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선수들이 달리는 모습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출발신호탄이 울리면 함성소리와 함께 선수들은 정말 사력을 다해 달립니다.
불끈 불끈 솟아오르는 근육이 터지지 않을 지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실제 올림픽에서 혼신을 다해 달리는 선수가 허벅지 근육이 파열돼 주저앉은 적도 있습니다.
이들이 피나는 훈련을 하고 사력을 다해 달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승입니다.
금메달을 걸기 위해서죠.
만일 우승할 생각도 없이 달리는 선수가 있다면 그건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뭐하러 달리러 나왔겠습니까?
지금 바울사도가 하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경주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당시 고린도시에서는 2년마다 이스미안이란 운동경기가 열렸습니다.
로마제국의 가장 큰 체육제전은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픽경기였고 그 다음 규모가 이스미안경기였습니다.
경기 10개월전부터 선수들이 몰려들어 고린도시는 훈련의 열기로 가득찼습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에서 일년 반의 목회생활을 했는 데 그 때 생계를 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천막사업을 했습니다.
이스미안 경기대회로 인해 숙박시설은 항상 부족했고 그래서 고린도시에는 텐트사업이 잘되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 역시 그 경기들을 관람했을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잘 구별되지 않는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바울서신의 헬라어 원문엔 경기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자만루, 병살타, 삼진 아웃 이런 식의 단어들이 바울서신에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마라톤과 격투기에서 쓰는 당시 운동용어들이 원문에는 사용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열광하던 스포츠용어를 써가며 어떻게든 영적진리를 전달하려 애썼던 것이죠.
24절을 읽을 때 고린도교회성도들은 군중들의 뜨거운 함성 속에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며 단 하나 밖에 없는 황제가 내린 월계관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들을 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보았듯이 그 중에 누가 대충 무성의한 경기를 뛰느냐는 것입니다.
혹독한 훈련 없이 기량이 형편없는 선수가 나와 뛴다면 군중들이 야유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경기장 안으로 물병을 집어 던질지 모르죠.
바로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런 매너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월계수잎 관을 위해서 평생을 연단하고 훈련하고 자신을 담금질 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냐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영적싸움의 목적도 스포츠정신도 다 버렸잖습니까?
본문의 앞에 적혀있는 성도들의 온갖 범죄와 비행을 보면 말문이 막힙니다.
음행과 도둑질과 모략과 소송과 영적인 타락이 부끄럼도 없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달려야 할 경기장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판, 춤판을 벌인 거나 같은 수준인 것이죠.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일탈은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대로 이 경주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죠.
생명의 면류관을 취하기까지 달리지 않을 거면 뭐하러 달리겠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사도 같은 탁월한 목회자로부터 1년 반을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믿음의 심각한 탈선은 우리에게 또한 경각심을 줍니다.
주변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시험에 들거나 괜히 시들해져 아예 교회에 발길을 끊는 사람들을 볼 때 참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승점이 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힘내십시오.
세월이 얼마나 빠르고 우리 살아가는 연수가 얼마나 짧은지 시편에서 우리 인생이 날아간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오늘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며 말씀을 통해 다시 힘차게 달려갈 힘을 얻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먼저 우리 인생을 믿음으로 완주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의 내용자체를 명료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최측이 누구인지, 받을 상은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오직 믿음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우리 인생너머에 하나님이 과연 계셔서 영생의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실까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종교생활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의 55%가 마음의 편안을 얻기 위해 기독교를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외에 복을 얻기 위해서 등의 기타 이유가 20%입니다.
내세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변한 사람은 25%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75%의 신자들이 영생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교회를 다니는 것이라니 정말 믿기 힘든 일입니다.
설령 마음의 편안함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왔다 해도 점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구원이란 목적을 바로 깨달아야 맞는 것입니다.
편안을 위한 목적만 가진 신자들이 어떻게 신앙에 일생을 걸겠습니까?
그냥 직업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취미생활을 하나 가지 듯 그렇게 마음의 위안을 줄 종교를 하나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우리 삶의 여러 영역 중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본질이고 모든 것이 이 믿음을 통해 재해석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창조 된 피조물이고 그렇게 살 때 가장 흡족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항상 왜 내가 이 신앙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지 갈등을 느낍니다.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종교를 하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종교가 무슨 마음에 위안을 줍니까?
만일 양심적으로 종교적 수련을 한다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의 근성을 발견하고 괴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릴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늘의 신을 향해 탄식하는 것 그게 진짜 도가 텄다는 것입니다.
양심을 마비시켜 스스로가 신이 되자는 것은 악한 종교입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종교로 기독교를 선택했다지만 그걸로 진정한 영적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내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서 진정한 위안을 받는 것입니다.
출발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확신 없이 내용도 모른채 시작했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오늘 편지를 쓴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다녀오는 영광을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니 목적지를 모르고 중도에 주저앉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이겠죠.
그러나 우리도 아무 것도 모른 채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천국도 영생도 확신하게 될 많은 증거들을 우리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부할 수 없는 내세의 실존을 확신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것을 매일의 삶에서 수없이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는 저 푯대를 향해 한눈 팔지 않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좀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생보다 더 명료한 내세를 깨닫고 확신해야 가야 할 줄 믿습니다.
매일 기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점점 교감해 갈 때 신기하게 희미했던 천국이 점점 맑고 선명하게 인식이 되어 갈 것입니다.
믿음의 완주를 위해서 날마다 이런 확실한 경기의 의미를 확신하며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은 이렇게 전력질주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경기장에서 목숨을 다해 달리는 선수처럼 달리라는 것입니까?
좀 쉬어가며 산책하듯 여유롭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바쁘고 여유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현대사회에서 회사를 위해 뛰고 또 뛰어야 간신히 얄팍한 월급봉투를 쥘 수 있습니다.
시간은 항상 부족하고 당장 해야 할 일이 매일 눈 앞에 산적해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신앙생활을 위해 무언가를 더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힘겨운 데 말씀과 기도와 봉사와 경건훈련 같은 것을 지속적으로 한다는 게 참 힘겨운 것이 현실이죠.
그러나 더 급하고 긴요한 것 처럼 위장 된 것들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힘든 현실을 다스릴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은 믿음에서 옵니다.
우리 삶은 앞으로도 영적생활을 위한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더 바쁘고 더 급한 일은 항상 눈 앞에 있습니다.
언제 우리에게 영적성장을 위한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겠습니까?
이렇게 항상 시간이 없어 기도하지 못하고 건강이 나빠 아직 봉사하지 못하고 돈이 부족해 선한 일을 못하고 세월이 가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빈곤한 믿음으로는 내세의 소망도 현세의 평안과 능력도 둘 다 누리기 힘듭니다.
믿음이 더 강하게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신앙훈련으로 믿음의 근육이 생기면 운동으로 얻은 몸 근육과 비교할 수 없는 강인함이 생깁니다.
나는 이렇게 쉬지 않고 달리다 지쳤다고 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교회봉사를 오래하신 분들이 때로 영적인 피로감이 느껴져 좀 쉬고 싶다고 하죠.
그런데 사실 영적인 피로감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낸다고 했지만 실제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와 은혜가 없는 종교적인 행위만 오래 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피로감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피로감, 영적인 고갈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그 선하심과 영광의 작은 부스러기라도 느끼고 깨달을수록 우리 영혼은 말할 수 없는 안식과 하늘의 평강으로 회복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깊이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좀 쉬어가며 해야 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 몸의 안식과 정신적인 휴식은 필요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생명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아직 안식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싸워야 할 일이고 헤쳐 나가고 해결해야 할들이 지뢰처럼 우리 앞에 널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전쟁터라고 하시고, 많이 봐 줘야 경기장입니다.
둘 다 쉬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인하게 나를 연단하며 계속 달려가야 하는 것이죠.
믿음으로 일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절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과 우리의 본성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합니다.
의지적으로 믿음의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본성 쪽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우리 삶을 경영해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긴장감 속에 항상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꾸 죄의 본성대로 믿기 쉬운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죄를 그대로 갖고도 섬길 수 있는 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다른 종교들 보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얼마나 편리하게 믿습니까?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면 우리가 벌써 다 도망갔을 사람들입니다.이런 우리의 죄성에 잠시 마음과 몸을 맡기면 순식간에 저만큼 떠내려 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잠깐 영적인 호흡을 쉬었을 뿐인 데 너무 멀리 후퇴해 버립니다.
멀리 밀려갈수록 돌이키고 싶은 마음도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절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게다가 악한 영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쉬지 않고 공격하지 않습니까?
악한 영들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일에 휴식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낸 편지에서도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7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우리의 믿음의 달음질을 막는 인격적인 존재가 바로 마귀의 세력들입니다.
악한 영은 항상 우리 앞을 막아서는 다양하고 막강한 전쟁무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환경을 꼬아서, 질병으로, 산란한 생각들로 우리의 믿음의 길에 덫을 놓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나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이 마귀입니다.
마귀의 계략에 골탕을 먹고 평상적인 삶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강하게 믿음으로 전력투구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편지를 볼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에 집중하지 않은 결과 그런 부끄러운 영적 실패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힘을 내서 믿음의 경주에 집중하고 천국의 소망을 향해 기쁨으로 뛰어가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끝까지 이 경기를 완주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할 것을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5절에서 모든 것을 절제하며 훈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좋은 것들은 육체를 담금질해야 나오는 지 모르겠습니다.
초콜릿 복근이 왜 저절로는 절대 생길 수 없냐는 것이죠.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다 해도 훈련이 없이는 마광되지 않습니다.
‘신이 내린 목소리’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조수0씨는 ‘깨어있는 시간엔 계속 노래 연습만 했다’고 말합니다.
가끔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그런 사소한 즐거움 조차 절제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재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매일 매순간의 노력이 이렇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눈물 나는 장면, 모델의 한끼 식사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리고 마른 모델이 식사 접시를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접시에는 새끼손가락만한 아스파라거스1개, 토마토 4분의1쪽, 브로콜리 몇조각이 썰렁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다먹고 남긴 것 같은 빈약한 접시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걸 바라보는 어린 모델의 정말 슬퍼보이는 눈빛이었습니다.
절제하지 않고 어떻게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주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손연0선수가 은메달을 목에 걸어 국민들을 기쁘게 해주었죠.
언젠가 기사에서 손연0선수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홀로 훈련하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선수가 체중조절을 위해 냉방시설도 안한 연습장에서 구슬땀을 흘릴 때 땀만 흘렸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같이 흘렸을지 참 안쓰러웠습니다.
경기장에서 분투하는 그 어느 선수이건 다 그런 훈련과 자기 절제를 전제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도 이렇게 선수들처럼 절제하고 훈련하라고 강력하게 밀어 부치십니다.
연민에 가득 찬 눈으로 서글픈 내 인생과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면 왠지 참 슬프지 않습니까?
하나님아버지께서 왜 우리의 힘든 처지와 피곤한 현실을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나약한 마음과 연민으로 어떻게 이 험난한 세파 속을 견디고 이겨나가겠습니까?
이 세파 속에서 모든 어려운 환경이 올 때 마다 강인하게 이겨내려면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자녀들을 온실 속에 넣고 키우지 않으십니다.
거친 광야로 데리고 나가 전쟁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싸우게 하십니다.
다윗이 사무엘하22장3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는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놋 활을 당길 수 있을 만큼 근력을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다 이런 전투력을 갖춘 그리스도의 군사로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바로 서기만 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현실적인 문제들과 무거운 환경, 믿음으로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위해 우리가 죄의 본성대로 가려는 자신을 절제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스스로가 얼마나 절제가 안 되는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해 이렇게 푸짐해 지고 있지 않습니까?
경건한 성도의 삶을 위해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덕목은 생활 전부 다입니다.
어느 부분을 얼마큼 절제할 지는 개인의 신앙에 따라 다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듣고 배운 데로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절제는 우리 스스로 하는 이를 악물고 하는 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결심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절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불필요한 세속과 죄에 대한 것을 절제할 때 믿음이 성장하고 기쁨과 만족도 주시기에 계속 절제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행은 절대 못합니다.
오락, 스포츠, 문화생활, TV, 스마트폰, 취미, 연애 등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원칙을 갖고 절제하길 원합니다.
원칙은 오늘 바울사도가 제시하는 대로입니다.
목적을 생각하면 줄여야 할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잘 절제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의 달음질에는 정확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6절에서 바울사도의 달음질엔 정확한 방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겉보기엔 똑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사람들과 성도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고 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복된 방향이 어느 곳인지를 알고 뜁니다.
아무리 별 볼일 없이 평범한 것 같아도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명확하게 알고 가는 우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결승점을 모른다면 아무리 사력을 다해 뛰어도 결과는 참담한 실패입니다.
올 봄 영국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서 5천명이 넘는 선수들이 다 실격처리 된 일이 있습니다.
선두주자와 2위 선수가 꽤 거리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선두주자는 정코스를 뛰었지만 2위 선수가 경로를 이탈해서 뛰었습니다.
문제는 뒤따라 오던 나머지 5천명의 선수들이 다 그 뒤를 따라 뛴 것입니다.
코스를 이탈해 뛰었기 때문에 결승점을 통과하고 보니 2백여미터가 모자랐습니다.
결국 1위 선수만 우승을 하고 나머지 전원 실격이 되버린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나는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무신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선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고 우리가 보고 달려야 할 유일한 푯대도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오직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응원하시는 예수님만을 방향으로 삼아 믿음으로 달려가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전 그거 해보고 싶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 박지0선수가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서 넙죽 안기는 장면 기억나시죠?
선수가 얼마나 그 순간을 위해 담금질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감독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제자의 승리를 응원하고 있는 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포옹이 나오는 것이죠.
부족하지만 우리가 나름 믿음의 길을 따라 서툴게 뛰어가는 것을 지켜보시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 모두를 그런 마음으로 반겨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복을 얻을 이 길을 잘 달리도록 얼마나 많은 말씀으로 격려하고 보장해주십니까?
누가복음12장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그날에 우리의 수고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띠를 띠고 우리를 자리에 앉히고 수종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달려야 할 믿음의 경주를 했을 뿐인데도 우리의 완주는 주님께 그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에서 바울사도는 말씀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이유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의 인격의 진실성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를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에 이르기 까지 완벽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끝까지 믿음의 완주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사도가 이토록 철저히 복음과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너무나 악한 인간의 본성과 끈질긴 죄의 유혹과 사탄의 만만찮은 공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비견할 사람이 없는 하나님의 일군이 된 것도 얼마든지 영적인 위기가 될 수도 있기에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풍랑이 일고 집채 만한 파도가 위협할 때는 사실 위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고 주님의 도움을 부르짖어 구할 수밖에 없을 때 성도들은 오히려 하나님 은혜 안에 있어 안전합니다.
내 주변이 다 편해지고 세상일이든 교회 일이든 내가 맡은 일들이 하나님 도움 없이 할 만해질 때 영적인 위기가 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구원에 안전지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누가 완벽하게 구원받을 만한 자라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더 깊어질수록 내가 모든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아버지의 사랑과 천국의 광채가 조금씩 느껴질수록 어찌 나 같은 자가 이런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는 지를 생각하면 내 구원이 더 실감이 나지 않고 두렵고 떨릴 뿐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연약한 믿음으로 고군분투하며 힘겹게 달려가는 모습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때로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돌에 채여 다리를 절둑거리고, 비바람이 사정없이 온 몸을 때릴 때 위태하게 달려오는 모습에 예수님께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자랑스러워하시며 빛나고 영광스런 승리의 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이 빛나는 영생의 관을 씌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머리 깊숙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 함께 이 대열에서 낙오되지 말고 스크럼을 짜서 함께 발을 맞추고 구호를 외치며 힘차고 즐겁게 달려 나가는 주나산의 가족들이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13년7월2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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