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고린도후서12장7절-10절 (육체의 가시)

남수연 2019. 6. 3. 19:07

https://www.youtube.com/watch?v=LOhdtgi5LOU&feature=youtu.be

<2019년6월2일 설교영상>


사람들 사는 것을 보면 가시 없는 인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평탄하게 살았을 것 같은 사람도 나중에 보면 나도 가시밭길을 걸어왔다고 하잖아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제 평생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빼낼 수 없는 가시들을 끌어안고 살기에 인생은 고통스럽습니다.

세상에 고통의 가시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죄 때문입니다.

에덴엔 가시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뒤 하나님은 이젠 인간의 삶의 터전에 가시가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 정복해야 할 부족들을 남겨둡니다.

하나님은 이젠 남겨둔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옆구리에 가시가 될 거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미 가시가 예고 된 세상에서, 계속 불순종으로 죄를 더해가기에 삶이 가시밭이 되는 것이죠.

오늘도 심장을 콕콕 찔러대는 가시 하나를 품고 나오셨을지 모릅겠습니다.

오늘 바울사도에게 있었던 가시를 통해 우리를 괴롭히는 가시에 대해 잘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교훈을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1.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자신에게 가시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에게 육체에 가시가 있었다고 하죠.

그것은 사탄의 사자라고 할 만큼 그런 지독한 가시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가시는 원어의 뜻으로 볼 때 손끝에 박히는 그런 작은 가시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단어는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 땅에 박는 말뚝 같은 것을 말합니다.

육체에 말뚝이 박힌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바울의 가시가 그렇게 괴롭고 힘들게 하는 무언가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의 가시가 뭐였을지 연구해 다양한 추측을 내 놓았습니다.

대개는 육체의 질병일 거라고 말하죠.

서신서에서 바울이 육체적인 질병이 있던 것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중엔 누군가 편지를 대필해 줘야 할 정도로 심한 안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점점 보이지 않는 시력이 당연히 사역에 큰 방해가 되었겠죠.

그러나 그 정도를 견딜 수 없이 자신을 공격하는 사탄의 사자라고 하기엔 더 많은 육체적 고난을 당한 바울로 볼 때 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에게 성도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의 치명적인 간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여러 차례 태형을 당했고 돌에 맞아 거의 죽었던 적도 있었기에 그때 간질 같은 뇌질환이 생겼을거라는 추측이죠.

설교 도중 갑자기 발작이라도 일어났다면 얼마나 난감한 일입니까?
또 바울의 사역 중에 지독하게 대적하고 모함했던 사람들이 가시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를 쓰게 된 밑바탕에도 사실 그런 아픈 사정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전도해서 세우고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회를 돌보고 있을 때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에게 파송 받았다는 추천서를 들고 고린도교회를 찾아온 어떤 사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어디 12사도에 속하냐, 하다못해 사도들의 추천서라도 있었냐, 그러니 예수님의 일군이 아니다이렇게 바울을 모욕하고 교인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바울이 피땀으로 세운 고린도교회가 큰 위기에 놓인 것이죠.

고린도후서는 이런 상황에서 쓰여졌기에 이 배경을 잘 모르면 이해가 안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바울자신은 예수님이 뽑으신 사도이고 참사역자라는 걸 변론하는 중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칼빈은 바울의 가시를 바울이 갖고 있던 죄의 본성이라고 해석합니다.

인간 바울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죄성이 그를 괴롭혔다는 것이죠.

로마서에서 바울이 자기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는 사실에 비통해 하잖아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성공지향적이고 명예를 쫒던 사람입니다.

모든 걸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주님의 일에서도 그런 본성이 나오는 걸 봤을 때 얼마나 난감했겠어요?

백프로 순수하게 주님만을 생각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극단적으로, 바울에게 이성에 대한 어떤 약점이 있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성 바울에게 그런 취약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배제할 순 없겠죠.

자기에게 이성에 대한 약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결국 스스로 목회를 그만 둔 목사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사탄의 불화살 공격으로 인한 배교할 것 같은 두려움, 심지어 이미 천국을 보고 온 바울이 힘든 생을 빨리 마감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게 가시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능성은 다 있겠지만 바울은 그게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제가 바울이라고 해도 그게 외부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치부였다면 밝힐 수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이 굳이 밝히지 않은 가시였다면 우리도 그 정도 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가시들도 다 그런 종류입니다.

치료가 힘든 고질적인 질병이 육체의 가시인 분도 있잖아요?

털어 버리지 못하고 함께 가야 할 어떤 사람이 수시로 우리를 찔러 대는 가시이기도 합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인 문제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진로, 남에게 말 못할 부끄러운 가정사, 혼자만 알고 있는 성품의 결함.

사람들의 고통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가시가 자라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찔리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도 가시가 자라 나 자신을 찌르고 서로를 찔러대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는 게 다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가시를 성도들에게도 허락하신 것일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큼으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시와 교만이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죠.

본문 바로 앞에서 바울은 천국에 이끌려 갔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간혹 입신을 해서 천국을 가보았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검증 안 된 천국 이야기를 하고 다니죠.

바울의 천국 경험은 진짜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천국에 이끌려 간 사람이 있다고 넌지시 얘기하며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합니다.

바울이 육체의 상태로 천국을 다녀왔다는 게 짙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입신, 그런 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죠.

천국에서 지금은 말 할 수 없는 기가 막힌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끝내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여전히 교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얘기죠.

사람이 자만하는 게 그렇게 위험해서 그걸 막으시려고 빼낼 수 없는 큰 가시를 박아 놓으신다는 것이잖아요?

사람의 교만이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죄의 뿌리가 교만이잖아요?

바울이야 그렇다 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성도들은 대단한 계시를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가시를 주셔야만 할까요?

바울 같이 큰 계시를 받은 사람이나 평범하게 자기 인생정도만 꾸려가는 사람이나 인간의 본질엔 똑같은 정도의 교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만하지 않도록 가시를 주셨다는 말은 가시가 없다면 우리가 다 교만하고 의기양양하게 살다가 결국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특별히 사탄의 사자라고 합니다.

가시는 우리를 자만하지 않게 하는 게 틀림없지만 한편 사탄의 메신저라고 한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시는 분명 우리 안팎에 있는 고난과 약점입니다.

그러나 나쁜 것만 가시가 아닙니다.

내가 잃을까봐 애착하는 것, 저것을 꼭 잡아야겠다고 집착하는 것도 다 가시가 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이런 약점들에 대고 계속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걸 잃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주고, 자신감을 꺾는 생각을 주고, 충동을 불러 일으키고, 때로 우월감에 빠지게 하고, 세상 것으로 유혹하고.

결국 우리의 약점이 되는 안팎의 가시는 사탄의 공격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평생 잘 다루어야 합니다.

 

3. 바울사도는 이 가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다고 합니까?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이 가시를 빼내 주시길 아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안락한 둥지에 가시가 박히면 빼내려고 혼신을 다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먼저 이 가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 중 하나님과 무관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문제들은 먼저 하나님께 가져가 의논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 역시 선교사역에서 당하는 숱한 위기상황과 고통을 주는 가시에 대해 기도했고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하잖아요?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기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뒤 돌아 보면 힘든 시기마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점점이 이어져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 아닌가요?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듯 하나님은 가시가 파고드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제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제 어머니가 췌장암으로 저희 집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꼭 가고 싶어 하셨던 미국여행을 같이 갔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암 말기에 극도로 쇠약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열네시간의 긴 비행을 할 생각을 어떻게 했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행 시작하는 날 제 눈 안쪽에 있는 다래끼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제 눈 안쪽에 오래 전부터 속다래끼가 있어서 자주 터지고 아물고를 반복해 왔습니다.

항생제를 먹으면 나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재발하길 십년이 넘었습니다.

다래끼가 터지면 진물과 고름이 며칠을 흘러나오고 눈이 충혈 되서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하필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는 날 다래끼가 터진 거예요.

우선 비행기를 타자마자 승무원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빈 좌석을 한 개 더 얻어 어머니를 눕혀 드렸습니다.

그리고 누워계신 어머니를 살펴보며 흘러내리는 진물을 휴지로 연신 닦아 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그런 내 모습이 한편 측은하고 한편 참 사는 게 지질하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거예요.

암으로 죽어 가시는 어머니와의 미국여행도 사실 처량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형편을 봐주기는커녕 가차 없이 찾아온 성가신 눈병까지 괴롭히니 산다는 게 이렇게 너절하고 애처러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그냥 그런 마음에 하나님 앞에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딱 그 순간 저의 그 마음을 하나님이 읽고 계신 것 같은 그런 선명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도착했을 즈음에 거짓말 같이 고름이 멈췄고 그 여행을 아무 불편 없이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4년 동안 한번도 다래끼가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의 곤고한 형편을 얼마나 측은히 여기고 도와주려 하시는지 정말 확실히 믿습니다.

그렇기에 좀 처량하고 서글픈 일이 생겨도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애처로울 때 어느 부모가 손을 내밀지 않겠습니까?

이제 됐다’, 아니면 도와줘야지 않되겠다싶으면 하나님은 즉각 움직이십니다.

그렇기에 크고 작은 가시가 괴롭힐 때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고 가장 먼저 간절히 기도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그러나 가시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 우리 생각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사도가 원하는 것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건 바울사도가 듣고 싶은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하는 게 아니라 바울에게 더 필요한 것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가시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에 그냥 두십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고 언제 기도를 배웠습니까?

가시가 찌를 때였잖아요?

미워하는 사람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가시가 되어 아프게 하고, 환경이 가시같이 찔러대기에 너무 아파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죠.

말뚝 같은 가시가 괴롭히면 저절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때는 빨리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뜰 수도 없어요.

눈을 뜨면 마주 할 현실이 너무 겁나서 다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저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씨름하듯 기도할 수밖에요.

그게 생계형 크리스천입니다.

폼 나게 믿을 처지가 아닌 것이죠.

그렇게 다져진 믿음은 뜬구름 같은 신앙이 아니라 믿음이 삶 자체인 실용적인 신앙이 됩니다.

가시 가운데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진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없으면 기도가 짧아집니다.

기도가 짧으면 진지하게 하나님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에게도 나이에 맞는 작은 가시를 하나님은 주십니다.

자녀들이 힘들어 하고 가시가 빠지지 않는다고 짜증을 낼 때 내 자식의 영의 아버지께서 그 애들의 인생을 다루고 계신다고 믿고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나보다 자식들이 잘되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능력을 갖추고 나보다 나은 지위를 얻고 더 많은 걸 누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자만하지 않도록 인격을 다뤄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만 잘 나가는 삶이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시기하는 사람, 잡아 끌어 내리려는 사람, 경쟁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성공한 인생에도 소모적이고 고통스러운 수많은 일들이 달라 붙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시를 품고 하나님께 배운 자식들은 세상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실 때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가시로 인해 무조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가시가 찌르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 부족함 없이 족할 만큼 우리에게 부어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게 부족한 부분만 보지 마십시오.

오히려 우리가 가시로 인해 자만하는 마음이 약해졌을 때 예수님의 능력이 사방팔방으로 역사하십니다.

모든 것에 능통한 실력과 재능이 있다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할 때 그걸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능을 주신 하나님은 생각지 않고 자기 힘으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재주와 능력으로 하는 일로는 사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명분은 하나님 뜻이라고 해도 결국 자기 뜻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차라리 약점이 있고 부족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조심스럽게 인도를 따르는 사람과 일하시는 게 더 낫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만땅인 사람하고는 어떻게 일하시는지 아십니까?
그에게 아주 작은 기회만을 주십니다.

복음성가 가수를 대표하는 박종호씨가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자신은 능력이 이백프로인데 하나님은 백프로 밖에 못 쓰게 하신다는 거예요.

자기 능력과 재능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늘 길을 막으신다고 합니다.

모든 걸 갖췄다고 해도 그걸 다 발휘할 수 있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자기 능력으로 성공하는 걸 막으시는 게 은혜입니다.

그것이 능력 있는 성도들이 자만해서 크게 넘어지지 않도록, 데리고 길게 일하시는 비법입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드디어 이렇게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9,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능력이 약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걸 터득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머물다는 말은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세워진 뒤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진영 중에 머물렀을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약해야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위에 장막을 치고 머물러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빼고 기독교를 논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이룬 업적은 평가가 불가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바울은 자기의 약함, 자기에게 주신 가시를 통해서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떤 약함이나 결핍이나 가시도 우리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복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진 않지만 예수님 안에 있다면 오히려 약한 게 더 좋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춰볼 때 내게 아무런 가시도 없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닙니까?
인생에 가시가 없는 사람하고 어울려봤자 배우는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성경 전권을 주해하고 주석책을 쓰신 분 중에 이상0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주석을 쓰려면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에 능통해야 할 뿐 아니라 성경과 교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목사님이 어릴 때 발을 다쳐 긴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걷기만 해도 뒷꿈치가 쑤셔 고통스럽다보니 집안에서만 지내며 성경을 외우다시피 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불편한 발로 유학까지 다녀와 성경주석을 쓰는 큰 일을 해냅니다.

목사님이 60이 넘어 자녀들 권유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뒷꿈치에 날카로운 철사가 깊이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철사가 가시가 되어 60년을 나를 찔렀지만 이것 때문에 성경학자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도다

 

말씀을 마칩니다.

가시가 자라는 환경과 내 안에서 가시가 자라는 것에 늘 경계해야 합니다.

내 환경 가운데서도 가시가 되기 쉬운 취약한 부분이 있고, 내 성질 가운데서도 가시로 자랄 부분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잖아요?

이런 가시들이 튀어나와 나와 이웃에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되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며 다루고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삶의 터전과 우리 마음이 가시로 뒤덮이게 됩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고, 모두 다 내게 상처를 주지?

그렇게 되는 것이죠.

가시가 무성해지면 절대로 좋은 것들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10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영적으로 가장 약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내가 약하기에 기도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그리스도만큼 강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강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강점을 자랑하지 않고 약함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하고 완전하신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고 고통의 가시를 품고도 기뻐하며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삶의 가시들을 기도로 이기고 각자에게 주신 복된 사명을 이루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9년6월2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