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욥의 고난을 두고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논쟁이 점점 총성 없는 전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처음엔 사소하게 시작하죠.
그 불을 빨리 끄지 않으면 서로의 치부를 다 드러내고 서로를 불사를 만큼 극한 상황으로 가게 됩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을 보며 먼저 어떻게 사람을 위로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간 이스라엘을 위로하라고 하십니다.
비록 그들의 잘못으로 받은 징계이건만, 거기서도 그들이 위로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위로받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길 원하십니다.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 해도 나는 언제고 위로자가 될 수 있죠.
남을 위로하면 뜻밖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나 자신도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러 왔다가 욥을 죽이고 있습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욥의 친구들의 충고는 자기들의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죄가 없는데 고난을 당할 사람은 없다는 신념에 갇힌 친구들은 계속 욥에게 잘못한 것을 고백하라고 추궁합니다.
그들은 점점 욥을 꾸짖고, 모질게 깎아 내리고, 마음을 꺾어버리려 합니다.
사람이 잔인한 것은 고통당하고 비참해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위로하는 것 같은 데, 속에 묘하게 찌르는 가시가 있는 위로를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기술적으로 합니다.
남을 챙겨주는 것 같으면서 우리는 교묘히 나를 계산합니다.
아무리 내 생각에 옳은 말이고, 그게 상대에게 이익이 될 말이라 해도, 먼저 우리 본성의 저의가 악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위로해야 할 가까운 사이의 대화일수록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별로 필요치 않습니다.
가족 간에 똑똑한 것 자랑할 일 있습니까?
그것보다는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욥이 지식의 칼로 찔러대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1절,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힘들게 살아가는 가족들에겐 똑 부러지는 충고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따뜻한 위로자가 되려고 노력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고 있음을 점점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친구들 뿐 아니라 극한 고통 가운데서 욥도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힘들면 사람이 이기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의 욥이라면 친구들의 논쟁을 너그럽게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욥도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고, 논쟁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큰 갈등을 겪으면서 상대방의 본심만 알게 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치부도 드러나죠.
사실 억울함을 주장하는 욥의 지식도 불완전하잖아요?
욥은 지금 자기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이 자신을 박해하고 미워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합니다.
22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죠?
친구들이 박해하는 것을 나무라면서 그 속에 하나님이 나를 박해한다는 섭섭함을 표출합니다.
본문 앞 긴 문장 속에서도 욥은 자기에게 불행을 주신 하나님이 부당하시다고 불평합니다.
우리는 욥기의 시작에서 알고 있죠.
하나님은 욥을 의롭다고 하시고 욥을 자랑스러워하시고 사랑하셨잖아요?
우리가 힘들 때 먼저 드는 생각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신다, 내게 벌을 주신다.’
욥기는 성도들의 고난을 인과응보로만 생각하지 않을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 인한 고난이든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유익이 되도록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고 박해한다는 것은 그것 밖에는 못하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욥이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대속자에 대한 갈망을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욥기의 핵심이죠.
욥은 23절, 24절에서 갑자기 내 말이 책으로 씌어지고,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큰 감동이 욥에게 임하셔서 대속자에 대한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죠.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욥기가 구약의 신학서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죠.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로 가득 차 있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대속자 사상을 드러낸 곳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제사법이 대속에 대한 기초를 깔아놓는 것이죠.
1장부터 욥은 자녀들이 생일 잔치를 하고 나면 죄를 지었을까 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야곱과 동시대 사람인 욥으로 볼 때 모세가 율법을 받기도 전입니다.
욥은 대속 제사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욥을 의롭다고 하신 것은 욥에게는 우리 같은 원죄와 죄성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최대한 양심에 따랐고,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 최선을 다했고, 죄를 지으면 대속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욥의 삶이 안정적일 때는 그렇게 죄의 본성을 충분히 다룰 수가 있었습니다.
상황이 급변하자 그것도 무너진 것입니다.
욥의 입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친구들에게 화를 쏟아 부으며 옹졸한 우리와 똑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 같지 않습니까?
그걸 경험하며 욥은 오히려 이렇게 따져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받아들여 질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고쳐지지 않는 인간 본성을 이렇게 설명하셨죠.
예레미야 13장23절,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아무리 피부를 닦고 때를 벗겨낸다고 흰 피부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표범의 털을 완전히 깎아 버려도 다시 반점 모양의 털이 자랍니다.
그게 변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바뀌어서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인간 스스로에겐 아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죄와 선을 행할 능력의 한계를 깨달으면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게 됩니다.
그제사 이대로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실 대속자를 구하는 것이죠.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런 대속의 교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절실하지 않던 사람이 큰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 밖에 답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간청해야 하는 데, 내게 그럴 수 있는 명분이 없잖아요?
그러면 그때 나의 대속자이고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왜 필요한지를 비로서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힘든 시련을 겪고, 내 인격의 바닥을 보며 낙담할 때, ‘그렇지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죄와 고통을 없애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해 주었지’. 그것을 비로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으로 욥기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통해 그것을 안다면 우리 고난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또 놀랍게 욥이 부활 신앙을 고백하죠.
26절,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족장시대 욥에게서 놀라운 부활 신앙이 고백 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속자를 알고 나면 비로서 부활이 믿어집니다.
내 부활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 대속자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배워가고 말씀을 믿고자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과 부활을 확신할 믿음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유* 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노래도 많고 한때 꽤 잘 나가는 가수였죠.
그런데 유열씨가 방송에 꽤 오래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에 성대역기능이라는 치료 불능의 질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숨을 들이마시면 성대가 열려야 하는 데 거꾸로 닫혀 버리는 질환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기침이 나와서 노래고, 말이고 할 수가 없게 된 것이죠.
게다가 폐섬유증까지 생겨 숨이 가빠서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를 못하더군요.
어느 작은 교회에서 유열씨가 신앙 간증을 하는 영상을 보았는데 정말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유* 씨와 친한 윤석* 씨가 위로하러 깜짝 방문을 합니다.
윤석* 씨는 뇌암으로 20시간을 수술하고 자연치료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수술을 하고 며칠 뒤에 깨어났는데 이젠 못 걷겠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걷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며 믿음을 고백하더군요.
하루 하루 살고, 내 발로 화장실 가는 것도 너무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항암제 부작용인지 앞니가 네 개 빠진 채로 나와서 너무 놀랐습니다.
그 화려했던 여배우가 앞니가 빠진 상태로 대중 앞에 나와서, 과연 무슨 감사가 되겠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는 두 사람 얼굴은 밝고 편안해 보였습니다.
보기에도 안쓰럽게 빼빼 마른 유* 씨와 앞니가 네 개가 빠진 윤석* 씨가 함께 신앙을 간증하는 데 그걸 보면서 전 기분이 좀 미묘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잠시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저렇게 초라하고 건강도 위태로워 보이는 자녀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게 좋으실까?
더 정확히는, 저들을 저렇게 만드셔서 믿음의 고백을 받으시는 게 좋으실까?
더 솔직히는 우리를 좀 행복하게 해 주시면 안됩니까?
이런 마음이 우리 죄인들 속에는 다 있습니다.
행복한 돼지로 살다 잡아 먹히게 둘 수는 없으시죠.
잘 나갈 때야 자기가 영광을 누리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잖아요?
하나님은 초라한 자의 예배를 기뻐하시고 기꺼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믿게 되었다면 감사한 것이고 하나님은 기쁘*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유열씨의 노래 중에 ‘화려한 날은 가고’란 노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겉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있다가도 없어지고, 때가 되면 다 사라지는구나, 결국 영원한 것만 남는구나.
그분들이 예수님을 높이는 걸 보니 진짜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극한 환난 중에는 불확실한 것부터 버리게 되잖아요?
지금 그분들이 붙잡고 있는 그 예수님은 진짜이고 확실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인생의 끝을 향해 가면서 소유하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갈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 한 분이 남게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잘 산 인생이고, 이후의 삶은 더욱 복되고 영화로울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이것을 알고, 삭제 될 것들에 마음을 쏟지 않고, 마지막에 남을 주님을 중심으로 산다면 이 땅에서의 인생도 아름답고 복될 것입니다.
어제 김창* 강사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아서 강의를 못하게 될 것 같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분이 참 고생 많이 하신 분이시거든요.
인생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2023년11월29일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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