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고린도전서4장1절-13절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남수연 2017. 11. 7. 13:43

지난 주 영화계에선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떠들썩했던 배우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같은 날 배우 김주혁씨의 좀 황망한 장례식도 있었습니다.

두 사건 기사를 동시에 보면서 삶과 죽음, 웃음과 눈물, 만남과 헤어짐은 서로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김주혁씨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소식에 연예계에 별 관심 없던 사람들조차도 퍽 안타까워하는 것 같습니다.

선량해 보이던 눈빛에 늘 외로움이 서려있던 사람이어서인지 김주혁씨의 죽음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 한켠이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한편 행복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송중기, 송혜교씨의 그림 같은 결혼식 사진을 보니 둘러선 사람들이 죄다 스타들이더군요.

이태원에 있는 백 억짜리 집에서 신혼을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도 세기의 결혼식의 주인공이 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교회와 예수님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동거가 시작 되는 혼인식이죠.

이 날을 기대하고 소망해야지 이것이 낯설게 느껴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예수님의 연합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통해 상징해 놓으신 신비입니다.

이 신부를 얻기 위해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은 지극하고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신비하고 독보적인 그 존재에 대해 잘 모릅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개별적으로 두시는 게 아니라 교회에 이식하고 한 덩어리, 한 몸으로 양육하십니다.

교회의 세포로 존재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 생명과 충만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벗어나 개인적인 신앙을 키워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라는 조직에 속한 것,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친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혼자서는 절대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돌보시지만 가장 좋은 것은 교회를 통해 성도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역사의 끝날,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완전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그렇게 분투한 것입니다.

교회가 복되면 성도들도 복됩니다.

교회가 사분오열 되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지 않으면 성도들의 마음에도 금이 갑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도 금이 가는 고린도교회를 봉합하려는 바울사도의 절박한 심정에서 씌어 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참된 주님의 일꾼이 되어 우리 자신과 교회를 잘 세워나갈지 깨닫는 복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바울도 1절에서 자신을 그렇게 지칭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이 말씀에서 좀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시나요?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던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바울은 열두제자 중에 속하지 않았잖아요?

예수님의 생애 중에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의 직무를 하면서도 자주 불신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바울은 들려오는 이런 소문에 대해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섬긴 일을 되짚으며 그런 삶이 바로 사도와 일꾼의 증거라고 이 편지를 통해 강변하는 것입니다.

대조적으로 고린도교인들의 항상 미숙했던 모습을 책망합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본문에 배경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느 이 바울에게서 예수님의 일꾼이 어때야 하는 지를 발견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일꾼이라고 번역 된 단어는 로마시대 함선 밑에서 노를 젓던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이라고 믿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다면 종이 있는 것이고 종이 있다면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엔 주님은 있는 데 종은 없는 기이한 신앙풍조가 팽배합니다.

우리 신앙의 시작점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종이라는 인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는 삶은 단지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내게 대한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당연한 말씀을 싫어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주님이시라면 내게 주신 시간, 건강, 물질, 직장의 모든 권리를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춰 내 뜻을 조정하며 살아야 맞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종이고, 일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한 달란트부터 열 달란트까지 고루 나누어 주고 장사를 시켰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바울사도 하나님의 집에는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이 있어 다 주인 뜻에 맞게 씌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되고 일꾼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집에서도 아이가 자라면 밥상에 숟가락 놓는 일이라도 시켜야 하듯 하나님나라에서도 성도들에겐 각각 맡은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단지 의무만이 아닙니다.

장차 상속받을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상속자의 권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노동력을 착취하시려는 게 아니잖아요?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 봉사하는 일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비밀, 계시라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경영하심을 뜻합니다. 그것이 실체로 드러난 게 교회입니다.

일꾼은 이 구원 계획이 이뤄지도록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서 일하는 것이죠.

이 사명은 바울 같은 전도자나 목사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습니다.

지난주가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5백주년을 기념하는 주간이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꽃은 이신칭의, 즉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빛나는 항목은 카톨릭교회가 성도를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으로 나눈 것은 틀렸다는 조항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에 교회를 향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하셨으니 모두가 성직자이고 만인제사장이 옳다는 것이죠.

교회에서 목사나 전도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제사장직이고 평신도들은 육체적인 봉사나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입니다.

결국은 다 교회를 세워가는 복음의 일꾼인 것입니다.

바울처럼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우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를 더 굳게 세우고 지원하는 봉사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 어떤 일이든 우리가 맡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면서 일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걸 모른느 상태에서 교회봉사를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영적지식을 배우고 힘써 지킴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갖고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보면 구원의 비밀에 대한 지식과 믿음의 성장이 너무 더디다는게 참 문제입니다.

이 구원의 지식을 배워가는 데 참고하면 좋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주의력의 힘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주의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자산이 주의력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주의력을 갖게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학적 근거로 연구한 내용인데요.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눈으로 보고도 뇌에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실험에서 여러 사람이 공놀이 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몇 번 패스하는지 세어보라고 하니까 공 세는데 집중하느라 그 뒤로 고릴라가 지나가는 데도 그걸 보지 못하더군요.

배경 커튼의 색깔이 바뀌고, 심지어 한 명이 퇴장했는데도 인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의가 할당되지 않으면 눈 앞에 있어도 뇌에 인식되지 않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에든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뇌에 남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주의를 기울여 그 뜻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냥 장 수만 넘어갑니다.

그렇게 십년이 가고 이십년이 가는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우리 신앙은 성경지식에 기반을 두어야 바르게 성장합니다.

존 칼빈은 믿음의 근거는 지식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구원의 지식을 배워야 하고, 평생에 이 지식을 열심히 늘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생활은 습관이 지배한다는 것 아실 것입니다.

성공적인 길이 수 천 가지가 있어도 습관화 되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청소년부는 학교 공부나 성경공부나 습관이 되도록 자신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구원의 지식을 이해하고 더 풍성히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본성의 상태로 눈을 뜹니다.

매일 다시 나를 붙잡아 신앙으로 사는 습관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가는 기쁨과 예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기쁨으로 점점 더 충만한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들이 주의해야 할 것을 몇 가지 가르쳐 줍니다.

1)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라 하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당연히 충성하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충성하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의 일꾼이구나이런 뜻이죠.

정말 하나님의 구원의 그 비밀을 알고, 내가 그 엄청난 구원의 수혜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와 몸 된 교회를 위해 한결같이 충성합니다.

기분이나 환경에 동요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꾸준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위한 일이 어디 항상 즐겁기만 합니까?

쉬운 봉사는 없습니다.

때로 약점에도 불구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장점으로 봉사해야 더 효과적이고 결과도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약점이 있는 부분에서 봉사를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 결과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게 되기에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잘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일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본성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삼일교회에서 목회하는 송태0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성경으로 성도들을 바로 세우려고 무척 애를 쓰시는 분이신데 어느날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자기 자신을 보면 정말 이런 사역을 할 수 있는 재목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길을 가게 하셔서 그냥 순종하며 한다고 하시더군요.

설교도 잘하시고 여러 가지 면에서 목회자로 자격을 충분히 갖춘 분이신데, 그런 말을 하시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저는 목회가 아주 적성에 잘 맞아서 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적잖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학식에 있어서 구약성경에 능통한 대단한 신학자입니다.

바울은 율법학자가 되려고 당대의 지성인 가말리엘 랍비에게 사사 받았잖아요?

그런데 선교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선교사는 차원 높은 성경이야기, 깊이 있는 영적 이야기 다 하지 못합니다.

계속 돌아다니며 십자가 복음의 기본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2장에서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내가 1년 반 동안 여러분을 젖만 먹이고 미처 밥을 먹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계속 초보만 다지느라 심오하고 깊은 것들은 가르쳐보지도 못했다는 뜻이죠.

그랬더니 이 교인들이 자기 수준은 모르고 수군대길 설교하는 것이 시원찮다, 말이 어눌하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 자기가 잘하는 장기를 살려서 남을 놀래키는 게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내 수고와 손길이 필요한 일을 정해 충성되게 봉사하는 것이 진정한 일꾼입니다.

충성은 지금 하는 일의 주체가 누군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충성하는 주인이시기에 내 멋대로 시작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내가 동기가 된 봉사라면 좋을 땐 좀 해보다 누가 기분나쁘게 하면 시험에 들어 그만두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일꾼은 사람의 판단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3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바울사도 같은 사람도 판단을 받았다고 하네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사도를 판단했다는 것이죠.

고린도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하자면, 아볼로파에 들어간 사람들은 바울이 맘에 안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격적으로 대단한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목회하며 자신의 열정처럼 성도들이 믿음을 갖도록 좀 밀어부쳤을 수 있겠죠.

뭐 그렇게 까지 할 필요있냐 좀 천천히 하자는 사람들이 아볼로가 더 낫다고 뭉쳤을 것입니다.

또 아볼로도 싫다고 베드로파로 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학자거든요.

매일 성경공부하자고 했을테니 그것도 싫어 베드로파가 되었다는 것이죠.

고린도교인들을 바울과 아볼로가 가르쳤는데, 이 사도들을 교인들이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판과 판단이 객관적 지식보다 자기 주관적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다보면 그렇잖아요?

오해를 받기도 하고, 안 좋은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어 교회를 멀리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않으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자격도 없고 기준도 틀리면서 늘 남을 판단하고 선악을 밝히려드는 게 아무래도 선악과를 따 먹은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입맛이야말로 얼마나 제각각입니까?

열심히 반찬 만들어서 가져 왔는데 어느 한 사람은 왜 이렇게 짜?’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가족 간에도 왜 말다툼이 일어납니까?

내 방식과 다르다고 비난하기 때문이잖아요.

남이 내 방식과 꼭 똑같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 집에서도 밥 먹다 가끔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김치복음밥을 먹는 데 남편이 볶음밥에다 식탁에 있던 아카시아꿀을 넣으려고 하는거예요.

제가 아카시아꿀을 복음밥에 넣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강력하게 막아서 결국 남편은 아카시아꿀 복음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취향에 따라 복음밥에 꿀을 넣던 말던 뭐가 중요하다고 그걸 결국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죠.

그 이후 저희 집에서는 아카시아꿀이란 말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되는 금단의 열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취향과 기준이 다르기에 언제든 서로를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자기와 안 맞아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관계도 꼭 있습니다.

열 명이 모인 그룹이 있으면 그 중 두 명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통계도 있잖아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쓰다보면 항상 마음이 얹잖고 불쾌한 마음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노하우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설령 남에게 비판을 좀 받아도 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남의 판단 받는 것도 힘들지만 사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내가 한 행동과 말을 곱씹으며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하면서 괴로워 밤새 뒤척인 적이 다 있으시잖아요?

정말 잘못한 일이라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빨리 떠내려 보내야 합니다.

잘못에 집착하는 것도 다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잘못을 진실되게 고백하면 의외로 빨리 이런 실패감과 자책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만 의식하다 보면 절대 평안과 만족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행동한다면 불편할 것 같지만 사람 눈을 덜 의식하게 되고 훨씬 더 자유롭고 후회할 것이 적어집니다.

알면 알수록 하나님 앞이 제일 편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해서 말하고 행동하다보면 사람과의 관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편해집니다.

그런게 신앙 안에서 누리는 자유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양심으로 했다면 너무 남의 판단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바울사도의 노하우입니다.

또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의식하면 남을 쉽게 판단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피차 판단하기를 끝내라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지금은 채점을 매길 때가 아니라 충성할 때라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일꾼들은 일할 때 서로 다투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7절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죄입니다.

바울사도가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남보다 좀 낫다면 다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인데, 뭐가 그렇게 자기가 대단하다는 듯이 행동하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노력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믿음의 분량을 각각 다르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함에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봉사하지 않습니다.

바울사도가 어떻게 고린도교회에서 일꾼으로 섬겼는지는 오늘 본문 뒷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교인들이 지혜로운 척 할 때 어리석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존귀한 자리를 차지할 때 오히려 비천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고 모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 즉 참고, 비방을 받은 즉 권면했다고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이런 헌신으로 얻은 신앙의 자유와 각자의 명예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의 모습입니까?

지금은 바울시대처럼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런 박해와 고난이 있는 사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꾼은 여전히 존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박수 받고 영광 받는 게 아닙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수고했다 인정받고, 잘했다 칭찬만 받고,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이 사도인 자기를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자기가 영광스워지고, 사람들에게 특별대우 받고, 성공한 것을 일꾼의 증거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고 온갖 곤궁에 빠져있어도 일꾼의 짐을 벗어 던지지 않은 것이 자기가 예수님의 일꾼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순순히 십자가에 오르셨듯이 예수님의 일꾼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어린 양의 뒤를 따릅니다.

그리스도가 그러셨기에 그리스도의 일꾼의 모습도 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그 수고에 대해 주께서 오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음을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너희는 그런 나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헌신하지만 현재 자랑할 만한 성과가 없다 해도, 축복이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의 칭찬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도 조금 우리를 칭찬해 주시면 더 주님을 위해 더 충성할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힘든 문제로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면 더 행복하게 주님의 일꾼이 될 것 같잖아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칭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고 구하는 결과를 주셔야만 잘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협소한 분이 아니잖아요?

그걸 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더 좋은 결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번번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만 되기를 집착하며 산다면 항상 불안하고 평생 만족은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에 반드시 칭찬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매순간 충성되게 살아가면 인생에서 하나하나 밟아 나가야 할 단계들을 반드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원했던 것 이상의 놀라운 삶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런 혼인잔치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된 모두가 더 아름답고 견고한 믿음에 세워지도록 서로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이고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어디서건 하나님이 내게 시키시는 일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할 일을 찾아내고 충성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봉사하는 가운데 우리 믿음의 인격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우리가 한 몸이 되어 세워가는 우리교회도 주님의 큰 기쁨이 되리라 믿습니다.

 

2017년11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