던 나라였죠.
최근 영국에서는 이주해 온 무슬림들이 자기네 종교법을 영국 헌법에 반영하라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니면 샤리아법이 적용되는 이슬람 지역을 허용하라고 합니다.
유럽 안에 이슬람 자치정부를 만들겠다는 말이나 같은 것이죠.
샤리아가 얼마나 잔혹한지 한 예를 들자면 브루나이 같은 나라의 샤리아법은 절도한 사람의 손목을 절단하는 것입니다.
그걸 사회 법정에서 그대로 선고하고 집행합니다.
전에 자전거를 훔친 소년을 샤리아법을 집행해 실제 손목을 잘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하나님 말씀이 사회법이 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렇다쳐도 교회 안의 문제조차 사회 법정으로 끌고 간 고린도 교회를 바울사도가 한탄하는 것입니다.
2절,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이야말로 세상을 심판할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성도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많은 교회 문제들이 세상 법정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 지적하는 것입니다.
2. 바울사도의 말대로 세상 법정보다 교회의 판단이 과연 더 나은지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세상 법정도 공정하게 죄를 가리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죠.
오죽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법정은 증거 위주, 무죄추정의 원칙을 재판에 적용합니다.
누가 봐도 살인이 명백한데, 살인의 증거나 동기가 부족하다고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도 있습니다.
전에 임신 중인 베드남인 아내를 태우고 가다 교통사고를 내 아내와 태아가 죽고 남편만 혼자 살았던 사건이 있었죠.
처음엔 단순 졸음운전으로 파악됐지만 아내 사망보험금이 95억이었다는 데서 고의적인 살해가 아니냐는 법정다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살해동기가 없고 증거가 부족하다며 남편의 무죄로 판결났습니다.
방송사에서도 미심쩍게 다룬 사건이지만 결론은 무죄였던 것이죠.
남편은 지체 이자를 포함해 보험사로부터 백억 정도의 보험금을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반대 경우 조작 된 증거로 살인자가 되기도 하죠.
그렇게 증거조작으로 무고한 세 명의 청년들이 17년간 감옥살이를 한 게 삼례 나라슈퍼 사건이잖아요?
요즘 이 사건을 소재로 해 ‘소년들’이라는 영화가 나왔더군요.
사람이 죄를 판결하는 데 이런 한계가 있는 것이죠.
또 바울당시나 지금이나 소송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기가 더 쉽습니다.
소송이 끝났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민사 소송일 경우 손해를 갚으라는 판결이 나와도 가해자가 갚지 않고 미루면 계속 재판을 해봤자입니다.
결국 사람 관계도 끝장나고 계속 괴롭게 시달릴 뿐인 것이죠.
그래서 민사소송의 승리는 상처뿐인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누구와든 앞으로 법정 다툼하는 일이 없길 축복드립니다.
2) 교회 공동체라면 고소한 사건을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법조인이 아닌 교회가 소송 사건을 어떻게 판결할 수 있느냐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일반 시민인 배심원단들도 재판에 참여 하잖아요?
우리에게는 세상 어느 법보다 더 정확한 정의의 기준인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금전 문제였다면 교회는 어떻게 중재하고 판결했을까요?
제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그냥 지나칠게 아니라 현실에 적용시킬 때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교회 내 성도들이 금전 거래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부득이 돈을 빌려주게 된다면 나중에 돌려받지 못해도 괜찮을 선에서 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더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성경의 보편적인 원리는 두 벌 가진 사람이 한 벌을 주는 것입니다.
돌려받지 못해도 한 벌로 살 수는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일단 교회 내에서 분쟁을 다룬다면 이렇게 그리스도 안의 형제라는 게 전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형제와의 불화를 어떻게 가르치셨나요?
마태복음5장24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런 말씀으로 먼저 접근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또 주님의 비유 중 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임금이 만 달란트라는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해 준 빚쟁이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잡아서 법정에 넘긴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임금이 진노해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다시 감옥에 집어 넣잖아요?
이 말씀을 적용하면 채권자는 하나님께 탕감받은 죄값을 생각해서 어려운 처지의 채무자의 빚을 형편에 따라 조정해 줄 수도 있는 것이죠.
어떤 경우든 갈등을 조정할 성경의 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바울사도는 세상 법정으로 문제를 끌고 간 성도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판단이 나온다면 성도로서 어떻게 불복하겠습니까?
서로 순복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 판결을 받고 서로가 억울하다며 끝까지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이죠.
결국 교회는 두 사람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발한 자체가 뚜렷한 허물이고 불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갈등이 생길 때 말씀에 비춰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어찌보면 너무 쉽고 분명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기에 자꾸 세상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머리를 굴려봐도 하나님 말씀만큼 좋은 답은 없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과의 문제라 해도 기도하며 말씀을 적용하면 훨씬 더 쉽게 풀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생긴 것도 말씀에 비춰 보면 다 내 잘못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삶 전체에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말씀을 생각하고 그대로 따르는 훈련을 계속해 나간다면 세상 방식보다 더 문제들을 잘 다룰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상황마다 적용시킬 말씀을 모른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이미 우리가 들어왔던 말씀들을 성령께서 마음판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생각나게 하시는 대로 순종하시면 됩니다.
3.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이런 소송 사건은 교회 안에 퍼진 불의한 생활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사도는 일침을 놓습니다.
8절,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9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1) 고린도교인들 가운데는 당시 고린도시의 악한 풍조대로 살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9절부터 10절까지 어떤 불의한 자들이 있었는지 나오죠.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더니 기껏 이런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여기 중에 하나도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온 성도들이 여전히 이런 하나님나라를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여전히 그렇게 살면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두려운 경고를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이런 본성들이 남아 있고, 실수도 하고 죄를 짓고 회개도 합니다.
성도들이 이런 죄를 지으면 다시 영벌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린도교인들이 계속해서 이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자녀인지 의심하겠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너희가 그랬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주님의 십자가로 죄가 씻기고 거룩하게 되었고 의로워졌는데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냐는 것이죠.
잠언26장11절은 그런 것을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믿음이 시작되었다면 이전의 짓던 죄를 멀리하려는 새로운 강한 동기도 우리 안에서 시작됩니다.
삭개오를 보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바로잡으려 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하잖아요?
우리가 이미 법적으로는 완전한 구원을 받았지만, 9절에 나온 불의함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구원의 증표인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운 증거들은 점점 더 많아지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옛 불의한 일들 중에서 특히 고린도교인들에게 고쳐지지 않는 것은 음행의 문제입니다.
12절부터 길게 이 음행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천 명의 매춘부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인지 알 수 있죠.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종교 의식 자체가 방탕의 온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백 프로 이런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의 풍토가 하나님나라와 얼마나 안 맞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의 풍토도 하나님나라와 그만큼 안 맞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또 본성대로 살고 있는 것이나, 고린도 교인들이 또 고린도 풍토대로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죠.
바울사도는 앞에서 여러 가지 불의한 일들을 버릴 것을 촉구했지만 특히 성적 타락에 대해서는 다시 강경하게 충고합니다.
13절,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이 말씀은 당시 사람들의 개방적인 성문화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사람들 사고방식은 음식은 배를 위해서 있는 것이니 마음대로 먹을 수 있듯이, 몸도 마음대로 즐길 수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사회의 성의식도 놀랍게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TV프로그램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드라마나 예능프로들은 사회를 반영하잖아요?
그러니 일부일처와 동성애 반대와 음란문화를 반대하는 우리 신앙은 세상에서 환영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성문제를 간섭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불교는 일부다처, 이혼문제 등에 대해 침묵하며 그것을 관대한 결혼관이라고 하더군요.
이슬람은 4명의 아내까지 허용하며 남성들에게 교묘히 개방된 성을 제공합니다.
세상 종교는 제사와 종교 활동만 정해 주지 생활과 인격을 간섭하지는 않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신앙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배와 신앙 활동은 하되, 나머지 삶은 교회 문밖에서 행해지는 걸 그대로 따랐던 것이죠.
우리도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삶이 그렇게 다르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성문화가 근절 되어야 할 이유를 몇 가지 제시합니다.
(1) 우리의 몸은 죽으면 끝날 몸이 아니라 이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몸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몸도 그렇게 부활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미 우리의 영생하는 영을 담고 있는 이 몸도 거기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 몸은 이미 주님과 하나이기에 주님과 일치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우리는 주님과 합한 한 영인데 어떻게 매음을 하냐는 것이죠.
성경은 부부는 두 사람이 성을 통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는 인간들 중에서 오직 부부라는 관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창조의 원리입니다.
다른 누구와 부부처럼 몸이 하나 되고 영적으로 연합할 수가 있겠습니까?
에베소서에서는 이 부부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모형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부부간의 거룩과 신뢰는 철저히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 이외의 성관계는 하나님의 원리를 벗어났기에 법이 묵인한다 해도 옳지 못하다, 불결하다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정하신 원리를 벗어나면 무엇이든 흉합니다.
어느 아파트 광고에 아기를 하나 둔 부부가 이런 대화를 합니다.
아내는 ‘세 명이니 둘보다 좋다’, 남편은 ‘네 명도 괜찮을 것 같다’
손에 봉다리를 들고 유모차를 밀며 집으로 들어가면서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여보, 나 점심에 장어 먹었어’
부부이기에 이게 외설스럽지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고린도교인들의 매춘 행위에 대해서 그것은 주님이 아닌 창녀와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음행은 몸에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성에 대한 원칙을 잘 배우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결혼 관계를 철저히 지켜나가길 바랍니다.
4. 바울사도는 성도가 얼마나 세상과 다른 신분인지를 일깨웁니다.
제가 지난 주 미국 무성영화시대에 나옴직한 오래 된 흑백영화를 유튜브에서 보았습니다.
소공자라는 영화입니다.
영국백작의 아들이 미국 여성과 결혼에서 아마도 집에서 쫒겨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듬성듬성 보아서요.
아들이 죽자 백작 할아버지가 백작의 작위를 잇기 위해서 처음으로 손자를 영국으로 불러옵니다.
아홉 살 난 아이가 당장 백작이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얼마나 기품있게 말과 행동을 하는지, 영화지만 제가 놀랐습니다.
귀족들도 자격에 맞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 나름 대단히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그걸 보며 우리 성도들의 신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 몸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집입니다.
물론 몸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포함한 전 인격체를 말합니다.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구약시대 성막엔 하나님이 성도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할 수 있도록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습니다.
또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하신다는 것을 사도행전2장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몸은 성전이고, 성전 된 우리 몸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죠.
2) 우리 몸은 예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라 내 마음대로 쓰면 안됩니다.
20절,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 말씀의 원어의 뜻은 ‘돈을 지불하고 구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 값으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와 사망의 노예로 평생 살다 영원히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값도 고통이지만 저는 죄의 본성을 못 고치고 영원히 사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형벌일 것 같습니다.
그때 가면 위장하지도 못할 텐데 내 속마음 그대로 보이며 산다는 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서 소유하셨다는 것은 속박당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또 우리를 산 값은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의 값으로 나를 사신 것이니 내 값어치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값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진실하신지를 알아가는 게 평생 의 복된 과제일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냥 구원만 해주시고, 내 주인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인생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앞에 9절에 나온 대로 불의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살겠다고 한 결과가 그것이라니까요.
그게 분명히 행복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단지 주인으로만이 아니라, 성도인 우리를 유일한 신부로 사랑하고 돌봐주시는 것에 비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삶입니까?
3) 20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영광이죠.
그런데 생각과 입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몸의 활동으로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만이 아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서만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나를 확인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배우고 깨달은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서 몸이 움직여야 영이 삽니다.
봉사와 실천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죠.
생각으로만 믿으면 영이 점점 쇠약해지고 몸은 옛습관 대로 살게 됩니다.
3장에서 그런 사람을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젖만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주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내 주인이시라고 인정하는 것이고 그거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불의한 옛습관을 버리지 못해 고린도전서가 이렇게 답답게 씌여졌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엔 말씀대로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새로운 습관들이 만들어집니다.
옛습관을 따르려는 몸을 절제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것과 말하는 것과 몸이 하고 있는 것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 몸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우리 몸을 위하신다고 13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몸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세상은 고린도만큼 저속하고 난폭하고 음란합니다.
우리가 이런 풍조에 말려들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예수님과 한 몸이고,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는 우리는 성전입니다.
성전 된 우리 몸을 깨끗하게 하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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