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사자의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요.
우리가 욥기를 묵상하는 것이 마치 그런 기분인 것 같습니다.
욥의 고난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죠?
그렇지만 욥기를 읽으며 고난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처럼 섬세하게 다룬 성경이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이 각별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김창옥강사의 강연장에서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한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언을 구하더군요.
그런 아픔을 당한 사람에게 갑자기 어떤 말로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김강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떠난 딸은 엄마에게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딸은 엄마가 자기를 잊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엄마가 자기로 인해 불행한 건 원치 않을 것이다.
딸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되 그것으로 인해 너무 불행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만들어 가라는 답을 주더군요.
김창옥강사의 강연을 보면 상처가 큰 사람이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보듬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상처받은 욥을 통해서 상처받은 우리를 치유해 주시길 바랍니다.
1. 오늘도 욥은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누구나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욥과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면 인생의 큰 재난을 만났을 때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운이 없었다, 액땜하는 셈 치자. 어차피 인생은 복불복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인정하면 오히려 고난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다, 사랑하신다’고 하잖아요?
그렇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들을 이해하는 게 더 어려워집니다.
‘왜 다른 사람은 피해 가는 것들을 나만 겪어야 하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잘못했나?’
‘고난을 통해서 나를 연단하신다는 건 알겠지만 왜 하필 나만 연단하시지?’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받아들였다가도 어느 순간 억울하고 비참한 생각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런 것을 반복하다 지쳐서 고난 중에 마음도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23장에서 욥은 어느 정도 상태가 되었냐면, 하나님과 법정에서 시비를 가려보고 싶다고 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싸우다 안되면 최후에 법정으로 가는 거잖아요?
그만큼 욥은 지금 상황이 답답하기만 한 것입니다.
욥은 자녀와 재산과 명성을 잃은 것으로 괴로운 것 만이 아닙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더 큰 상처를 느낍니다.
그러나 성도가 당하는 힘든 현실은 욥처럼 감당할 믿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 변론하지 않으십니다.
8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니 뵈올 수 없구나
하나님을 우리가 대면해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신다고 욥이 고백하죠.
다만 앞을 바라보면 뒤에서 일하시고, 왼쪽에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오른쪽에서 일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알고 나를 위해 일하시지만 내가 예측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작게는 내 삶을 스스로 계획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십 년, 이십 년 길게 보면 신기하게도 우리의 예측대로 된 게 거의 없습니다.
욥도 지금 같은 고난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죠.
13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하나님께 담대한 믿음도 보이고, 간청도 해보고, 죽겠다고 협박도 해보고, 지금은 누가 옳은지 법정에서 가려보자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있다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실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나쁠 것은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때 받고 싶기 때문이죠.
우리가 안달한다고, 측은해 보인다고, 하나님이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지금 일하시는 방법과 시간이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매일을 주님 안에서 계획하며 살아가되 큰 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아직도 욥은 결백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는 욥기가 진짜 사람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맞아. 좀 더 인내하고 기다려 보자’
그렇게 마음을 다 잡았다가도 어느새 다시 원점에서 하나님과 다투고 있는 것이죠.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가 힘들 때 이 말씀으로 많이 위로를 받았고 힘을 내고 그랬습니다.
이 고생이 끝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들을 얻게 될 것이라 생각하면 잠시나마 힘이 나잖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좋아하는 이 10절은 원문과는 좀 달리 의역된 것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이렇게 욥이 당돌하게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나와 함께 길을 가신다. 당신께서는 저를 시험하십시오.
제가 금처럼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시련에 동의한다기 보다는 시험해 보셔도 나는 결백하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죠.
이어서 나오는 11절과 12절에도 여전히 자기 결백을 주장하잖아요?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거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고난에 합의되지 못한 불편한 마음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나님의 뜻에 합의하지 못합니다.
욥이 뒤에 40장에서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야 이렇게 말하죠.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새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모든 일에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나를 위해 하신 일을 깨닫게 되면 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위라클 박위형제가 그랬잖아요?
십자가에서 나와 비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하나님께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내 고난이 별 거 아니라는 게 아니라, 이런 상황도 반드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욥이 시련 중에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있다는 건 우리의 크고 작은 문제 가운데 꼭 배워야 합니다.
욥이 하나님께 법정에 변론하자는 것은 양심에 걸리는 게 없다는 것이죠,
만일 잘못한 게 드러나면 당연히 고치고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양심은 욥처럼 깨끗하지 않기에 내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는 게 두렵죠.
알면 지금처럼 핑계 대고 요리조리 나를 합리화시키지도 못하잖아요?
어려움이 있어도 혹시 내게 뭔가 하나님이 제재하시는 게 있을까 싶어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고난이 길어질까 봐 두렵고, 더 희생을 요구하실까 봐 두렵고, 더 훈련하라고 하실지가 두렵죠.
그렇기에 사람들은 지지부진한 고난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도, 극심한 스트레스와 연단의 삶도 예수님께 끈기있게 나감으로 감당하시길 축복드립니다.
5. 하나님은 간절한 욥의 요구에 왜 응답하지 않으실까요?
우리가 만나는 인생의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육하원칙으로 이해하고 싶죠.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대체 왜?
이렇게 명료하게 알고 싶지만 그게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인생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습니다.
이런 자초지종을 다 안다 해서 고난을 이기는 게 쉬워지진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안다고 해서 안 아프지 않습니다.
고통은 항상 새롭지 절대 익숙해지지 않잖아요?
사실 우리는 문제의 결말을 압니다.
예레미야 29장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 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이 원칙을 갖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뒤 돌아보면 정말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아무리 해도 내 힘으로 안되는 힘든 시기엔 이것저것 다 해 봐도 안됩니다.
힘을 조금 빼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속도를 줄여 따라가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글에서 공감이 되는 내용이 있더군요.
사람은 좋은 상태에서는 그것으로 인해 행복을 못 느낀다는 거예요.
예를들면, 건강할 때는 건강해서 행복하다는 걸 모른다는 것입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그때서야 건강했을 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인간의 아이러니는 행복의 조건들을 열 가지 가져봤자 행복한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일수록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힘들 때 빨리 이겨내려고 너무 나를 채찍질하면 오래 못 견딥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구하고 좀 릴렉스했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욥의 말처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잖아요?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구글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다죠.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나를 위해 앞뒤에서 일하시고 좌우에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기도 버거운 고난 중에도 이 고난의 선물 보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고난이 온 것이지 그냥 우리에게 굴러들어오는 고난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고난도 욥처럼 끝나는 날이 올 것을 믿으시고 항상 예수님의 평안을 잃어버리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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