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더군요.
젊어서는 애인이 주는 장미가시에 찔리고, 결혼하고서는 국수말아 달라는 남편을 위해 멸치 다듬다 멸치가시에 찔린다.
이래저래 가시에 찔리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먹고사는 데만 가시가 있는 게 아니라 사랑에도 가시가 있습니다.
사랑도 가시가 되어 찌르고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아프니까 사랑이다란 말로 자신을 위로하는 거겠죠.
목의 가시같이 계속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문제들이 지금도 뽑히지 않고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수잔 렌즈키즈의 책 제목처럼 ‘가시에 묻은 꿀을 핥아 먹는 것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가시에 찔리는 삶을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은 바울사도에게 있었던 가시에 대해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이 길지 않아 무엇을 말씀하는 지 의도를 파악하셨을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기에게 있는 큰 육체의 가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응답은 육체의 가시가 유익한 것이니 족하게 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기쁘게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약한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성도들과 우리들에게 가시의 비밀을 깨닫고 바울처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과히 마음에 들지 않는 본문이죠?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이런 종류의 가시들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
우리가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들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가 기뻐한다면 나의 강한 것과 성공과 부와 타인의 인정과 평안한 삶.
이런 걸 기뻐하고, 이런 것을 자랑하겠죠.
누가 바울처럼 이런 가시들을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하겠습니까?
물론 세상 사람들도 고생과 고난이 사람을 단련하고 성숙시킨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때 가수 구창모씨가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란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래도 성숙해지기 위해 고생하고 사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보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누구나 기왕이면 잘되는 게 좋고,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바울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말씀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겐 전혀 공감할 수 이야기입니다.
이생이 모든 것인 사람에게 이런 성경말씀은 전혀 이해되지도 않고 공감도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은 현세적인 복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성경을 현세적인 복에 맞춰 설교하면 그래서 억지스럽고 어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기록해주신 목적은 첫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로 추악한 우리 인격을 예수님을 본받아 거룩하게 성화되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세를 준비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그 깊은 은혜를 맛보려면 일단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생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과 천국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과의 공통점은 사실 한개도 없습니다.
현재 나의 심령이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는 지 먼저 점검해보고 진지하게 말씀을 듣게 되길 원합니다.
바울사도가 어떤 경험을 통해 자기에게 있는 가시가 정말 귀중하고 가치있는 유익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시가 아니라 때로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이 위로와 능력이 되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1. 바울사도에게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생애를 알면 알수록 어떻게 그런 고생을 하며 평생을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께 헌신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도 사람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바울사도가 자기가 당한 고난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우리가 남에게 매를 맞는다는 것,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다 이렇게 매를 맞고 돌팔매질을 당할 때 인간으로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까?
이런 말씀을 읽으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고 말하기도 좀 부끄럽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는 극적인 경험을 통해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과 실제로 대화를 나눈 놀라운 체험을 하고난 뒤로 바울사도는 이 땅의 자랑거리가 장차는 다 배설물처럼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건, 기도나 체험을 통해서건, 영원한 내세를 실제적으로 맛본 사람은 현세에 대한 집착이 덜 합니다.
대신 영원히 거주할 천국과 그 곳에서 영원히 섬길 하나님에 대해 관심의 초점이 이동합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은 절대로 이 땅에서 움켜쥔 것들을 손에서 놓치 못합니다.
바울사도는 진짜 중요한 게 무언지를 발견하고 모든 자랑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육체의 가시까지 육체의 가시까지 더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잘 믿고 말씀대로 따르면 복받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솔직히 신약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에도 항상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따라 진실되게 하나님을 섬길 때이고 그 축복은 사실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복을 상징적으로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라도 이 땅에서는 육체의 가시인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이것은 죄가 가득한 인간세상에서 누구든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단단히 각오하고 매일 삶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여기서 밝히지 않습니다만 당시 교회 성도들에게는 말 안해도 알만한 질병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전승을 근거로 추측하기는 간질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돌에 맞아 거의 죽었던 일도 있었던 바울사도가 그런 많은 구타로 뇌를 다쳐 휴유증으로 간질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죠.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면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를 대강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의 가시가 성도들 보기에도 시험이 될 정도였다는 것이고 바울을 업신여길 만큼 좋지 않은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왠만한 병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이 육체의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학자들의 추측대로 이 육체의 가시가 간질이라면 전도와 설교 도중 순식간에 발작을 일으키게 되니 얼마나 당혹스런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이렇게 황당한 삶의 가시가 불쑥 튀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남들 앞에 수치와 창피를 당하고 내 힘으로 안되는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앞날처럼 우리를 쉴새 없이 은근히 찌르는 가시 돋힌 나날을 한동안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울사도가 이 육체의 가시를 어떻게 대처했나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 바울사도는 이 문제를 처음부터 그냥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 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상의 곤궁, 현세적인 십자가를 제거하는 가능성을 기대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절망의 한 형태이다. 그는 육체의 가시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깊이 박혀있다고 확고히 믿고 영원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시에 대해 분개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가시로 인해 전 인생에 대하여 분개한다.‘
우리에게 어떤 육체의 가시가 있을 때,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나 팔자소관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바울의 기도에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 삶에 고난과 가시가 찌르고 괴롭힐 때 바울사도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 가시가 제거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만큼 기도해야 하냐하면 바울처럼 적어도 세 번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 번이라는 숫자는 꼭 세 번 기도했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세 번 기도했다는 것으로 기도할 만큼 최대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가 생기고 깊이 박힌 육체와 환경의 가시가 있을 때 그렇게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 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바울에게 하셨던 대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괜한 지레짐작으로 우리 삶에 닥친 풍랑과 육체의 질병 같은 것들을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탄의 사자가 우리를 시험하고 넘어뜨리려는 시련이 삶에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 순간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피할 길을 간구하고 응답을 기대한 사람과,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결국 가시로 인해 분개하고 자기의 모든 인생 전체에 대해 분개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아 내거나 그 문제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설령 그 문제를 지고 간다 해도 푸념이나 체념이 아니라 바울사도의 삶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가시를 하나님께서 다 빼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를 다루며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갖고 살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의 곁에 죽을 때 까지 의사였던 누가를 붙여주셨다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를 더 곁들인다면 바울의 신앙과 복음의 핵심을 곁에서 늘 배우고 깨달은 누가를 통해 신약성경 두 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다는 것은 사도들이나 사도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 우리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비싼 양피지를 구입해 철필로 긁어 쓰는 힘든 작업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사도의 곁을 평생 지킨 지식인 누가가 아니면 이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복음은 신약에서 가장 긴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의 분량도 만만치 않습니다.
두 권의 성경이 우리에게 없었다면 얼마나 아까운 일입니까?
바울사도의 육체의 가시가 결코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런 역사가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우리를 죽게 하고 망하게 하시지 않으심을 믿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가시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분명히 육체의 가시가 주어진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7절 말씀대로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같이 예수님께 헌신된 사람도 분명히 자신의 업적을 보고 자만할거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천국에 올라가 아무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바울입니다.
요즘 흔해 빠진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이비체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계시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적 체험들이 바울을 자만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과 잘난 척은 크던 작던 스스로 통제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 같은 신앙도 자기 자만심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에 육체에 가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약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자만심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무슨 자랑할 게 있어서 자만하고 교만하겠냐 생각할지 모릅니다.
남이 보기에 잘난 게 하나도 없는 데도 사람 앞에서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께도 대적할만한 교만이 다 죄인들 속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도 내밀히 살펴보면 우리의 교만을 꺾고 자만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프레드 런트라는 브로드웨이의 유명연극인이 있었습니다.
런트는 자기 공연에 자리가 꽉 차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꼭 서서 보는 사람들이 있어야 성이 찼다고 합니다.
어느날 공연담당자가 예매 된 표를 보니 몇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런트가 기분나빠 공연을 망칠까봐 다른 공연에서 사용하던 사람인형을 뒤에 세워 놓았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런트는 담당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공연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뒤에 서서 연극을 보던 사람이 꼼짝않고 연극에 몰두한 걸 보고 매우 만족스러웠소.
교만이 사람을 결국 이렇게 어리석게 만듭니다.
자만하는 인간만큼 거북한 존재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승승장구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우리 역시 교만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본성을 그나마 수습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 환경의 가시 때문입니다.
오늘 가시로 번역 된 원어는 끝을 뾰족하게 깎아 땅에 박는 말뚝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우리를 묶어 놓는 말뚝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찌르는 가시가 없었다면 벌써 세상 밖으로 뛰쳐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가 믿음을 가졌을 때 예수님께 나를 묶어 놓은 말뚝은 악화된 재정문제였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돈 문제로 전전긍긍하며 그저 교회와 집과 직장을 오가며 기도하고 또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깨지니 교만한 나를 드러낼 여건이 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하고 또 구했더니 문제도 차차 해결되고 신앙도 훈련되어 오늘 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가시들로 인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교만한 자가 되지 않게 한 것 만으로도 우리는 가시를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가시가 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여기서 우리가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가시가 박힐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 더 해주실 수 있는 데 외면하신다고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치명적인 가시가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서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덜 주신 게 아니라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남김없이 부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아낌없이 은혜를 주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가끔 나오시는 박성도님이 계십니다.
아들이 둘 다 지적 장애를 갖고 있어서 직장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폐지와 고물을 팔아 살고 계십니다.
며칠 전 김권찰님 심방을 가다 박성도님을 만났습니다.
더운 날씨에 무슨 일을 했는지 온 몸이 땀에 푹 젖어 있었습니다.
너무 안쓰러워서 제가 김권찰님께 가져갔던 아이스커피를 드렸더니 박성도님이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띄며 ‘우리 둘째 갔다 줘야지’ 하며 기분좋게 걸어가시는 걸 보았습니다.
지금 더위에 지치고 갈증이 난 박성도님이 얼마나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었겠습니까?
아버지의 그 사랑이 느껴져 마음이 짠했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닮은 인간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자식을 위해 부모가 아끼고 주지 않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정말 때로는 앞으로 가지도, 뒤로 물러가지도 못할 사면초과로 기도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애를 태우는 데 어떻게 속마음을 그리 잘 알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주시는 지 하나님아버지의 긍휼하심에 전률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혜는 조금이 아니라 족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육체적 가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한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시로 인해 우리가 약해있다면 대신 예수님의 능력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기 위해 바울은 약할수록 좋은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내 능력이 강해지길 원하지만 하나님이 방법은 우리는 약한 채로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점을 갖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절대 그게 아닙니다.
내 장점이나 강점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성취할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장점만큼 영적으로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내 계획과 내 강점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내게 능력을 주시고 성공을 주시면 그것이 크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거라는 것은 착각일 뿐이지 결국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고 마는 게 죄인의 결말입니다.
그걸 보는 남들도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돌아서 입을 삐죽이며 부러움과 시기심만 생길 뿐입니다.
하나님이 오죽 인간의 심리와 죄를 꿰뚫으셨으면 우리의 약점과 함께 일하겠다 그러시겠습니까?
지난 번 강연100도씨에 한복 만드는 할머니가 한 분 나오셨습니다.
육이오때 피난 열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손가락을 절단하고 두 손가락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손으로 옷을 만드는 데 그렇게 솜씨가 좋아 옷 만들어 자녀들 다 교육시키고 참 즐겁고 감사하게 산다고 할 때 청중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더군요.
누구든 약한 사람의 성공에 시기심을 갖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그 사람보다는 더 나은 것을 가졌다는 생각이 있기에 약한 사람의 성공을 탐하지는 않습니다.
성공할 만한 사람의 성공에 박수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람은 다 시기와 질투의 화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은 다 이런 죄인들 중에 일하셔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게 기도해도 안되는 치명적이고 지긋지긋한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가장 약한 지금, 예수님의 능력이 내게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 우리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참 놀랍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시각장애인으로 백악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을 지냈던 강영0 박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분이 말하는 게 바로 자기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이 능력이 강하게 자기 삶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장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님이었기에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 내셨다는 것이죠.
강영우박사가 암판정을 받았을 때, 수술을 받지 않고 삶을 정리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엽서를 보내며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던 강박사님의 신앙이 많은 사람들에 마음에 따뜻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었죠.
그런데 한편 시각장애인으로서 얼마나 고단하고 힘겹게 살았으면 인생에 대한 애착도 아쉬움도 저렇게 없이 짐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품에 안기길 원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이 육체의 가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빼내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가시를 통해 하나님은 가장 아름답게 인생을 꽃피워주시지만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그리워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육체의 가시인 것 같습니다.
때로 말뚝 같은 것이 가슴에 와 박히고, 손톱 밑에 가시처럼 은근히 아프게 하는 문제들이 다가왔다 사라지고, 또 다가오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족한 줄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시며 나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동일한 사랑으로 도와주시는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가 한번, 두번, 세번 간절히 기도하며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잘 이겨내시길 축원드립니다.
때가 되면 그 깊이 박혀있던 가시가 어디갔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쑥 빼내주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2014.7.6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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