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욥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 불평 좀 하겠습니다.’
오늘도 힘들게 하루를 버티며 이런 마음을 꾹 참고 살았던 성도님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욥기를 주신 것은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 하소연을 얼마든지 내게 해라’,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1. 욥기는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슨 기준을 갖고 논쟁하는지를 모르면 전체 흐름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걸 먼저 이해하고 욥과 친구들의 논쟁을 잘 따라가야 결론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1) 먼저 오늘 3절을 보면 욥이 여러 달째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열 명의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견고하던 재산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유일하게 남았던 아내는 욥을 버리고 떠났죠.
욥은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을 만나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온몸에 악성 피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긁어도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피부병으로 밤에도 쉬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에 펜타닐 마약 중독에서 기적의 치유를 받았던 자매가 중독 증상 중에 가려움증이 가장 두려웠다고 하더군요.
겉 피부가 가려우면 긁기라도 할텐데 그런 가려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피부 깊숙한 곳에서 마치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기묘하고 미칠듯한 가려움은 정말 견디질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잊어버리려고 다시 마약에 손을 댄다고 하더군요.
2) 이런 욥의 기막힌 소식을 듣고 위로하기 위해서 친구인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찾아옵니다.
친구들은 생전 처음 보는 욥의 참혹한 모습에 기가 막혀 일 주일간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리고 3장부터 욥의 고난에 대한 논쟁이 펼쳐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처럼 지혜롭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답게 화려한 언변으로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말을 보면 마치 잠언 같은 지혜서를 읽는 것 같습니다.
정신없이 읽다 보면 욥의 친구들의 말이 진리 같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말도 욥의 친구 빌닷이 한 말입니다.
8장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우리는 이 부분만 떼어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빌닷이 욥에게 회개를 종용하며 한 말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죄의 댓가이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창대하게 해 주신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친구들의 말이 어느 부분은 맞는 것 같지만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주 단순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3) 세 명의 친구들의 생각은 철저히 인과응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이죠.
네가 잘하면 하나님이 다시 복을 주실 거라는 것입니다.
욥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욥은 천상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 살았던 사람이잖아요?
욥은 자기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 이 환난을 자기 잘못으로 몰고 가는 것은 실은 그들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송곳 같은 말을 합니다.
앞 6장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의 원칙 아래 사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면 내 인생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잖아요?
열심히만 살면 다 잘된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 이러면 인생이 좀 쉽죠.
다른 무언가, 다른 누군가가 내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내 인생에 끼어드는 게 사람들은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정해진 공식대로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평생을 의롭게 살았던 욥이 당하는 고난을 보며 그 사실이 빗나가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죠.
욥도 그걸 두려워했었다고 합니다.
3장25절,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사람들이 승승장구 성공하고 행복할 때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런 불안감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어떻게든 세상은 사람하기에 달렸다,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걸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그렇게 말하죠.
‘모든 종교는 다 똑같아,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잖아.’
그에 비해 욥의 관점은 하나님은 인과응보로만 우리를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욥이 얼마나 의롭게 살았습니까?
그런데도 오늘 21절에서 말하듯 자기 허물과 죄악이 그대로 있다는 걸 알잖아요?
우리의 행위대로 구원하신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욥은 친구들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이죠.
2. 그렇기에 친구들은 감히 그럴 수 없는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 앞에서 터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면 온전하신 하나님의 처사를 비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친구들은 욥의 말을 망언이라며 펄쩍 뛰는 것입니다.
‘이 사람, 이거 큰일나겠구만’
1) 욥이 하나님께 어떤 불평을 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1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욥은 고난 중에도 입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다고 앞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지를 다해서 지킨 것이죠.
지금도 의지를 다해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걷다가 무릎이 탁 꺾이듯이 의지가 무너지고 감정이 울컥 터져 나올 때가 있죠.
욥이 지금 그런 순간입니다.
욥의 고통이 계속 쏟아져 나옵니다.
13절,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절,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종일 시달린 몸과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한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고통으로 시달리는 환난 중에는 편안한 잠이 없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면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워서 밤새 초조한 쪽잠을 자게 되죠.
욥은 꿈으로 놀라고 환상으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또 떠나는 꿈을 꾸었겠죠.
이대로 행려병자처럼 죽어가는 자기의 미래가 꿈에 보였을지 모릅니다.
욥은 거침없이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17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언제 우리가 원했다고 우리를 만드시고, 잘못을 고치겠다 조사하시고 단련하시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불평을 보면 욥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엔 의로운 심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욥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거의 따지는 욥이 된 것이죠.
종교의 하나님이 내 인생에 실존하시는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내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 보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는 극한 고난에서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때는 하나님 밖에 없는 거예요.
그제서야 사람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애걸과 불평과 앙탈과 체념과 맡김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를 겪으며 진정한 부모와 자식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친부모와 자식 간은 이런 것입니다.
욥은 이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이 한순간도 자신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잖아요?
아무리 힘든 시절을 지날 때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섭섭해진다 해도 하나님이 내게 마음을 두고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속 시원히 어디 대답이라도 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분초마다 나를 시험하신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나님의 관심 속에 여전히 내가 있다는 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대답 한마디 못 들었던 우리의 환난 중에 우리는 다 하나님이 없다고 떠났을 것입니다.
2) 욥은 하나님께 이제 나가 죽겠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19절, 주께서 내게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때까지 하시리이까,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21절,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없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사탄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눈꼴시어서 못 봐주겠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죄 좀 짓는다고 그게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될 일이냐는 것입니다.
나 좀 내버려 두시라는 것이죠.
사실 우리는 힘들고 내 처지가 비참해지면 하나님도 귀찮아 집니다.
신앙생활이 다 뭐냐, 나 좀 내 버려 두시라
얼마나 자주 우리가 예수님을 잡았던 손을 놓아 버리는 지 모릅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사람은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억지로 사랑할 때가 더 많잖아요?
속 깊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어떻게 나를 밀어내고 실망시켜도 사랑하는 마음을 내 맘대로 거두지 못합니다.
그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 제발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이젠 내가 죽어 흙에 묻힐 것이니 나를 더 이상 찾지도 못하실 겁니다.
이런 협박을 해도 하나님은 눈길도, 마음도 돌리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하기로 마음 먹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 좀 살게 해 주시지, 나 좀 고쳐주시지, 왜 내 고통을 보고만 계시냐고 욥처럼 반발하실지 모릅니다.
그 문제는 우리가 서둘러 결론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에 대한 이 논쟁은 38장에서 하나님이 등장하시기까지 길게 남았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은 욥의 불평과 탄식에 내 속상한 마음을 담아 예수님 앞에서 좀 울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생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당하는 자녀들의 입을 강제로 틀어 막으시겠습니까?
크고 작은 시련을 당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이렇게 무사히 생존하다 보면 그런 불평은 자연스럽게 점점 줄어들게 되죠.
나중에 욥도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3장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오늘의 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알아서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 눈물과 웃음, 아픔과 행복이 거듭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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