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kavEAvHnLa0
고린도교회는 많은 문제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사도는 그 원인을 성도들이 십자가의 도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십자가의 도로 다시 돌아가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죠.
사실 인생에는 문제만 있지 해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가 터져서 막으면 다음엔 저기가 터집니다.
그래서 계속 돌려막기 하는 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든 답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야 얻게 됩니다.
또 믿은 다음에도 예수님 안에 있어야 생활의 답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건, 십자가 신앙을 떠난 그들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고 괴롭게 시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사도가 문제들을 하나씩 다루기 전에 먼저 답을 주시는 십자가의 도를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만 십자가의 도에 대해 재교육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 편지는 사용하시고 폐기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사도를 통해 예수님과 십자가의 도를 다시 배우며 삶의 답을 얻게 되길 원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어떻게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며 본을 보였는지, 과거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1.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전해 준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물론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 고린도전서를 쓰게 된 이유는 들리는 소문도 있었지만 교회지도자들이 골치 아픈 사건들에 대해 바울의 의견을 편지로 물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내 문제를 묻고 답을 얻고 싶어 하죠.
저는 지난 주 기사를 하나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정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청년인구가 팔백팔십만 명 정도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경제활동을 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청년들이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해서 인생을 세워가야 하는데 절반이 일을 못하고 있다니 보통 문제가 아니죠.
또 올해 상반기 직장인 월급 현황을 보니 직장에 다니는 사람 절반 이상이 3백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세금 떼기 전이고 세 번의 성과급을 포함해서라고 합니다.
한 달에 한 이백에서 이백오십 정도 월급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주거비와 각종 물가 상승을 고려할 때 가정을 꾸려가기가 너무 팍팍해진 것이죠.
그러다 보니 이런 기사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봉양하지 않는다고 70대 아버지가 아들을 흉기로 찔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살인미수로 구속 돼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먹고 살길이 막히다보니 혈육조차도 증오하는 관계가 되고 있는 것이죠.
사는 데 어디 이런 문제가 전부이겠습니까?
다들 별 탈없이 사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들추면 한숨이고 고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상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기서 계속 환난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와 인기를 다 거머쥔 사람들이 마약에 빠지는 걸 보면 인간의 죄에서 어떤 환난이 나올지 참 두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 그걸 끊어낼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고등래퍼라는 오디션프로에 나왔던 사츠* 라는 랩퍼가 있습니다.
이 자매가 랩퍼들의 모임에서 펜타닐이라는 마약을 하게 됩니다.
좀비마약이라는 펜타닐은 한번 하면 99% 중독 된다고 하더군요.
아무도 이 펜타닐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 자매가 죽음 직전까지 가서 아는 사람에게 교회로 좀 데려다 달라고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마약 충동을 이겨내기 위해서 시편을 읽으며 버티는 데, 시편1편을 읽는 중에 거기에 나오는 악인이 바로 자기라는 게 알겠더랍니다.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죽어가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데 누군가 머리에 손을 얹는 것 같더니 마약의 고통들이 씻은 듯 사라지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남은 마약들을 전부 다 변기에 쏟아 버립니다.
그 후로 마약 생각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마약중독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너무나 예쁜 자매가 되었습니다.
자매의 간증이 백만뷰를 넘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살아있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눈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죠.
마약중독에서 살아났다면 그 외에 어떤 문제든 답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사도는 천금 같은 시간에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을 전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문제들, 다른 어디서도 답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도 받고, 삶의 모든 문제들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다만 절실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에게 과연 그런 간절함과 절실함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2. 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사도에게 원칙이 있었습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사람의 말이나 지혜로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5절에서 말씀하죠.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람의 지혜로도 복음을 그럴 듯하게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하고 복음을 전한 뒤에 남는 것은 ‘저 목사 설교에 은혜 받았다, 진짜 설교 잘한다’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한 복음을 듣고 나면 남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기적도 행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구원받은 신자들은 제자들을 칭송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나옵니다.
오늘 설교를 다 듣고 난 뒤, 우리의 머리 속에 예수님만 기억되고 하나님만 찬양하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바울이 사람의 지혜로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원칙을 갖게 된 것은 쓰라린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로 오기 전에 아테네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죠.
사도행전에 보면 가서 보니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철학과 학문을 토론하는 데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티칸에 있는 한 성당에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이라는 대형 벽화가 있습니다.
아테네가 배출한 54명의 철학자들이 서로 토론하는 그림인데 거장의 그림 답게 학자들의 열기가 물씬 느껴집니다.
최고의 지성인 학자들의 왠지 위엄 있어 보입니다.
거기 보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피타고라스 같은 역사의 걸출한 철학자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이런 자부심으로 가득 찬 아테네에서 바울이 낯선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했던 것이죠.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쌓아 올린 철학과 학문으로 볼 때 십자가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창세기에서부터 배웠듯이 하나님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경영하셨지만 이방인들에겐 생소한 이야기죠.
아테네시민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 바울도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때 아레오바고 강연장에서 한 바울의 강론이 사도행전17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아테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종교와 철학으로 출발해 복음을 증거한 논리적으로 탁월한 설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와 이성을 십자가와 완벽하게 연결할 수 있는 고리는 없습니다.
바울이 세상종교와 철학을 이용해 복음을 증거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조롱만 당하고 아테네에서는 겨우 몇 명의 신자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경험으로 바울사도가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의 전도 설교가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도하는 게 좋죠.
바울사도가 깨달은 것은 설명과 설득을 잘한다고 복음을 믿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되기에 믿을 수가 없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리는 것들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그걸 깨닫고 나니 세상 얘기를 끌어 올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냥 처음부터 성경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전하면 성령께서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이죠.
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지금 고린도교회에 세상 지식과 철학을 다시 숭상하는 분위기가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뭔가 너무 단순하고 세상 지식은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
지식으로 따지자면 바울에 비해 고린도교인들은 가소로운 수준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십자가 복음만 전했겠냐’는 것입니다.
요즘 공부하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출연자들이 각자의 전공 분야를 얘기하는 데 실력이 대단하고 멋있어 보이죠.
만일 그 가운데서 기독교 관점을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멋져 보일까요?
성도들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나는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 십자가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바울사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사도는 본래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 대화하는 인공지능이 있죠.
뭘 물으면 실시간으로 대답해 줍니다.
구글의 인공지능이 바드인데 누가 재미 삼아 성경인물들의 MBTI를 물었더니 바울사도는 완전 적극적인 외향형으로 나왔습니다.
회심하기 전 바울은 예수 믿는 제자들을 박해하고 도망간 성도들을 잡으려 던 행동대장이었잖아요?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도 그 성격 그대로였습니다.
다메섹 성에 들어가서는 이번엔 유대인들과 맞붙어 맹렬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교인들과 격돌합니다.
하루 아침에 돌변한 바울에게 적대감을 느낀 유대인들은 바울 죽일 결사대까지 조직할 정도였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바울의 성격이 소심하고 유약했다는 걸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이 이렇게 약하고 두려워 떨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린도 사람들에 대해 두려워했다는 건 아닐 것입니다.
아테네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길 간절히 바랬기에 극도로 긴장하며 두려워했다는 것이죠.
어떤 원로 목사님은 강단이 더 이상 두렵고 떨리지 않는다면 그게 가장 큰 위기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사도가 만일 복음이 아니라 전공인 율법을 가르치고 철학을 가르쳤다면 얼마나 자신만만 했겠습니까?
누구보다 뛰어났을 바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평생 복음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중 자기 힘으로 잘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복음을 평생 전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십자가였을 것 같습니다.
진정한 십자가죠.
소통전문가로 불리우는 김창*강사의 강연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너무 재밌어 웃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게 하는 강연이 그 분의 특기입니다.
강연을 듣는 사람들을 보면 다 웃으면서 웁니다.
이분이 독실한 크리스찬인데 간증 프로그램에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신자들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마음 한 켠에 늘 있습니다.
김창옥강사의 경우는 우리 젊을 때 은혜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선교사가 되길 서원한 적이 있더군요.
그러니 항상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을 것입니다.
이 분이 청중을 휘어잡으며 강의를 하다가 슬쩍 복음을 제시하려 시도하는 걸 몇 번 보았습니다.
그 순간의 긴장감이 저는 느껴집니다.
어느새 날고 기던 높은 강단에서 마음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약함과 두려움으로 그 한마디를 아주 조심스럽게 건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게 어떤 은혜인지를 아는 성도들은 주님의 그 십자가에 대한 사랑의 빚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예수님을 좀 전해보기 위해 그렇게 십자가를 집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죠.
우리가 가정에서도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식구들을 전도하려면 내 성질대로 큰소리 못 칩니다.
식구들 기분을 살펴야 하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죠.
혹여라도 관계가 나빠지면 내가 예수님 믿는 게 무색해질 뿐 아니라 전도의 문이 닫힐까 봐 두렵기 때문이죠.
그것이 십자가의 구원의 도와 짝이 맞는 복음 전파의 방식입니다.
예수님도 실력과 힘으로 구원을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본성과 맞지 않게, 자신을 낮추어 약하고 두렵고 떨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게 무엇을 증명합니까?
그러면서도 그 일을 한다면 그게 바로 복음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죠.
복음이 진실이 아니면 바울이 왜 그렇게 평생을 헌신했겠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님께 속 시원히 헌신도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주님을 따라가고 있겠습니까?
그것도 복음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바울처럼 내게 붙여 놓으신 단 몇 사람의 영혼을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며 전도하려고 평생 노력하는 것이죠.
4. 바울사도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해하고,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이십니다.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 대속은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가 안된다는 것은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맞는 것이죠.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심판으로 떨어진 인간을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해 내실지는 천상계에서도 미스터리였습니다.
상상을 초월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사람의 모습으로 삼십 년이나 그냥 사시는 거예요.
때가 되어서 함께 일하실 열두 명의 평범한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십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리는가 싶더니 점점 반대자들의 반발에 수세에 몰리십니다.
결국 체포되시고 설마 했는데 그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리신 것입니다.
천사들도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영문인지를 몰라서 이 십자가의 신비 를 알고 싶어했다고 성경은 기록하죠.
베드로전서 1장12절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믿는 자들의 죄를 완전히 없애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복음의 신비를 천사들도 알고 싶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10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나니
성령으로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성령께서 천사들에게 안 가르쳐 주신 것이죠.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인류의 죄가 대속 된다는 것을 사탄이 이해했다면 어땠을까요?
어떻게든 주님의 십자가를 막았을 것입니다.
그걸 알 수 없었기에 사람들을 동원해 되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죠.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의 길이 열리고 성경으로 알려오셨던 대속의 원리가 명백히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도 상황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것을 이해하게 역사하지 않으시면 십자가의 원리를 아는 것 같은데, 모릅니다.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성령을 받지 못하면 여전히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가 안되니 믿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1장을 보면 고린도교인들이 지식이 풍족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많습니까?
성령님의 감화로 십자가를 믿었다 해도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죠.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이전처럼 육에서 나오는 대로 삽니다.
그것이 겉으로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면 남들과의 분쟁이고, 스스로 자랑하는 교만이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과 반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경과 설교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다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게 안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만 하면 되고 그 다음 성령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아주 분명하게 알려주셨죠.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성령인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구하는 우리에게 왜 주지 않으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받고 하나님 좀 잘 섬기고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돼 보겠다는데 왜 성령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령 주시길, 또 성령충만을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또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죠.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지 못하는 것들을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일어납니다.
성령이 오시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죄인이 되었고 그 후손인 우리도 죄인의 상태로 태어났다는 원리 같은 것을 자세히 몰라도, 직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김창*강사가 청소년시절 부흥회를 따라갔는데, 거기서 밭에 감추인 보화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믿음과 구원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가 되더랍니다.
그리고 나서 기도시간에 기도를 하는 데, 자기가 그동안 지은 죄가 낱낱이 생각나며 눈물 콧물 흘리며 밤새 회개 기도를 했다고 하더군요.
중학생짜리가 무슨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겠어요?
성령이 임하시면 아주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죄의 뿌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걸 통렬히 깨닫고 회개한 경험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를 한번만 짓는 것은 아니기에 늘 회개 기도를 하지만 한번도 그런 회개를 해 본 적이 없다면 그걸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야만 내가 회개가 필요한 죄인인지가 비로소 보이거든요.
-또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던 중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임하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사도가 예수님과 십자가만 그들에게 가르쳤던 것은 사람에게 십자가 구원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절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가 자기 실력대로가 아니라 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역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받을 영혼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붙여주신 영혼들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으로 평생 복음을 전하게 되길 바랍니다.
성령께서만이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 나와 연결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믿어지고, 그 믿음이 현실에서 움직이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배우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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