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13장1절-13절(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남수연 2023. 12. 16. 20:43

 

 

https://www.youtube.com/watch?v=DBnjidTmhZk

 

얼마 전에 40대 아들이 60대의 친모를 폭행하고 넘어뜨려 사망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 결과가 지난 주에 나왔습니다.

존속살해 혐의로 7년의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어머니를 폭행한 이유는 술안주로 계란후라이를 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 줘 화가 나서 그랬다고 합니다.

지난주 광주에서는 부부싸움 후 홧김에 육 개월 된 딸을 15층에서 내 던져 죽게 한 친모가 구속되었습니다.

어느 남편은 아내가 출산하러 간 사이 아내의 지적장애인 후배를 데려다 성폭행했다 구속기소되었습니다.

이 사건들은 우리가 그래도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에 배신을 당한 것 같은 충격을 줍니다.

묻지마 폭행보다 더 좌절감을 주죠.

그나마 인생의 산소호흡기 같은 사랑마저 흔들린다는 게 우리 마음을 더 삭막하게 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사랑장으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어린왕자가 이런 말을 했죠.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오늘 사랑장의 말씀이 사막에 숨겨진 우물과 같다는 걸 깨닫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문제들을 통해 바른 믿음과 행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죠.

지난 주에도 출애굽한 성도들을 본보기로 구원을 자만하는 고린도교인들을 경계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맞지 않게 오늘 갑자기 사랑가가 나오는 게 좀 어색하죠.

고린도전서에는 다루기엔 좀 까다로운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1) 그 중 한 가지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는 기프트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고 알면 됩니다.

본문 앞 12장에서 이 성령의 은사의 종류가 나옵니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9,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10,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영들 분별함을, 각종 방언 말함을,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은사는 성도의 믿음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지금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든 봉사는 성령의 은사로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로 봉사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시기에는 여러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이때는 초대교회, 1세기 교회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과 구원과 심판과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지금처럼 완벽하게 기록된 성경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완성하고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 속에 성령께서 특별한 은사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이게 성경을 쓰고 있는 거였잖아요?

당시는 아주 특별한 은혜의 시대였던 것이죠.

교회사를 보면 성경을 기록했던 사도들이 죽고, 성경이 그로써 완성 후에는 이런 초자연적 은사들은 곧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보수장로교단은 기적 은사들은 성경 완성 이후로 더 이상은 필요치 않다는 입장입니다.

오순절교회나 은사주의 신비주의 교회에서는 모든 은사들이 지금도 있다고 하고 은사들을 중시합니다.

어쩌면 고린도교회의 은사논쟁은 이후 모든 교회시대에 계속될 이런 논쟁과 영적 현상들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본보기와 기준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고린도교회에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만큼 논쟁도 치열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은사로 인한 문제점은 당시 다른 교회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유독 고린도교회에서만 은사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죠.

은사에 대한 우열 경쟁과 예배시에 다투어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로 소란하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예배가 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바울사도는 특히 방언의 은사를 들여다 봅니다.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다시 집중적으로 다룰 정도입니다.

오늘 1절에서 사람의 방언천사의 말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도 고린도교회의 방언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라는 걸 말해 줍니다.

당시 고린도교인들 중에 두 가지 방언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사람의 방언은 각 나라의 언어입니다.

천사의 말은 비언어적인 말을 하는 성도들이 그것을 천사의 말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내에서도 이 비언어적인 방언기도를 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성도님들이 방언기도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으실 것입니다.

전에 이 문제만 가지고 말씀을 나눈 적이 있어서 오늘은 자세히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성경의 방언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일 먼저 방언이 나오는 곳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말이 16개국 언어로 순식간에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방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들은 모두 당시 나라들이 사용하던 외국어들입니다.

그래서 그 언어를 아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말인지 금새 통역이 가능했습니다.

이 방언은 신통한 외국어 능력이 생기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 갈라졌던 세계의 언어들이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되어 하나의 복음으로 통하게 된다는 의미로 주신 것입니다.

복음이 만국으로 전해지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비언어적인 방언이 문제였습니다.

당시엔 신전을 드나드는 고린도 시민들과 사제들 가운데서 이미 비언어적인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신전제사와 기도 중에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는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죠.

많은 종교와 무속에도 그런 종류의 방언 현상이 있습니다.

언어 방언도 성경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전에 기사를 보니 중환자실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가본 적도 없는 나라말을 갑자기 유창하게 했다는 사례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귀신쫒는 것, 예언하는 것, 방언하는 것, 병고치는 것,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처음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에베소교회처럼 성령께서 주시는 언어 방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고린도의 비언어 방언이 들어와 뒤섞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중얼거림을 단속하기 위해서 다음 장에서 이런 조치를 내립니다.

통역자가 있을 때만 공예배 중에서 방언을 허용한 것입니다.

언어가 아닌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또 통역자가 있을 때 방언을 하라는 것은 본래 방언이 개인 기도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죠.

당시 방언은 집회 중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고 성도들을 권면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또 바울사도는 방언은 비신자들을 위해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습니다.

비신자들의 각국 언어로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8절에 보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은사들은 성령께서 그 시대에 필요대로 주셨고 목적대로 된 다음엔 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같이 구글 번역기가 있는 시대라면 외국어 방언이나 통역하는 은사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은 효용성 100프로로 일하십니다.

결코 이적의 낭비는 없으십니다.

광야생활의 마지막에 여리고 평지에서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 즉시 만나가 그쳤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에 기적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신유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년 전만 해도 의술이 발전하지 않은 때라 병 고치는 은사가 교회에 유익한 은사였습니다.

지금은 왠만한 병들은 다 의술을 통해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병고침은 누군가에게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 누구든 개인 기도의 영역에서 인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사용하는 뜻 모르는 방언은 성경적인 방언은 아닙니다.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고 방언기도를 오래했지만 목회를 하면서부터 방언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성도님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야 할 직분을 받고 나니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정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방언에 대한 옳은 입장을 우리는 성경대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방언 못하는 것을 두고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까지 속단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2장에서도 분명히 방언은 단지 여러 가지 은사 중 하나라고 합니다.

또 뜻 모를 방언을 한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은사에 대한 논란을 두고 12장 끝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 그 가장 크고 우리가 사모해야 할 은사는 바로 사랑입니다.

왜 우리가 사랑을 사모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각 절마다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이 붙어 있죠.

고린도교인들이 자랑하는 어떤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예언의 능력과 산을 옮길 수 있을만한 믿음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몸을 불사른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큰 은사로 여겼던 것들도 사랑 없이 행하면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신앙 행위 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가 사랑이 없으면 가치 없는 인생인 것이죠.

우리가 늘 자신없고 부끄러운 것이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없이 하는 모든 일은 무익한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잖아요?

사람관계에서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면 당장이든, 내일이든, 한달 뒤이든 반드시 나쁜 열매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사랑을 구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1) 4절부터 7절까지는 그 사랑의 면면을 설명하는 단어들입니다.

오래 참음, 온유,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등등 열 다섯가지 사랑의 얼굴입니다.

이것은 사회에서도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의 덕목입니다.

비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좋은 성품을 갖고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귀한 일이죠.

그런 사람들로 인해 세상 구석구석에 온기가 전달되는 것이잖아요?

전에 유퀴즈에 박주* 판사라는 분이 나왔습니다.

이분은 판결문에 진심을 다하는 분이더군요.

판결문을 모아 책을 낼 정도니 판결문이 얼마나 감동적이라는 걸 알겠죠.

이분이 양형 기준대로 반복적인 판결만 하다보니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해자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고 피해자에게는 위로가 되는 판결문을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번은 사는 게 힘들어서 SNS에서 만난 청년들이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미수에 그친 사건을 판결하게 되었습니다.

집행유예 판결이지만, 그렇게 내보냈다가는 다시 자살을 시도할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삶의 의지를 갖게 될 만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판결문을 준비합니다.

박판사가 법정에서 읽은 판결문의 일부가 이렇습니다.

생을 포기하려고 한 이의 깊은 고통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조차 하기 어렵다.

어스름한 미명과 노을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내민 손이 고마워서,

모두가 떠나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미안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금껏 버텨온 자신이 불쌍하고 대견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런 법정 판결문을 들어보셨나요?

그리고 이 청년에게 책 두 권과 편지, 그리고 가지고 있던 20만원을 책에 끼워주었습니다.

동생 집으로 돌아갈 차비와 조카에게 작은 선물을 사 줄 돈이었습니다.

박판사의 판결문에 대해서 주변 판사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법정에서 감성팔이 한다는 것이죠.

박판사는 사람을 살리는 데 그런 말을 듣는 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더군요.

이 분이 그리스도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기 직업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나요?

이영* 선수가 믿기 전에 기독교인들이 정말 이상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에게 사랑이 없는 게 우수꽝스러운 집단 같았다고 합니다.

 

2) 우리의 사랑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사랑 이상이 되어야 맞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 내용과 본질은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랑은 인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성품의 파편들입니다.

대개 죄의 본성과 자기애로 왜곡된 것들이죠.

오늘 말씀하는 사랑은 헬라어 단어로 아가페라고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리스어는 여러 종류의 사랑을 각각 다른 단어로 구별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남녀간의 사랑을 에로스, 이웃과의 사랑을 필리아, 가족간의 사랑은 스토르게, 그리고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란 말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다 사랑이라고 한 단어로 퉁쳐서 번역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원인 것이죠.

성경은 하나님을 한마디로 소개할 때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짐작해 보려면 본문의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을 넣어보면 됩니다.

이 본문에 나 자신이든, 내가 아는 어떤 좋은 사람이든 대입해 보면 정말 어림없어서 고개를 가로젓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입해 보면 완전하게 일치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여기에 일치되신다는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그동안 잘 알아 온 것입니다.

사람은 친절을 베풀다가도 자기가 기분나쁜 일이 생기면 불친절해지죠.

예수님의 친절은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고, 심령이 늘 온유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을 시기하시는 건 상상이 안되죠.

예수님이 자랑하시고 교만하신 게 전혀 맞지 않잖아요?

예수님은 무례하신 적이 없고, 주님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우리처럼 성내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 사랑장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은 사막 같은 우리 인생에서 이런 사랑의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새사람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회복되었습니다.

실감이 잘 안 나시죠?

그게 이런 식으로 보통 나타납니다.

이전 같으면 화낼만 해서 화를 냈는데도, 지금은 그게 괴로워집니다.

부당한 이득이 생기면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꺼려집니다.

남에게 잘해주는 내가 순수한 친절인 줄 알았는데 자꾸 위선같이 느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아예 모르지만 우리는 그 차이를 알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사랑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항상 그렇지 못한 것은, 예전의 내 본성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선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죄의 중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새 사람을 더 강인하게 해 주실 때 성령의 사랑이 본성을 뚫고 나올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바울사도의 말씀대로 항상 성령의 은사인 사랑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이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라 의지가 더 큽니다.

감정적으로 사랑이 되지 않는 상대를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랑하려고 해보면 정말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 알게되죠.

최근 들어본 간증 중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성령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한 성도가 있더군요.

천재 플롯 연주자인 *솔나무라는 분입니다.

재작년인가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서 불운의 바이얼린 연주자 유진* 이 송연주자를 찾아서 같이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솔나무씨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젤렌스키대통령이 도움을 호소하는 영상에 마음에 깊은 동요를 느꼈습니다.

처음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영상에 우리도 놀랐었죠.

우리나라 6.25때 각나라에서 참전한 군인 외에 200백만 명의 크리스찬 청년들이 봉사하려고 찾아왔었다고 하더군요.

그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처음엔 연주자들과 함께 플롯을 연주하며 난민들을 위로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당장 이유식이 없어 굶고 있는 아기들을 보고 구호물자를 모으고 난민들에게 분배하는 창고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돈이 한없이 들어갔고 아내의 자동차까지 팔아서 구호품을 사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아직까지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끌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런 용기와 결심을 할 수 있겠냐고 하더군요.

* 연주자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에 대한 깊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밤, 너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옆에 끼고 자다가 잠이 깼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솔나무야,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니?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가서 죽어도 좋을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오늘 내가 네 두 아이들을 데려가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니?

그 말을 듣자마자 일 초도 망설임 없이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그건 아니죠. 하나님, 그건 선을 넘는 것이죠.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나는 되지만 우리 아이들은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습니다.

솔나무야, 나는 너를 위해 선을 넘었다. 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널 위해 대신 죽게 했어.

널 무가치하게 보면 안된다. 내 아들과 바꾼 것이 바로 너란다.

솔나무씨가 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각인이 되어서 그 사랑으로 난민들을 돌보게 된 것이더군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그 사랑대로 살아가는 게 이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백화점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 것이구나.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있다는 것이 기적 같았다는 거에요.

그렇죠. 폭탄을 피해 가며 폐허가 된 도시들을 넘나들다 온 사람이잖아요?

내 삶이 너무 힘들고 버거운 것 같지만 이런 별 것 아닌 일상을 꿈도 꾸지 못할 사람들이 세상엔 차고 넘친다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멀리는 아니더라도 내 곁에서 버겁게 숨쉬는 사람들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전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의 은사를 구하되,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은사를 구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만이 매일의 진부함에서, 우울감과 무기력감에서 벗어나 우리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래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그런 희생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희생도 행복한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조금씩 더 사랑을 실천하면 분명히 행복해 질 것입니다.

내 곁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주며 살아간다면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은 점점 더 부요하게 부어지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