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욥을 보았느냐 (욥기1장6절-12절)

남수연 2023. 11. 9. 00:15

오늘부터 12월까지 매일성경 욥기 말씀을 묵상하고 나눕니다.

1. 욥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를 좀 해 드리겠습니다.

욥기는 한 경건한 성도의 고난을 주제로 한 성경입니다.

욥이 살던 시대는 야곱이 살던 족장시대로 추정합니다.

야곱 일가가 요단강 서쪽 가나안땅에 거주할 때 동방의 의인 욥은 요단강 건너편 동쪽에 살던 사람입니다.

중동 아시아 전역에 하나님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욥이 실제 역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은 욥을 인용하고 있는 에스겔과 야고보서를 통해서 확인됩니다.

욥기의 저자는 유대전승에는 욥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모릅니다.

욥이 저자라면 당연히 자기가 겪은 일을 기록했겠죠.

만일 후대에 기록한 것이라면 고난의 사람이라고 불리웠던 전설적인 욥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 경건한 저자가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중간에 욥과 친구들의 변론 내용들은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뛰어나게 구성해 저술한 지혜 문학이 될 것입니다.

욥기는 욥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신학서와도 같다고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욥기는 성도들이 선호하고 자주 읽는 성경은 아닙니다.

그런데 욥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성도들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이 당한 고난처럼 우리 인생에도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많은 고난을 겪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힘든 일을 만나면 욥을 떠올릴 수밖에 없죠.

그럼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신앙과 인격과 가족과 소유까지 결함이 없는 완벽한 욥을 소개합니다.

2. 그리고 6절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의 정례 모임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1) 하나님께 중죄를 짓고 처벌받은 사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에 이상하죠.

신약성경은 사탄이 성도들을 하나님께 참소하는 자였다고 기록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무저갱에 떨어질 사탄을 하나님은 아직 관대하게 대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동생을 죽였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대우가 너무 관대하다고 느꼈던 것과 비슷합니다.

죄와 악에 대해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 하시지만 또 다른 본성이신 사랑이 죄지은 피조물에게도 이런 자비로 나타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사랑하는 대상이 내게 지독히 잘못했을 때 갖게 되는 애증의 감정과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욥을 하나님께 깎아 내리는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고발하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1210절에서 그 사실을 알려주죠.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그동안 사탄이 밤낮 성도들과 하나님 앞에서 들락달락하고 참소했다는 걸 오늘 욥기가 실제로 보여주죠.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정산하셔서 채무가 없어졌기에 더 이상 사탄은 우리 죄를 고발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회의 장면에서 하나님도 천사들도 욥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천사가 하나님과 너희 사이에서 섬긴다고 하셨잖아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고도 공허함으로 차 있는 게 아닙니다.

천국과 우리는 아주 가깝고 긴밀하다는 걸 자꾸 인식한다면 이 땅을 영원에 닿도록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먼저 욥을 시험할 사탄에게 문제를 던지십니다.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기서 사탄과 악한 영들에 대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들은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닌다는 것입니다.

다녀왔다는 말은 걷다라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해 악령들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두루 다니다 쉴 곳을 찾지 못해서 나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비유 말씀과 상통하죠.

우리가 너무 사탄과 악한 영들에 대해 전지전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은 옳지 않습니다.

악령들이 사람 속을 빤히 보거나, 마음 먹은 대로, 원하는 장소로 신출귀몰하게 이동할 수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것처럼 속이는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탄이 욥의 주변을 탐지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욥을 질투가 가득찬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켜보다 왔을 사탄에게 이렇게 들으라는 듯이 욥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탄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그런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며 따르면 이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도 회개도 않는 사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욥과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을 흉계만 꾸미고 있을 뿐이었죠.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욥이 누리는 넘치는 복은 다 하나님이 주셨고 또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욥과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고 계셨기에 사탄이 욥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욥기가 아니면 어디서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욥기가 너무 귀한 성경인 것이죠.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을 이렇게 울타리로 두르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보호자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사탄에게 두들겨 맞고 다 뺏기고 사탄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욥이 믿음을 확증하도록 욥의 모든 것에 사탄이 손을 대도록 허락하십니다.

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3. 여기서 욥기의 가장 큰 미스테리인 욥의 고난에 대한 많은 논란이 나옵니다.

사람이 당하는 재앙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는 상식과 다르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은 불행과 고난을 인과응보로 해석합니다.

선을 행하면 좋은 일이, 악을 행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이죠.

이런 틀에서 벗어난 재앙이 오면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지고 정신이 붕괴되기도 합니다.

사실은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받는 상황도 세상에 수두룩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인과응보라는 기계적인 해석을 좋아하죠.

지금 가자지구에서 어린아이들이 죽어가고 지진과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게 인과응보로 해석이 됩니까?

스즈메의 문단속이라는 애니메이션은 2011년에 있었던 동일본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이때 일어난 것이죠.

이때 피해액이 2350억달러라니 250조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죠.

지구의 자전축이 20센티이상 움직였다고 할 정도의 무서운 지진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만팔천 명 이상이었죠.

영화를 만든 신카이 마코토라는 감독은 여러 편의 재난영화를 만들었죠.

이 감독은 동일본대지진을 당하고 나서 세상을 이전처럼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세우고 믿었던 모든 것이 파괴되는 재앙이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뒤집어 놓는 것이죠.

신카이 감독은 이 엄청난 재난에 경외심을 갖게 되고 일본 전통 무속으로 그것을 달래 보려는 재난 영화를 자꾸 만들고 있더군요.

욥기는 일찍이 인과응보가 세상의 유일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치 사탄과 하나님의 내기처럼 보여지는 이런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누군가의 고난이 이해되기 바라서 이런저런 해석을 하지만 결국 돌아서면 내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왜 고난을 주시냐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당한 고난에 대해 주일에 살펴보았지만 그것으로도 해석이 안되는 고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이상하고 어색한 것이 욥의 고난입니다.

욥의 고난은 자기 탓고 아니고, 징계도 아니고, 믿음 성장용도 아닙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이 인정하신 경건하고 흠이 없는 의인입니다.

그래 놓고 죄가 있어서 징계한다, 성장을 위한 연단이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물론 욥이 완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대치의 믿음과 바른 행위를 가졌다는 것이죠.

욥기는 사람들이 일반적인 법칙으로 생각하는 인과응보의 예외를 확보하는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행한 대로만 갚으신다면 모든 사람이 죄인인 현실에서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죄가 없어도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반대로 죄가 있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지가 되는 것이죠.

욥의 고난은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시려는 의도에서 나온 고난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이 땅에 내보내기 위한 초석을 놓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세상에 죄와 반역을 가져온 사탄에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욥의 고난을 허용하시듯, 사람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암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에서 가장 중요한 의도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욥기도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이해가 안되는 것은 너무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고난 가운데서 왜라고 묻는 것도 정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당하는 다른 사람과 달리 행복하게 많은 것을 누리고 안전한 것도 왜냐고 물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욥은 모든 것을 잃는 극한 고난 가운데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는 내 잘못도 찾아보고, 내 교만을 낮추시고 복되신 하나님과 가깝게 하라시는 성장의 의미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고난에 대해서는 나를 영원한 환난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현재의 모든 어려움도 겸손히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는 모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2023년11월8일 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