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목회데이터 연구소에서 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 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우려스러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응답자 1000명 중 400명은 확실한 믿음이 없이 그냥 교회만 다니는 명목상, 이름 뿐인 기독교인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음 같은 몇 가지 항목에 대한 응답으로 명목상 교인을 예측했습니다.
예배 외에는 성경읽기나 기도를 전혀 안 한다.
스스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여긴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
언제든 신앙을 멈출 수 있는 사람들이 40%나 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에 대해서 단단히 경고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자녀같고 형제같은 고린도 교인들이 끝까지 믿음에 바로 서서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죠.
바울사도는 구약의 출애굽 성도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합니다.
11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마찬가지로 출애굽 역사와 고린도교인들의 문제까지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믿음을 되살리고 용기와 힘을 얻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1. 출애굽성도들은 우리 신앙의 본보기로서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60만 출애굽 장년세대 중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우리들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1) 모두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1절,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가운데로 지나며
이것은 애굽을 탈출한 성도들이 홍해를 건넌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 이 홍해를 건넌 것을 우리가 세례받은 것과 같다고 하죠.
2절,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구약성도들과 고린도성도들과 우리들의 공통점은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세례는 본래 물 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는 게 원형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심판받을 죄의 종이었던 내가 물속에서 죽었다는 것이고, 물 밖으로 나올 때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홍해를 건넌 세례는 우리가 받는 세례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렇게 한번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홍해를 건너기 이전의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군사들이 자기네 종을 잡으러 쫒아 온 것입니다.
만일 홍해를 건너지 않는다면 평생 애굽의 노예로 살다 노예의 신분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가 세례라면, 홍해로 들어간 애굽의 노예는 죽는 것이고 홍해를 건너서 나온 사람은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제는 애굽의 노예가 아닌 것이죠.
그래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을 애굽 군사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합니다.
애굽의 군사력이 타격을 받았지만, 전열을 정비해 얼마든지 따라와 잡아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사람들은 이후 애굽인들과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됩니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다시는 애굽 군사를 안 보게 된 것이죠.
이것은 다시는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의 종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지금은 똑같이 보이는 것 같지만 이런 엄청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종으로 붙잡아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의 진리들은 짧은 설명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진리들을 듣고 이해가 될수록 명목상 신자들도 점점 참 신자가 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두 번째 공통점은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3절,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것은 출애굽 성도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 반석에서 난 물을 말합니다.
홍해를 건넌다 해도 만나와 반석의 물이 없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생존할 수가 없죠.
만나와 물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만나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셨죠.
그리고 4절에서 반석에서 난 물도 예수님이라고 바울이 해석합니다.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출애굽의 성도들은 만나와 물의 의미를 몰랐지만, 살기 위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만나와 물을 단지 육체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을 구원하는 양식이라고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기적의 양식을 예수님과 동일하다고 인정하신 것이죠.
만나와 물이 예수님이시기에 구약성도들도 그것을 먹고 우리처럼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신 뒤 주님을 먹고 마신 것이죠.
그것을 게속 기억하도록 정하신 것이 성만찬입니다.
출애굽성도들이 만나를 섭취했듯이 우리도 오늘 성찬식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섭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후반에서 신령한 반석이 그들을 따랐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따랐다’는 단어는 현재형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반석에서 나온 물이 한번만 나온 게 아니라 계속 이스라엘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을 유대교 문헌에서는 광야 40년 동안 물을 내는 넓은 반석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상상력이 좀 과했죠.
바울사도가 이렇게 표현 한 것은 우리 영혼에 생수를 계속 공급하시는 그리스도를 언급한 것인데 생각해 보면 아주 든든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 생수가 솟아나는 암반이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의미가 생생하게 느껴지죠.
지난 한 주도 갈증 나는 세상에서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아 마신 것입니다.
한 주간 예수님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던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지난 한 주간 흙먼지가 푸석푸석한 메마른 마음으로 광야 같은 환경 속에서 지냈을 것입니다.
지난 주 조계종총무원장을 지낸 자*스님이란 분이 분신으로 세상을 떠났죠.
불교계에서는 소신공양이라고 하더군요.
대개 유명한 승려들은 죽기 전에 열반송이라는 것을 남기나 봅니다.
열반을 기린다는 뜻입니다.
승려들의 평생 수행의 명언이자 유언과 같은 것이겠죠.
이번에 죽은 자*스님도 이런 말을 유서로 남겼더군요.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가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
불교인들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사를 초월할 길을 찾아 수행했지만 여전히 죽음 앞에 산다는 것이죠.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은, 만족한 도를 얻었다기보다 세상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삶이 계속 목마르고 채워지지 않고 지치기만 할까 생각이 되십니까?
그게 세상이고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따르는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러나 한강 물 같은 생수가 우리를 따라온다 해도 마시지 않기에 갈증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항상 마음을 향하고 삶을 감당할 힘과 활력을 주시길 기도로 간구하며 목마름을 해소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그런데 이 출애굽 성도들의 구원여정은 실패로 마감합니다.
그들 중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5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여기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체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여정을 떠나 왔지만 모두가 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바울사도의 본심이 뭔지 아시겠죠?
교회에 나와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고린도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없길 주의하라는 것이죠.
6절,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악을 즐겨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현대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강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출애굽 성도들 중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구체적인 실례가 나옵니다.
7절부터 10절까지에서 이들이 행한 악의 예시가 나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란과 의심과 원망입니다.
1) 7절, 우상숭배의 경우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했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다 갑자기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동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불안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형상으로 새겨지지 않은 신을 본 적이 없거든요.
‘아니, 하나님이 대체 어떻게 생기셨다는 거야?
애굽에서 경험한 신들은 온갖 동물과 곤충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인반수의 형상도 많았습니다.
형상이 없는 하나님을 섬기라니 당황스럽고 불안하고 심기가 불편한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섬기는 게 쉽지 않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만 듣는 게 때로 답답하잖아요?
직접 음성을 듣고 싶죠.
그런데 세상 종교의 신들은 어떤 형상이 있고, 당시 제사에는 화끈한 뒤풀이도 있었습니다.
7절에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고 하죠.
사람에게서 고안된 신은 이런 인간의 죄를 옹호할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출애굽 세대가 경험한 애굽의 신들이나 고린도교인들이 경험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그런 신으로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금송아지 여호와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금송아지 제사를 드리다 멸망한 것을 상기하며 지금 우상 신전의 축제를 드나드는 고린도교인들을 경계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21절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우리가 자란 문화적 토양에는 미신, 불교, 무속, 제사, 역술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이런 잔재들을 끌어 안은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지 잘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2) 8절은 출애굽 세대의 더 적극적인 우상숭배와 음행의 예를 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음행하다 이만 삼천 명이 죽은 사건 아시잖아요?
가나안 진입을 코 앞에 두고 모압의 왕 발락과 점쟁이 발람의 꾀에 넘어가 모압 여인들과 음행 했던 사건입니다.
모압사람들의 바알축제에 이만 삼천 명이 우르르 몰려가 제사에 참여했다니 기가 차죠.
사람의 본성인 음란과 음행을 절제하고 다스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평생 음란한 마음으로 살다 죽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음행을 하게 되죠.
얼마나 많은 정치인, 유명인들이 음행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추한 모습으로 물러났습니까?
그나마 우리의 음란과 음행을 틀어막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주를 시험하고 원망하다 뱀에 물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광야 여정 중에 나쁜 길을 지나며 불평이 폭발한 일입니다.
그냥 길이 나쁘다고 투덜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 한다고 악담을 한 사람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죠.
불뱀은 본래 광야에서 사는 동물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던 손만 거두시면 진으로 기어들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의심하고 원망하다 하나님 보호에서 제외 되고 멸망합니다.
우리가 가장 좋았던 때, 가장 이상적인 것만을 기대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건강이든, 물질이든, 어떤 환경이든, 사람 관계든 늘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젊은 세대는 남과 비교되는 경쟁사회에서 항상 불만족스럽고, 나이든 세대는 모든 게 감소하는 환경에서 매일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광야는 초원이 아닙니다.
만나와 반석의 물은 광야를 지나기 위한 최선의 음식입니다.
광야에서 포도원을 바라고 젖과 꿀과 버터로 차린 식탁을 바라는 건 생각이 잘못 된 것이죠.
그것은 가나안땅에서 누리게 될 것이잖아요?
인생 광야에서 최선의 것을 주시고 수많은 불뱀과 전갈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으로 감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 음란, 의심과 불평을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나안과 맞바꾼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바울의 엄중한 명령이 내려집니다.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출애굽 세대들은 이렇게 신앙에 실패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자부심은 엄청났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만 하나님의 종이냐, 우리도 그렇다’ 반역하곤 했잖아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꼭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니 우리는 구원받았고 성령의 은사도 받은 신령한 자들이라고 자만했습니다.
바울사도에게 간섭 받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자만은 이미 구원은 받았으니까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게 뭐가 문제냐는 방종으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문 앞 9장 마지막에서 복선을 먼저 깔아 놓았습니다.
9장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나도 이러니 아무도 먼저 샴페인을 터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홍해에서 다 같이 세례를 받고, 다같이 만나를 먹고 그리스도이신 반석의 물을 함께 마신 출애굽 성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멸망한 걸 보라는 것이죠.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알았지만 사실은 명목상 구약신자였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없으리라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광야에서 주검이 된 출애굽성도들 중에 자기가 구원받지 못하고 파멸 당할 것을 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사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그들에게 감당할 수 있을만한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기까지 이어오던 내용에 좀 엉뚱한 이야기 같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출애굽 성도들이 실격당한 시험들은 이길 수 있는 것이지 특별히 어려운 시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들이 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이지 더 고난이도의 시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하나님이 신실하셔서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시험을 선별해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험에는 다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피해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한번 당하면 벗어나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 안에는 답이 있다는 것이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마련하신 피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시험을 만날 때면 어떻게 죽지 않고 피할 수 있을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큰 변고를 피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환경을 인도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들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정말 헤쳐나오기엔 역부족인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나서부터는 이겨내지 못한 시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별로 기억이 나질 않아요.
큰 환난을 당했다 해도 이겨 냈고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효력 있는 피할 길은 언제나 내 곁에 있습니다.
위라*이라는 유튜브를 운영하는 박* 라는 형제가 있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술 마시고 클럽에 다니는 것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밤새 술을 잔뜩 먹고 주일예배에 간 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술과 쾌락을 포기 못해요. 그냥 회색 크리스찬으로 살다 죽을 때 회개할께요.’
그리고 얼마 후, 직장에서 정규직 발령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강남에서 인생을 자축하며 술파티를 하고, 필름이 끊기게 됩니다.
눈을 떠보니 중환자실에 누웠는데, 목 아래로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술에 취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1미터 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목이 완전히 꺾어지고 척수가 끊어져 신경이 영구 손상되고 맙니다.
의사는 평생 전신마비의 상태로 살 것이라고 했지만 가족과 교회의 간절한 기도로 2개월만에 손가락 하나가 움직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처음 2년 동안 가족들이 대소변을 처리해 주고 정성으로 돌봐줍니다.
아버지가 대변을 치우며 오늘 똥이 예쁘게 나왔다고 기뻐하시는 걸 보고 너무 죄송해서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다 자랐던 자식이 다시 아기로 돌아간 것이죠.
피나는 재활치료의 결과 2년 만에 200그램의 휴대폰을 손으로 들게 됩니다.
그리고 5년 정도가 지나자 휠체어를 타고 상체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회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냉냉한 마음이었습니다.
기적으로 병 낫는 사람들도 있던데 왜 나를 완전히 고쳐주지 않는지 속상하고, 인생은 여전히 잿빛이었습니다.
축구선수가 되려고 영국까지 갔던 건장하고 잘난 청년이 영구 장애인이 되었으니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큰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내 가족이 끝까지 나를 돌볼 수는 없을 텐데, 그때가 되면 어떡하지?
더 이상 병원비를 낼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생각에 서러운 울음이 복받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빌립보서4장1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울면서 이 말씀을 계속 반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무너졌던 마음에 작은 소망이 꿈틀거렸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3장16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머리 속에 그려지는 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계시구나, 나를 위해서.’
그 순간 그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다 씻어주셨다는 게 처음으로 믿어집니다.
‘주님 죄송해요’ 그 말이 한없이 나오며 울며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불쌍하고 서러워서 울던 눈물이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안도의 눈물로 바뀐 것이죠.
그후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고 자기 연민에 우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체는 여전히 마비된 상태이지만 자기 같이 절망을 당한 사람들을 유튜브 영상과 강연을 통해서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해외여행, 스킨스쿠버에 위라* 택시운전까지 거의 정상인들처럼 해냅니다.
박* 형제의 영상을 보며 장애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올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큰 시험에도 감당할 힘과 피할 길을 주셨던 것입니다.
박* 청년의 모든 시험의 ‘피할 길’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가장 확실한 ‘피할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고 더욱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출애굽성도들과 고린도교인들의 실패한 모습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출애굽성도들은 가나안입국에 실패했고, 고린도교인들은 책망을 받아야 하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넘어진 시험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시험도 감당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피할 길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경우의 가장 확실한 피할 길은 예수님이심을 믿고 항상 주님을 믿고 따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따르시는 생수의 반석이 되어 주셨으니 매일 주님으로부터 풍성히 채움 받는 성도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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