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들 잘 보내셨나요?
차례지내는 문제로 좀 불편한 추석을 보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선 불문율이었던 제사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조상 섬기느라 명절휴가에 쉬지도 못하고 여행도 못 간다는 것이죠.
정작 조상 덕 본 사람들은 제사지내고 있는 게 아니라 다 비행기 타고 있다고 꼬집는 기사가 나온 걸 보았습니다.
이미 조상 잘 둔 덕에 유산도 물려받고, 명절에도 당당하게 비행기타고 여행 다니는 거 아니냐는 것이죠.
조상 모신다고 뼈 빠지게 고생하는 사람들 언제 복 받아 비행기타고 명절에 휴가 가겠냐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명절마다 신경이 쓰이는 제사나 성묘는 조상신을 섬기는 유교적 전통입니다.
유교에선 사람이 죽으면 신으로 격상시키잖습니까?
그래서 지방을 쓸 때 ‘신위’ 즉 ‘신령님’이라고 적는 것입니다.
제사를 안 지내면 신에서 불쌍한 귀신으로 강등된다는 이상한 교령 때문에 후손들은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죽어라 제사를 지내게 된 것입니다.
잘 모시면 조상신이 복을 주고 못 모시면 귀신이 되어 해를 입힐 거라는 생각 때문이죠.
그들 말대로라도 이렇게 구천을 떠돌게 말고 살아계실 때 잘 모셔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게 진정한 효도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에겐 이런 명절 제사가 큰 곤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은 안 했다 해도 물려 낸 차례음식으로 다 같이 밥을 먹을 때도 난처합니다.
제사상에서 나온 음식을 먹어야 할까요, 먹지 말아야 할까요?
신앙도 지키고 모처럼 모인 가족들 분위기도 깨지 않는 속 시원한 답이 없을까요?
이 문제와 꼭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문제가 고린도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였습니다.
당시 신전 중심의 로마문화에서 모든 행사와 모임은 대부분 신전에서 이뤄졌습니다.
시장에 유통되는 대다수의 고기는 이때 제사를 드리고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사제들의 몫으로 돌아간 많은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죠.
신전을 거쳐 나온 고기를 먹어도 되냐 말아야 되냐가 우리 제사음식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문제를 바울사도에게 묻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이런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기록해서 보낸 것이 고린도전후서입니다.
우리 실생활에서도 이런 궁금한 문제들이 많잖아요?
술 문제도 그렇고, 사찰음식이나 고사떡 같은 것을 먹어도 되는지, 혼례문화는 그대로 따라도 되는지, 신앙촌 물건을 써도 되는지 등등.
바울이 답변한 원칙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실생활에서 마주치는 이런 문제들에 대처할 기준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단순히 옳다, 그르다를 넘어서 이런 문제가 생긴 근본원인을 따지는 바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교회생활에도 귀한 교훈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사도의 입장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신전에서 나온 고기 문제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입장이 갈렸습니다.
일부 성도들은 ‘우상이 별거냐, 음식은 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이다’ 라는 믿음으로 자유롭게 고기를 사다 먹었습니다.
그러나 신전을 거쳐 나온 고기는 귀신과 관계되니 먹으면 안된다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 순수한 고기를 구별할 수 없다며 아예 채식만 했습니다.
정답이 없으면 각자 자기 생각대로 하면 좋은데 사람이 그렇지 않잖아요?
꼭 자기가 더 옳다고 주장하다 결국 감정적 문제로 비약되죠.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육식파, 채식파로 갈라져 분란이 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사도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주고 있습니까?
4절 말씀에서 알 수 있죠.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신전 고기를 먹는 문제는 자유롭게 하라는 쪽에 손을 들어 줍니다.
로마신전에 있던 제우스 신상 같은 각종 우상들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지어낸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조각해 놓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그렇게 열렬히 섬겼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신은커녕 아무 것도 아닙니다.
5절에 보면 하늘에나 땅에나 각처에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죠.
신은 오직 만물의 근원자이고 창조자이신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뿐이십니다.
6절에 보면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을 동일하게 만물의 근원으로 말씀하죠.제우스신도, 알라신도, 조상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신들이 벌을 내릴까봐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음식에 무슨 마력을 부리지도 못한다는 것이죠.
설령 제우스신상 앞에 제사했던 고기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니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상에서 물린 생선과 나물에 무슨 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이 물어 온 질문은 이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나가 아예 신전에서 벌어진 축제에 가서 제사의식에 참여하고 거기서 함께 만찬에 참여해도 좋으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10장에서 다루는데요, 바울사도의 답변은 그것은 안된다입니다.
거기서는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게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우상 자체는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종교들의 배후에는 타락한 피조물인 마귀와 귀신들이 실제로 관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조상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조상을 신으로 섬기고 음식과 술을 나누며 귀신의 음복을 받는 제사행위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귀신을 가까이 해서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10장에 보면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아직 집안의 어른들이 제사를 중시하는 가정에서는 이 문제에 원칙을 갖고 믿음과 지혜로 잘 대처해 가시길 바랍니다.
2. 그런데 바울사도의 답변은 단순히 이것으로 끝나질 않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분란이 생긴 근본 원인이 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분명히 지적합니다.
1절 우상에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문제는 고기를 자유롭게 먹는 사람들의 교만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우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먹어도 된다 쪽 성도들이 더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안 먹는 사람들이 더 믿음이 좋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고 우상은 헛것임을 오래 배운 신자들은 신전고기래도 별 신경 쓰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런데 새신자들은 신전제사에 참가해서 즐기던 관습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고기를 먹으면 왠지 다시 우상을 받드는 게 아니냐는 양심의 부담을 느낀 것이죠.
성도들 중에는 미신적인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이 딸을 결혼시킬 준비를 하시는 데, 집을 구하러 다니다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집도 맘에 들고 예산에도 딱 맞고 직장도 가까워서 계약을 했으면 좋겠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집 문 앞에 부적이 붙어있다는 거예요.
부적 붙은 집인데 계약을 해도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괜찮다고 했죠, 정 꺼림직 하면 가서 기도 많이 하시라고 했습니다.
부적 때문에 불안한 게 믿음이 강한 것입니까, 부적이 별거 아니라고 믿는게 믿음이 강한 것입니까?
아마 나중에 저보고 와서 부적 좀 떼어 달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린도교회 문제양상이 그런 것입니다.
이 믿음에 자부심이 있는 고기파 교인들이 채식파 교인들을 보고 믿음의 지식도 없는 약한 자들이라고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갈등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고기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해줘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이 우열을 가리는 교만한 믿음 때문에 다시 교회가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싸울 거라는 것이죠.
지금도 교회들 안에 있는 고질적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든 가정에서든 사람사이에서 오는 갈등의 시초는 거의 같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제일이라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쪽은 어떻게든 보복합니다.
관계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다른 기질과 성품을 주셨잖아요.
거기다 자라고 교육받은 환경과 신앙생활의 배경도 다릅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맘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고 정죄하고 비판하면 안된다고 성경은 여기저기서 계속 가르치십니다.
고린도교회와 똑같은 문제를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도 상세히 다룹니다.
로마교회에도 신전고기 문제로 인한 똑같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종교로 볼 때 어느 도시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인 것이죠.
거기서도 고기 먹는 사람들이 교만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14장에서 이들에 대해서 엄격히 말씀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믿음이 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성도의 믿음은 단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문제일 뿐이지 누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약해도 그 사람을 세우시는 권능은 예수님께 있지 가르치려 드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믿음이 세워지지 않잖아요?
사람이 다 자존심이 있어서 틀렸다고 고치려들면 더 뻣뻣해 집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끊임없이 설득하시지 단숨에 꺾지 않으시잖아요?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욥 같은 시련 한 번만 주시면 기가 팍 죽어서 매달릴 테지만 그러시지 않잖아요, 그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바울사도가 본문에서 예리하게 지적하는 게 무엇입니까?
교만한 신앙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성숙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지식은 머리로 이해되는 차원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아져야 합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유일하신 참 신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면 뭐합니까?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체험적 신앙이 영적지식인 것이죠.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목숨을 주시고 구원한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당연히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약한 자를 비판하는 자들은 하나님도, 교회도, 하나님나라의 기초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성도들 하나하나를 공들여 키우시고 주님의 교회에 모든 영광스러움을 쏟아 부으시는지 그들은 모르는 것이죠.
그걸 알면 반드시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모르면 교회를 세우기보다 고린도교회의 고기 먹는 신자들처럼 남에게 시험이 되고 오히려 교회를 분열시키고 허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성도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에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온갖 영적 육적 축복을 알지도 못하고 맛볼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결속 된 연합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형제 자매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많다보면 재능도 다르고 부모가 똑같이 뒷받침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력 높은 자식이 제대로 못 배운 형제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은 필시 부모에 대한 존경심도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성장했고 아직 어린 동생이 있다면 당연히 부모의 노고를 생각해서 업어 키워야 하는 것이죠.
다둥이 부모들 얘기를 들어보면 셋째부터 힘이 덜 든다고 하더군요.
큰 아이가 알아서 작은 아이를 돌봐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때 다섯명 넘는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부모마음을 아는 철든 큰자식은 자기가 마땅히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15장1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제가 지난 주 올림픽공원에 나갔더니 추석이라고 가족끼리 공원을 찾아 상당히 북적거렸습니다.
유모차에 아기를 앉히고 산책을 나온 한 가족을 보니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뒷전이고 다 아기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아기가 울어대자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부모가 다 같이 어쩔 줄을 모르고 애를 어르기 시작하더군요.
하나님의 어린 자식들이 울지 않게 큰 자식들이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성도들의 태도라는 것이죠.
이렇게 서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십니다.
어린 자식이 울면 부모가 얼르고 달래지만 큰 자식이 울면 부모 마음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숙한 큰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 그냥 ‘아버지’ 그렇게만 말해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얼른 들어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깊은 성도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인정하고 대우해 주신다는 것을 깊이 새기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3. 그렇기에 아무리 자유가 있어도 그렇게 교회공동체의 차원에서 고기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연약한 성도들의 믿음을 고려하라는 것이죠.
7절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 지고 더러워졌느니라.
우상에 대해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걸 보고 양심이 약한 사람이 용기를 얻어서 ‘에라’ 하고 고기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면 자식들도 거짓말 하는 데 용감해 집니다.
믿음은 있지만 아직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양심에 꺼려지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받아야 할 연단을 포기하고 남이 하는 대로 타협하고 주저앉는다는 것이죠.
그 결과는 신앙양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양심이 더 미약해지고 오염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것은 우리는 범사에 신앙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음식을 먹으면서 왠지 신앙양심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회식자리에서 맥주 한잔 마시는 게 신앙양심에 걸리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담대한 지식이 생겨 자유롭게 되면 마셔도 됩니다.
죄가 아닌 것은 각자의 신앙의 정도와 상황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것이죠.
로마서14장23절에서도 양심에 걸리는 건 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내 믿음에 떳떳하지 않으면 죄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의 양심을 진리에 일치될 만큼 복원시켜 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옳다 나쁘다하는 기준이 그대로 성도의 양심의 기준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양심은 하나님의 기준과는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져 있잖아요?
양심을 통해 지도하시는 성령님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 믿음은 점점 더 약해지고 더디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유로운 사람이 약한 자의 믿음에 혼란을 줘서 넘어지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13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그 형제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먹고 싶어도 고기를 안 먹겠다는 것이죠.
술을 먹어도 양심에 걸리지 않는 신앙이라고 해도 연약한 성도들과 교회에 덕이 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곧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다보면 우리 자신의 믿음과 인격이 굳세고 아름답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성경의 원리와 신앙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세우신 교회공동체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십니다.
그 마음의 소원을 속히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항상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교만이 교회와 가정과 사회생활 속에서 악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부적을 떼지 못하고, 미신적인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이 부족해 신앙양심이 연약한 믿음은 계속 예수님을 의지하며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책임은 각자에게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각자가 지불해야 합니다.
시간을 들여 말씀과 기도 생활을 배우고 이전의 삶에서 점점 악을 벗어 던지며 의지를 다해 예수님을 따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악의 세력에 밀리지 않는 성도의 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삶과 주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10월8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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