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고전9장16절-27절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

남수연 2023. 11. 30. 20:34

 

https://www.youtube.com/watch?v=9cCh2CQq4ug

오늘 본문은 9장 말씀인데, 7, 8장에서 나오는 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1. 고린도교인들이 결혼, 이혼, 재혼에 대해서 바울사도에게 물어왔고 바울사도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합니다.

복잡한 문제들이라 간단히 답을 하기는 어려운 주제이죠.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옳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해도 성경이 주시는 원칙과 틀을 알면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바울사도가 이렇게 답합니다.

결혼해도 잘하는 것이요, 안 하면 더 잘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의 은사를 받았는지 독신의 은사를 받았는지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독신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당연히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남녀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사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약자인 여자는 가정을 이루고 남편과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이 보다 안전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가 여성들에게도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중요한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남편이 아니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책임한 말을 한 것이죠.

또 결혼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은 결혼이 인간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결혼생활, 가정, 배우자, 자녀들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매달려 자기를 쏟아붓는 사람들이 있죠.

결혼과 가족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사람은 항상 풍랑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사실 결혼을 안 한 것보다 결혼했기에 겪어야 할 고통이 훨씬 많잖아요?

결혼에 대한 성경의 원칙을 정리합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는 결혼할 수 있으면 하는 것입니다.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청년들이 독신의 은사가 아니라면 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믿음의 가정을 이루시길 축복드립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의 대전제는 부부가 갈라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부부의 계율로 세우셨습니다.

단 이혼이 불가피한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과 바울은 예외를 두십니다.

예수님은 배우자가 다른 사람하고 혼외 관계를 가졌다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부 사이의 약속과 신뢰가 깨졌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깨진 결혼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관계를 나누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 사회의 현실을 고려해 추가로 이혼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믿음이 없는 배우자가 먼저 갈라설 때는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앙으로 인해 오랜 갈등이 생기고 배우자로부터 심한 박해와 모욕을 당한 경우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이혼을 생각할 정도라면 고통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배우자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과 가정에 대한 계명을 무시하는 데 결혼관계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안다는 것이죠.

단 단서가 있습니다.

만일 안 믿는 남편이나 아내가 끝까지 살고 싶다 하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안 믿는 남편을, 안 믿는 아내를 구원할지 누가 알겠냐는 것이죠.

믿음의 부부의 경우는 가정의 어려움이나 성격 차이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기도하고 맞춰갈 수 있을 것이기에 이혼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이혼에 대한 성경의 원칙을 정리합니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가정을 유지하되, 비신자 배우자로 인한 고통과 그쪽의 요구가 있을 경우는 이혼의 여지를 둡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자녀문제나 경제적인 문제 같은 것들을 고려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도록 기도하며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또 어려움이 있는 부부관계라도 비신자 배우자의 구원을 목적으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을 권합니다.

재혼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 상대를 만날 경우 하는 것도 좋지만 바울사도의 권면은 굳이 하지 말고 나처럼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이 더 좋다입니다.

결혼과 이혼과 재혼의 문제는 가정마다 상황이 다르고 복잡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철저히 기도하되 우리의 행복과 가족의 구원이라는 열쇠로 풀어갈 것을 권유하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들에 대해서는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에만 신경쓰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 청년들은 믿음의 배우자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기도하고, 그렇게 이뤄주시길 축복합니다.

 

3) 또 한 가지 문제는 우상에게 제사한 음식에 대한 것입니다.

신전에 제사한 고기를 먹는 문제를 고린도교인들이 물어왔습니다.

우리 상황으로 본다면 제사상에서 나온 음식을 먹어도 되냐, 절밥을 먹어도 되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사제들이 신전에 바쳐진 많은 고기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현금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와 있는 고기 중에 신전 제사에서 나온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보통 때 시장에서 고기를 사는 것도 꺼림직한 것이죠.

바울사도의 대답은 어떤 고기든,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된다입니다.

음식 자체가 악한 게 아니라는 것이죠.

단 무엇이든 신앙 양심에 꺼려지면 먹지 말라, 또 내가 먹는 걸 보고 실족할 믿음이 약한 형제가 있다면 먹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만일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죽을 때까지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공의 덕과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행하라는 것이죠.

저는 고린도교인들이 신앙이 미숙하다고 생각해 왔는 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죄를 짓고 분열도 있었지만 대다수 교인들이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에까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잖아요?

현대의 신자들보다 더 신앙에 진지했고, 생활 전체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크고 작은 이런 문제들에 이들처럼 하나님의 생각을 얼마나 구하며 얼마나 따르려고 합니까?

우리도 우리 신앙의 삶을 말씀에 수준으로 항상 끌어 올려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 내리지 않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2. 본문인 9장은 바울사도의 문제를 변호하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선한 싸움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바울사도가 왜 자신을 변호하게 되었는지,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바울사도의 선한 싸움에 대해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바울사도가 자신을 변호하는 이유에 대해서입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 내에는 바울사도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처음부터 함께 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심지어 바울이 텐트를 만들며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사도가 아니기에 교회에서 지원받는 게 떳떳치 못한 거라고 수군댔습니다.

이런 거 보면 사람이 참 악하죠.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바울사도잖아요?

바울사도는 1절부터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합니다.

그것은 단지 억울한 오해를 풀려는 것보다 자기가 전한 복음과 신앙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것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사도가 사도직 문제로 이렇게 공격당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 바울사도를 부르셨다면 좋지 않았을까요?바울이 이런 자존심 상하는 문제까지 안고, 교회에 분란을 만들며 복음을 전하지 않게 하셨다면 좋았잖아요?

하나님이 이걸 좀 막아 주셨었다면, 이런 상황이 안 일어나게 좀 해주셨더라면, 이런 속상한 부분들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도 부잣집에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팔자려니 하고 살았다가 하나님을 알고 나니 얼마나 더 섭섭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하실 것이면 왜 하필 나를 노예가 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며 왜 이런 굴욕적인 삶을 내게 주셨나?

바울사도 역시 그런 질문을 했겠지만 정답을 받았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7장에서, 부르신 그대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

노예로 부르심을 입었든, 독신으로 부르심을 입었든, 병들고 가난한 자로 부르심을 입었든,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신 이대로에서 회복과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의 상태에서도 우리가 원하고 구한다면 얼마든지 최상의 인생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습니다.

또 바울사도가 교회의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18절에서 이렇게 입장을 밝힙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우리가 받은 큰 구원을 생각할 때 어떤 헌신이나 봉사도 당연할 것입니다.

다만 내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까지도 포기했다면 그것이 받을 상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생활비를 의존하지 않고 노동의 수고를 하며 목회한 부분은 바울의 상급이라는 것이죠.

성도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용된 권리까지도 포기하며 주님을 섬겼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큰 상급이 될 것입니다.

 

2) 바울 사도가 이런 비난과 억울한 오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부득불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거의 부득불 하는 것이지 우러나와서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우러나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 편안함, 즐기는 것, 그런 것이죠.

또 전하지 않으면 내 자신에게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몇 주 전 수원 권선구의 한 거리에서 길을 가던 여성이 일면식도 없던 남자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마침 차를 타고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여성을 폭행하며 목을 조르고 있었고, 여성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차를 세우고 나와서 폭행범을 제압하고 여성을 구했습니다.

아들은 그 과정에서 범인이 휘두른 칼에 맞아 얼굴을 50바늘이나 꿰맸다고 합니다.

본인도 위험을 느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살려달라고 하는데 지나치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았습니다

만일 그날 저녁 뉴스에 피해자 여성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면 이들은 아마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눈과 귀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 살려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게 사실이잖아요?

저대로 살다가 죽으면 영원히 희망 없는 영벌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지나쳤을 때 받을 고통이 복음을 전하며 받는 고통보다 크다는 것이죠.

우리의 앞에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저 가족들의 괴로운 호소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그렇기에 바울사도는 일면식도 없었던 고린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천한 종처럼 되어 섬겼다는 것입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받는 천대나 모욕에 대한 보람은 인생의 끝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손해를 본 것도 미래 나의 계정에 큰 상급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신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전도하려는 영혼 앞에서 낮아지지 않는 한, 절대로 그 사람은 구원의 열매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할례를 믿었기에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믿음과 다르지만 어떻게든 할례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였죠.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게, 약한 자들에게는 약자들에게 맞춰 다가갔습니다.

전에 이성* 집사가 이런 간증을 하더군요.

한 후배가 암으로 투병 중에 병문안을 가게 됩니다.

자기는 암에 걸려본 적이 없기에 암투병 경험이 있는 고인이 된 김자* 권사와 함께 갔다고 합니다.

생각대로 김자* 권사는 후배와 공감대를 갖고 위로하며 진지한 대화를 이어가는 데 자기는 그렇지가 못한 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성* 씨가 유방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때 제일 먼저 이성* 씨가 그 후배에게 전화를 걸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택아, 나도 암에 걸렸어. 이제 너랑 친구됐어

정말 암에 걸린 사실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암으로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전도할 수 있게 된 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그러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교사들이 가난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했고, 내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그렇게 나를 섬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족을 구원하고, 친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런 마음으로 섬길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 바울은 이렇게 일해서 복음의 공동 참여자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주님의 나라에 구경꾼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의 공동 참여자가 되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보통 하나님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죠.

헌신하고 봉사한다면 교회나 주님을 도와드린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사도는 그게 예수님의 일을 거드는 게 아니고, 도와드리는 게 아니고, 곧 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일은 힘들면 그만하고 싶지만 내 일이고 내 직장이면 그렇게 못하죠.

예수님은 우리가 힘든 일을 만나서 버거워하고 도우심을 구할 때 그건 네 일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사업에 실패하고, 아픔을 당할 때 그건 네 일이니 나와 상관없어할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이해할 때 이 정도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고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면 지금도 지체없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설마 나 같은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시겠냐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은 겸손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신 주님께 대한 도리도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그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스스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일에 기꺼이 자신을 공동 참여자로 드린 것입니다.

 

3) 바울사도는 자신도 우리도 상을 받기 위해 달리는 선수와 같다고 합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말씀은 고대 그리스의 육상경기를 예로 든 것입니다.

선수들 가운데 일등을 목표로 달리지 않는 사람은 없죠.

자기의 기량을 다 쏟아 붓고 달리지 않는 선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실력이 최상위권이 아니라 해도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결승선에 닿았을 때 한 줌의 호흡도 남지 않을 만큼 달리잖아요?

우리 믿음의 인생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달리겠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면 큰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의 경주를 어슬렁거리고 한다면 그런 모양이라는 것이죠.

 

* 그러기 위해서는 달릴 힘이 필요한 데, 그것은 훈련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경기를 위해 자신을 절제하며 훈련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일에 최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지 보면 참 대단합니다.

어느 TV에서 드라마를 새로 시작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암에 걸린 여자 주인공이 남편에게 배신당하는 그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암에 걸린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그 역할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 몸무게를 37킬로로 감량했다고 합니다.

해 봐서 알지만 1킬로 줄이기도 얼마나 힘듭니까?

단 몇십 회 연기하고 마칠 드라마를 위해서도 그런 각고의 노력을 합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의 경주가 어떤 것인지를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가 달려가는 인생의 목적지는 무덤이 아닙니다.

이 끝에는 우리에게 상을 주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고 내 믿음의 경주로 받을 상은 지극히 복되고 영원함을 믿고 계속 달리시길 축복드립니다.

 

* 바울사도는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고 합니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바울사도 같은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이 없으리가 있습니까?

그런 말은 아니죠.

바울사도 역시 우리와 같은 죄의 육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속절없이 튀어나오는 내 본심을 보면 여전히 이런 내가, 과연 구원받은 자녀로 합당하냐는 좌절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 버림받아 마땅한 게 우리 죄의 본성이잖아요?

그렇기에 그럴 때마다 다시 내 몸을 쳐 복종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위해 훈련하고 기술을 몸에 기억시켜야 합니다.

몸에 밴 습관이 믿음의 실력입니다.

훈련하고 연단하지 않은 믿음은 시련이 올 때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고 멘탈도 붕괴됩니다.

평소에 훈련하지 않은 병사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매주일 예배와 개인 기도와 말씀 읽기와 같은 경건의 훈련은 절대로 하나마나한 게 아닙니다.

그것만이 항상 준비된 신앙이 되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순간순간 불신의 마음과 낙담이 생길 때는 나를 강하게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여기서 친다는 뜻은 권투 경기에서 눈 밑을 멍들 정도로 쎄게 때린다는 당시의 스포츠 용어입니다.

별이 번쩍 날 정도로 내 얼굴을 가격한다는 것이죠.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마음에 끌려갈 때면 그런 내게 정신차려라고 한 대 먹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너 배가 불렀구나그러면서 저를 한 대 먹입니다.

제발 이것만 들어주시길 매달렸던 때를 잊고 배부른 타령을 하고 있는 내 육신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것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여전히 짐은 무겁고 지칠 대로 지친 가운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성도님들을 위로하고 축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경주 뒤에 받게 될 영원한 행복과 안식을 바라보고 스스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또 이 길에서 만난 죽어가는 누군가를 구출해서 함께 간다면 오히려 힘이 되고, 그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그런 사람들을 아무도 붙여주지 않으셨을리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영혼 구원의 열정을 되살려 기도하고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