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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고린도전서를 함께 배우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았다면 아마도 좀 의아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교회인데, 이 정도로 문제가 많다구?’
‘이런 사람들도 구원받은 성도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절에서 바울사도는 이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자주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9장 40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교회 안에 모인 신자들은 단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신자들은 주님을 위하는 자들입니다.
내 믿음에 대해서 아직 자신이 없는 분들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으니 예수님과 같은 편이구나.’
하나님은 반드시 연약한 우리를 주님의 날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이 미성숙한 신자들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부끄러움도 우리와 같은 본성의 뿌리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전서는 성도이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로서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문제들을 배울 수 있는 성경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우리의 문제들도 잘 풀어갈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부어 주시길 기대합니다.
1. 고린도 교회와 바울사도의 관계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알면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전서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고린도의 현재 위치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지금은 소도시가 되었지만 이천 년 전 바울사도가 이 편지를 쓰던 때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아시아쪽에서 이탈리아 로마 쪽으로 들어가는 많은 물자들이 고린도 항구를 거쳐 갔기 때문이죠.
상인들과 뱃사람들이 오가는 항구 도시는 특성이 있죠.
뜨내기 인구가 몰리다 보니, 보수적인 농촌 분위기와 달리 각종 향락과 일탈행위가 번성하게 됩니다.
고린도는 상업으로 부자가 된 도시지만 품격있는 문화가 갖춰진 곳은 아닙니다.
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앙 자체가 성적 타락의 온상이었습니다.
그런 고린도 도시에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하러 들어간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에 세 번 해외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그 중 두 번째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할 곳이 많았기에 한 도시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일년 반을 머물며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우상숭배의 문화 속에서 방종하며 살았기에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되기까지는 참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죠.
수십 년을 믿었지만 ‘예수님 제자답다, 하나님 자녀답다’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에 이후로도 문제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마친 뒤 아볼로라는 제자가 이 고린도교회의 2대 목회자가 됩니다.
그래서 3장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볼로 이후에는 본문에 게바라고 나온 베드로사도도 고린도교회를 잠시 방문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목회했던 아볼로도 지금은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에베소에 와 있다는 걸 16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말을 하죠.
12절,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린도교회에 아볼로를 다시 보내려고 하지만 아볼로는 갈 생각이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목회하며 아볼로도 꽤나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은 성도들의 분쟁, 성적인 문제, 성도 간의 소송 등 다수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죠.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답답한 이유는 과연 이런 큰 문제들을 신앙으로 해결할 수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늘 바울사도를 통해 주신 해법들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만 가지 문제가 있지만 성경의 답은 항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만 가지 문제의 답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이 편지와 수고,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의 순종으로 결국 이 문제들은 거의 해결이 됩니다.
2. 오늘 바울사도가 가장 시급하게 다루는 문제는 교회의 분쟁입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로 갈라져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분쟁’이라는 단어는 통으로 짠 옷이 갈갈이 찢어진 것을 뜻합니다.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교회가 완전히 쪼개질 정도가 된 것이죠.
성경은 우리 안에 싸우고 분쟁하는 본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아이들이 유치원만 가도 싸우고 돌아오죠.
내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뭉쳐서 싸우자는 게 분파입니다.
어디서든 사람들이 끼리끼리 뭉치는 것은 힘을 키우자는 의도입니다.
창세기에서 보았던 이삭의 집안만 해도 겨우 식구 네 명이 둘씩 편을 먹고 갈등이 있었잖아요?
세 명 정도면 한 마음일 것 같지만 그중 두 명이 손을 잡고 다른 한 사람은 소외되는 게 사람의 본성입니다.
가족끼리도 은근히 이런 편 먹기가 있습니다.
최근 박수0 이라는 연예인의 가족들의 소송전에서 가족들이 저럴 수 있나, 부모가 자식에게 저럴 수가 있나,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작은 아들인 박수0 씨가 평생 돈을 벌어다 식구들을 먹여 살렸잖아요?
그런데 큰 아들이 수0 씨의 돈을 거의 횡령했다는 혐의로 소송 중입니다.
이번에 기사를 보니 부모들이 큰아들 편에서 작은아들을 사정없이 난도질을 했더군요.
연예인인 수0 씨 입장은 생각지도 않고 사생활까지 거론하며 인격을 밟아 뭉개버렸습니다.
내 부모가 나를 저렇게 했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수0 씨는 자신이 고아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죠.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 클라렌스 대로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전반은 부모님이 망쳐 놓고, 후반은 아이들이 망쳐 놓는다’
많은 범죄와 송사 속에서 살았던 변호사의 눈에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 가정의 불화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죠.
가족이 불행의 원인이라니 인생이란 게 얼마나 고됩니까?
인간 역사에서 서로 화합한 예가 없습니다.
가족 간에도 조직이나 국가 간에도 인간은 늘 다투고 싸웁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5장20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도 그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엄히 경계하십니다.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그런 것처럼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10절에서도 바울사도는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다투지 말고, 분쟁하지 말고, 편가르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확실히 덜 싸우게 됩니다.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베드미턴 금메달을 딴 안세0선수에게 기자가 큰 경기에서 실수할까봐 떨리지 않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선수 대답이 습관이 될 만큼 훈련을 너무 많이 해서 거의 자동으로 경기력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감동적인 금메달 경기 후 광고 방송출연 요청에 나는 연예인 아니라고 정중히 거절했다죠.
마음 관리도 참 잘 된 선수인 것 같습니다.
훈련의 중요성, 되는대로 살지 말고 훈련하며 살아야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규정대로 노력해서 얻은 신앙습관은 쉽게 죄와 본성에 넘어가지 않게 도와줍니다.
갈등과 다툼은 정말 우리 삶을 아깝게 소진할 뿐입니다.
평온하던 집안도 한번 다투고 나면 그렇게 불편한 데가 없잖아요?
좋은 것이 저절로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분쟁이 없도록 마음을 훈련하고 더 노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바울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분쟁의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18절부터 31절까지 내용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별로 상관이 없는 십자가이야기 같죠.
그러나 바울사도의 분석은 정확합니다.
이 모든 사달이 난 것은 너희들이 십자가 복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등과 분란은 예수님을 가까이하면 내게서 멀어지고, 예수님을 멀리하면 내 곁에 바짝 다가옵니다.
누구하고든 자꾸 다툼이 있고 관계가 불안하다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도 있지만 나 자신과도 갈등이 있고 마음 속에 분란도 만만치 않게 되죠.
우리 신앙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상에도 항상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자꾸 예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잘 기억해서 순종하려고 애쓰면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진 증거는 다른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 엉뚱하게 바울, 아볼로, 베드로를 따르고 있는 것이죠.
각각 다른 것을 따라가니 하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를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갈등 관계와 문제도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우리도 다시 잘 배워야겠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생각하면 서로 옳다고 다투고 분쟁 할 수가 없습니다.
1)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포함 된 내용을 말하는 데 도라는 말 안에 벌써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죠.
먼저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핵심을 세 가지로 정리하자면 하나님, 죄, 대신 속죄를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요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조하고, 다스리고, 심판하고 구원하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가르쳐 줍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지은 죄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일찍이 하나님을 배반했고, 지금도 거역하며 본성의 죄를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걸 가르쳐 줍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도소의 입소자들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갔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죄를 짓고 후회하는 사람들이니 인간이 죄인이라는 걸 잘 이해하리라 생각해서 말씀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다가 거의 폭동이 일어날 뻔 했다고 합니다.
교도소 안에서도 사람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십자가가 불편한 것은 왠지 죄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걸 천국 갈 때까지 놓으면 안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내 죄를 대신해서 주님께서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온 자들을 예수님의 대속을 적용시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이 세가지 내용만 봐도 고린도교인들 처럼 교만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지혜로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십자가의 도는 성경으로 가르쳐야만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똑똑하고 영리하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내는 지혜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못 보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알쓸신잡이라는 프로에 나오는 과학자 김성욱교수가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길, 과학이 종교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일례로 왜 인간만이 마음대로 소, 돼지와 같은 가축들을 죽여도 되냐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본다면 돼지나 사람이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똑같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사람만이 가축을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만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차이를 생각하면 종교 말고는 딱히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원천과 기반이 거의 종교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종교를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종교에서 말하는 절대자, 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과학자는 이정도까지 밖에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속에는 만유의 주인이신 창조주가 계시고, 그 창조주를 부인하며 죄짓고 사는 죄인들이 있고, 죄인들이 영원한 심판을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들어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 어디에 내가 더 옳다고 싸우고 분쟁할 거리가 있습니까?
내가 저런 죄에서 구원받은 죄인인데요.
2) 이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과 희생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처참한 십자가 형틀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를 이해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겸손을 함께 따라야 합니다.
교만한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죠.
고린도교인들의 분쟁은 예수님을 놓치고 겸손도 놓쳤기 때문입니다.
분쟁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더 낫다, 내가 더 옳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다툼은 항상 내가 더 옳다는데서 나오잖아요?
우리의 교만한 본성은 항상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죠.
구원받은 성도들도 교만합니다.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교만하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본 적이 없습니다.
겉으로 다 드러나게 교만할 수도 있고, 세련되게 속으로 교만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교만하든 사람들은 나의 교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따르면 복이 될 원리를 주시고, 이전과 달리 그걸 지킬 수 있는 거듭난 영과 성령의 도우심을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자동으로 새계명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의지와 노력만큼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라고 신앙 경력이 오래되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 경력이 쌓이고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할수록 더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우리가 주님의 겸손을 본받으려 애를 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는 내 구원의 이력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주님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교만해질 수도, 남을 무시하고 다툴수도 없는 것이죠.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린도 도시에는 학문적으로 특별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도 그리스 철학이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 텔리스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리스에서 나왔지만 대도시인 고린도 출신 철학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세속적으로도 지혜로운 자가 고린도에는 별로 없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도 그렇다는 것이죠.
또 능력 있는 자도 , 문벌 좋은 자도 많지 않은 것이 고린도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도 그런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가 나한테 이 문제만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조금만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얼마나 인생이 유리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는 하나님 앞에 나오지도 않겠지만, 나와서도 그것을 자랑한다면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잘난 사람들이 많은 아테네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시고 이런 고린도에 왜 교회를 세우셨겠냐는 것입니다.
27절,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에서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래서 구원받았는데 이제와서 하나님이 폐하시려는 것들로 다시 나를 치장하고 자랑하려 하냐는 것입니다.
아무 자부심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이 살라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에 속한 자랑입니다.
29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대신 31절에, 자랑할 것을 자랑하라고 하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분이 된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시시한 것을 자랑하면서 왜 이 큰 구원의 영광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야고보서는 낮은 형제는 이렇게 높아진 자기를 자랑하고 합니다.
지금 내게 모든 게 부족하고 구부러진 것이 펴지지 않는 고통의 환경이라 해도 그 구원을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모든 상황에서 자랑스럽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또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육체에 속한 자랑거리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을 알게 된 낮아진 마음을 자랑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겸손한 마음을 존귀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다시 가르치는 십자가의 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겸손이고 성도가 그것을 따라야 한다.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우리 같은 죄인을 부르셨다.
이 세 가지를 다시 붙드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들이 자기를 내세우고, 본성의 욕구를 따라 분열하는 이유를 바울사도가 그렇게 진단한 것입니다.
‘너희에게 예수그리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부족하구나’
내 주변과 내 안에서 뭔가 분열이 있고 자꾸 깨지고 화평이 없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아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묵상해 가면서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주님의 부요하심을 충만히 누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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