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해야 성도들의 믿음을 잘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좋아지면 교회 조직에 충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신부에게 신랑을 만나게 해주는 기쁨이라고 표현했죠.
또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들고 우리를 지치게 합니까?
믿음이 굳세면 이런 세상의 비바람도 견딜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의 대부분은 내 죄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힘으로 죄의 본성을 잘 다룰 수 있게 되면 좀 더 평안 중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 때문에 성도들은 믿음에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사도의 편지를 보면 그가 염려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 앞에 서는 날 아무 공적과 칭찬을 받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구원받을까봐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모를까 아무런 공적 없이 받는 민망한 구원은 바울도, 예수님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뿐 아니라 꼭 상도 주고 싶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식들이 삶에서 좀 가치 있고 좋은 공적도 남길 것을 바라지 그냥 돈이나 벌어 펑펑 쓰며 살 길 바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도 그런 사람은 개념 없다고 비꼽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도 보배롭고 하나님 앞에서도 불타 없어지지 않는 공적이 될 신앙의 삶을 살기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여러 면에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의 사역과 교회 공동체의 믿음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특히 성도 개인의 신앙측면에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을 지도하는 바울사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잘 지도받고 따르는 복된 시간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서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좀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전도여행 중에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고린도는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중심 도시였고 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교회에서 1년 반 정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제조업으로 돈을 벌면서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새신자로 구성 된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선 2년마다 열리는 이스미안경기 탓에 천막사업이 호황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가장 큰 스포츠축제는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이었습니다.
제우스신에게 바쳤던 제전이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며 우상숭배의 일환이라 금지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다시 시작된 것이 오늘날의 올림픽입니다.
이번에 평창올림픽 성화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채화되는 모습을 뉴스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헤라여신의 여사제가 불을 붙여 들고 제우스신에게 그 불을 평창까지 잘 날라다 주길 기원하더군요.
수천 년 전 그리스 신들 앞에서 펼쳐졌던 축제가 망령처럼 되살아난 것 같아 좀 기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올림픽 다음 큰 제전이 바로 아테네 인근에 있는 도시인 고린도에서 열린 이스미안 경기였습니다.
포세이돈이라는 바다의 신에게 바쳐진 경기입니다.
이 경기가 있을 때마다 몰려온 인파로 인해 천막수요가 항상 많았기에 바울이 천막을 만들어 목회비를 감당했던 것이죠.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고린도교회가 만연한 우상숭배와 세속적 토양 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던 것이죠.
우리나라도 불교와 유교와 무속신앙의 토양 때문에 기독교신앙이 성경에서 벗어나 많이 변질되어 있습니다.
개인으로 볼 때도 기독교 집안이 아닌데서 신앙생활을 시작 할 때 이런 면에서 처음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의 악조건 때문에 바울이 1년 반이나 머물며 성도들의 믿음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 사역을 마치고 선교활동을 하던 중 교회가 큰 시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특히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성도들 간의 파벌 싸움이었습니다.
여기에 음행의 문제, 사기사건으로 인한 고소문제, 예배와 성만찬의 변질, 지나친 은사열광주의 등 아주 많은 문제를 바울이 하나하나 이 편지에서 책망합니다.
교회가 다시 고린도화 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날 교회의 세속화와 같은 것입니다.
본문은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제인 분쟁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바울파와 바울의 후임자인 아볼로파와 베드로파, 그도 아니면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교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교회의 목회자가 바뀐 뒤 전임목사파와 후임목사파로 갈라지고, 어느 교회는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뉘어 분란이 일어납니다.
또 교회 안에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끼리 뭉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이권사파, 김권사파, 이런 분파가 생깁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이렇게 당을 짓는 것을 죄의 본성으로 지적합니다.
본문을 통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려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그런 신앙생활은 하나마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열성적인 신앙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싸움도 하는 것이지 아예 관심이 없다면 싸움에 끼지도 않겠죠.
그런데 열성만 갖는다고 다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본문에서 집짓는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같은 터 위에 집을 세웠다 해도 무슨 재료로 세웠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죠.
결국 이 땅에서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았냐에 따라 천국에서 보상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에서 받을 상급에 차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도 차별이 있으면 무슨 천국이냐며 반발합니다.
차별이 아니라 자녀들의 수고에 대한 아버지의 타당한 대우이고 칭찬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한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칭찬과 보상을 받도록 신경 쓰며 살아야 합니다.
가끔 보면 나는 천국의 큰 상급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굉장히 욕심이 없고 겸손해 보이지만 그것은 천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욕심도 없고 바라는 게 없다면서 어째서 이 땅의 재물에는 그렇게 관심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헌금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들이 천국통장에 꼬박꼬박 기록되는 것을 눈으로 본다면 아마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너희가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말씀했잖아요?
우리가 받을 상급은 천국에서 얼마나 더 영화를 누리느냐에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우리 수고와 고생을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큰 기쁨과 영원한 만족에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 날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풍족한 상을 받도록 달려가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불타지 않을 공적의 신앙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우선 터가 올바로 되어야 합니다.
10절과 11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터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터를 잘못 닦으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만일 예수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웠다면 설령 잘못 공적을 쌓은 사람일지라도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은 최소한의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최소한의 구원을 받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은 믿음의 터를 바르게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터는 어떻게 닦게 되는지 10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았다고 합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성도들의 마음에 이 터를 닦는 데 두 가지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우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지혜로운 건축자만이 가진 재료와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의 구원에 있어서 가장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역사하셔야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해서 여기 있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느니라.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나와 속죄를 받아야 하는 데, 그것이 하나님아버지께서 이끌고 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간혹 어떤 절대자 신의 존재를 스스로 찾을지 모르지만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사람만 예수님 앞에 나오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믿음의 터를 닦기 위한 건축자의 올바른 재료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모든 지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 나와 무슨 관련인지,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은 무엇인지.
이런 영적 지식이 올바른 터전을 닦는 요소입니다.
바울사도는 앞 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현란한 설교나 세상지식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충실하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일년 반 동안 얼마나 이것들을 잘 가르쳤는지 고린도교인들이 이 터 위에 세워진 것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편지 서두에 너희가 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알고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지식들을 풍족히 알아야 합니다.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지난 한주간 성경을 펴지도 못한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일주일이란 긴 시간에 하나님이 내게 뭘 하라고 하시는지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 한번도 펼쳐보지 않는 것은 분명히 문제적 신앙입니다.
또 구원의 터를 닦을 재료가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믿음이 생기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성령께서는 믿음을 주실 때 반드시 복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믿으려면 뭔가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직 믿음이 불분명한 분들은 대개 구원의 지식과 원리 자체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제가 누차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한두 번 듣고 믿음이 생길 것 같으면 바울이 그 바쁜 선교일정 중에 뭐하러 1년 반 씩이나 가르쳤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 터전이 없다면 그나마 불 가운데서 받는 것 같이 가까스로 받는 최소한의 구원의 복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좀 더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휴대폰에 성경 앱을 깔아 수시로 들여다보고, 내 생명과 관련 된 이 믿음의 지식에 대해 어떻게든 더 관심을 기울이시길 간절히 권고드립니다.
2. 다음은 그 터전 위에 어떤 재료로 공적있는 신앙을 세우느냐의 문제입니다.
12절입니다.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과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터 위에 성도들이 믿음의 인생을 세운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 똑같은 재료를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금, 은, 보석은 단단하고 값비싼 재료이고 나무, 풀, 짚은 불에 타는 약하고 값싼 재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성들여 지은 집은 그 자재부터 다르죠.
자기가 살 집을 지으려면 값이 비싸더라도 튼튼하고 오래가는 재료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리모델링이라도 할라치면 예상한 것 보다 점점 경비가 더 발생하게 되지 않습니까?
과거 집장사들이 지어 파는 집은 겉은 번지르한데 보면 다 싸구려 자재들입니다.
안 보이는 속은 더 심각하죠.
철근이 적게 들어가고, 불량 콘크리트, 심지어 전선도 함량미달의 제품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귀한 재료로 정성껏 세워가지만 누군가는 겉만 그럴듯하지 신앙의 질은 과히 좋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다들 나름 믿음의 공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가치가 완전하게 드러날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그 날’입니다.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그 날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는 심판의 날이고 불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심판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판단 앞에 아름다운 공적이 그대로 남는 사람이 있고, 홀랑 타버리는 공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터가 옳다면 구원은 받게 되지만 불난 자리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것 같은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산불이 한 달째 타고 있다고 합니다.
한때 이재민이 십만 명이나 발생했었죠.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집이 전소되는 가운데 겨우 몸만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습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겨우 구원만 받은 것이 이런 것이겠죠.
바울이 차마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은 그날 부끄럽고, 민망해서 낭패를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들로 우리 신앙의 집을 세우라는 것일까요?
1)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은 교인들의 시기와 분쟁 문제입니다.
우선적으로 이런 신앙생활은 해봤자 불타 없어질 공적이라는 것이죠.
사람들이 다 연약한 죄인들이라 다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런 중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에게도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다투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모적이고 불행합니까?
교회생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험담하고 끼리끼리 사귀고 남을 시기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뜨겁게 사랑하지는 못할지언정 남을 탓하고 미워하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에서도 우리가 체크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구별해서 예배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은 분명히 공로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단 하나님 앞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이 순간 기쁘게 예배를 받으시고 장차 공로로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분명히 하늘에 쌓아두는 공적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러 올 때 노골적으로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돈을 좋아하시고, 돈이 필요해서 그랬을까요?
잘 사는 부모들도 자식이 항상 손만 벌리고 돈만 가져가는 것을 씁쓸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들은 사랑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계속 주고 싶잖아요, 사랑하기 때문에.
철 안 드는 자식들은 평생 부모에게 드릴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철든 자식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가져오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또 성도들이 어떻게 벌어서 가져온 것인지 아시기에 그 돈을 이 땅의 하나님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다른 아무 돈이나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게 아닙니다.
3)우리가 개인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경건에 힘쓰는 것 또한 우리의 공적입니다.
하고 싶은 세상 일, 해야 할 세상 일, 그 다음 신앙의 성숙을 위한 시간을 갖겠다면 하늘에 공적을 쌓아 둘 시간은 결코 남지 않을 것입니다.
4)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봉사는 하늘에 남을 공적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 면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봉사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고린도교인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벌어가며 교인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성도들을 가르칠 때는 권위가 아닌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쳤다고 합니다.
대접받고 존경받을 생각보다 겸손하게 본을 보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영원한 복과 영광이 될지를 알았기에 그렇게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만일 이 땅의 생이 전부라면 자기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그런 것입니다.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확고한 자신감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먹고 사는 일이 급하니 우선 이 땅의 집을 세우는 일이 중할까요?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두 집을 세우는 게 아니라 한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재료로 짓는 집은 영원히 아름다운 공적으로 남고 세속적인 재료로 짓는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또 영원한 집을 영구한 재료로 지으면 이 땅의 삶도 그 안에 더 복되고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께서 빈번히 말씀하셨고 성경 모든 부분에서 가르치는 대로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지 않고 천국에 쌓아두는 것을 소홀히 여길까요?
그만큼 천국의 삶이 실감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눈에 보여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누누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전에 TV에서 대박난 장어구이집을 소개하는 것을 언뜻 본 적이 있습니다.
대박집 사장님이 삼십년 직장생활을 하다 퇴직하고 이것저것 하다 다 망해먹었나 봅니다.
그러다 장어구이집에 사람이 가득 앉은 것을 보고 거기에 마음이 확 꽂혔다고 합니다.
난생 처음 장어요리를 배우려니 무급으로 허드렛일을 해가며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 가게를 계약하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창피하게 왠 장어집이냐며 하기만 하면 바로 이혼하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계약을 취소하겠다 하고 혼자서 몰래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그 가게가 대박이 나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아내가 기자에게 하는 말이 처음부터 남편 말을 믿어주고 같이 도와주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남편 보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남편이 벌어들인 돈으로 풍족함을 누릴 때 왠지 떳떳하지 않은 것이죠.
뭐 적절한 예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이 땅의 삶에 치중하고 예수님이 경고하신 천국의 삶을 위해 동조하고 노력하지 않은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 날에 가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분명히 맞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위에 구원받을 믿음의 터전을 공고히 다졌는지 오늘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확신이 부족하다면 가장 급한 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해 풍성한 지식을 갖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그것이 준비되기 전까지는 성경의 복된 가르치심을 따라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시다면 과연 어떤 신앙의 질과 재료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소견이 아닌 성경 말씀대로,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길을 따라 살아간다면 반드시 그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공적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2017년10월2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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