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오늘도 우리의 가정을 위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집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이 조금만 더 잘 살았으면, 우리 부모님이 좀 싸우지 않고 정이 있게 좀 사셨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초등학교4학년 아이들에게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가족’이라고 말한 아이들이 50%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변한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고단한 인생길에서 쉼과 기쁨을 가정에서 누리게 하셨습니다.
괴테는 ‘임금이든 백성이든 자기 가정에서 평화를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조지무어는 ‘인간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찾아서 세상을 방황하다가 결국엔 가정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 라고 했군요.
또 루스는 ‘단란한 가정은 밖에서 보면 견고한 성벽이요, 안에서 보면 훌륭한 보금자리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지혜자들이 이렇게 가정이 이 땅에 있는 것들 중에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통찰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왜 세워져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지난 주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욥의 가정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세워주신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대명사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욥의 가정에도 한 때 위기가 있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만큼 무너진 때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은 욥기의 제일 마지막 장입니다.
고난이 끝난 뒤에 그 가정에 찾아온 축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근심에 눌려 어찌 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이고 축복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생각해 볼 점은 누구에게나 고난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 안에서 잘 살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찾아옵니다.
욥기1장을 보면 욥은 보통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을 다 가졌던 사람입니다.
많은 자산가에 존경받을 인격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의 의인이었습니다.
열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며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욥이 이렇게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완전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집을 세워주셨기 때문이죠.
욥기1장10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욥을 비방하는 사탄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탄이 그동안 얼마나 시기에 가득차서 욥을 집요하게 추적해왔겠습니까?
가만히 보니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고 보호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하는 것에 복을 주셔서 그의 재산이 땅에 넘치는게 아니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의로운 욥을 이렇게 복주시고 아주 만족하고 자랑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욥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 가정을 세워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했던 욥에게 한순간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날라갑니다.
열명의 자식은 한 자리에서 죽고 몸에는 지독한 난치병이 걸립니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남은 아내는 비참한 지경에 빠진 남편을 배신하고 돌아섭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가정에도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만나는 고난에 대한 교과서입니다.
욥기는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고난으로 인한 욥의 충격과 혼란을 통해 우리가 고난에 대처해야 할 메뉴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찾아올 때 욥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여전히 욥을 사랑하며 주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고난은 재앙과 저주가 아닙니다.
욥기를 잘 묵상하며 읽으면 우리가 참 불쌍하게 생각하는 욥의 고난을 통해 욥이 얻은 것은 그동안 그가 가졌던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고난 뒤에 그는 이 세상 것의 두 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대속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욥기의 핵심구절이고 고난의 가장 큰 유익을 알 수 있는 것은 욥기19장25절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놀랍지 않습니까?
고난을 통해 우리가 결국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 구절은 욥기 42장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말로만 듣던 신앙에서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왜 고난이 우리에게 오는 지 정확한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42장의 꽤 긴 성경입니다.
그 안에는 욥의 고난의 원인이 짧고 애매하게 나타납니다.
그 뒤는 졸지에 당한 이 고난에 놀라서 혼란에 빠진 욥과 친구들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격론을 벌이는 내용이 차지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억울함을 주장하는 욥에게 장황하리만치 세상을 창조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하심을 열거하십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한마디로 옳지 못하다고 판정을 내리고 회개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격론을 벌인 주제인 왜 욥에게 이런 고난이 일어났는지,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지, 납득할만한 정답을 말씀해주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에게 힘든 일이 닥치고 가정에 위기가 오는 순간에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파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 이유를 생각하고 고민하면 할수록 욥처럼 점점 하나님과 자신의 믿음에 대해 회의가 들 뿐입니다.
우리가 의인이라고 알고 있던 욥이 나중에 친구들과 격론하다 감정이 고조되어 어떤 지경까지 이르는지 욥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27장2절을 보면 욥이 이렇게 항변합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리라.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며 반항하는 것입니다.
또 욥기10장13절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까지 욥이 불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고 계셨으며, 내가 죄를 짓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고난에 대해 자꾸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인 욥도 자식이 죽고 아내가 떠나고 재산이 다 날라가고 중병이 들어 고통을 당하다보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중한 고난에 눌려 인생이 침몰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냐에 고심하고 그 문제만을 바라본다면 욥처럼 결국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며 더 깊은 고난으로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발생한 고난이라면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세월호 사고처럼 내 잘못이 아님에도 당하는 해석이 안되는 고난이 우리 인생에 더 많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정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이 왔을 때라도 우리에게 천지를 창조하시고 신실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광대하심을 말씀하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이 말씀에서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따스하고 신실하심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비하기까지 하시니 끝까지 믿어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동안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며 궁지에 빠졌을 때 도와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지금 고난의 때를 또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지혜와 인도를 구하면 어떤 고난이든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행히도 욥이 그 모든 고난을 견딘 뒤 오는 축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욥에게 고난이 끝난 뒤 모든 것이 회복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큰 교훈이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고민도 끝나고 갈등도 해결되고 이런 회복의 은혜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먼저 10절에서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욥의 고난이 끝날 때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먼저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나자 드디어 욥의 곤경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난과 중보기도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당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당하는 사람 곁에 하나님은 엉뚱하게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민이 없고 내 인생이 즐거울 때는 다른 사람의 고생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눈에 보여도 그 마음이 헤아려지지도 않고 기도한다해도 형식적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정말 다른 이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고 그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간절히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모든 것이 잘려 나가는 것 같은 아픔과 고난을 느끼고 있다면 나와 내 곁에 있는 이를 위해 기도할 때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기에 친히 고난당하는 사람을 도우신다고 히브리서2장18절에서 말씀합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우리가 고난만 받고 아무 유익이 없다면 그게 뭡니까?
훈련을 했다면 체력이 강해지는 결과가 있어야지 고된 훈련만 하고 결과가 없다면 그 훈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도들의 고난에는 반드시 유익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고생을 시킨다면 그것을 통해 교육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고생자체를 목적으로 고생만 시키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선하신 영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잡신들을 믿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에게 절대 선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변덕스럽고 심보가 뒤틀린 귀신들은 기분 따라 자기를 섬기는 사람들을 농락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최선을 주십니다.
사람이 자기 자식에게 아까워서 안 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없어서 못주면 모를까 아까워서 아껴놓고 안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데 우리에게 주기 아까워하시는 게 있을 것 같습니까?
그게 로마서 8장32절 말씀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이 있고 힘겹게 믿음을 지탱하고 있다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고난도 반드시 끝나는 때가 있고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통해 중보의 기도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높은 위치에 오르면 좀 당당하게 예수님을 믿는 나를 알리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게 고난이 있어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따지고 묻고 하며 신앙이 삶의 중요한 관건이 될 때 입을 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얼마나 아픕니까?
하나님도 홀로 눈물 흘리는 우리를 보면 마음이 아프십니다.
그 귀한 자녀들의 눈물을 헛되이 흘려보내길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고난의 때 흘리는 눈물과 무너지는 아픔이 헛되지 않도록 고난중이라도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영적으로 헐벗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 고난이 보석처럼 값있게 되줄 믿습니다.
모든 고난의 숨은 내막엔 거의 영혼이 구원받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내 고난의 무게를 짊어지기도 버거울 때, 내게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중보기도할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또 고난 뒤에 오는 축복은 배가 된다는 것을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풍족하고 넘치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시고 계십니까?
아이들 자랄 때 한 번 아프고 날 때 마다 자란다는 말이 있죠.
우리에게 소유의 갑절을 주시려면 우리가 먼저 아파야 합니다.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고 목적이 된 사람만이 재물이나 명예나 인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다룰 줄 압니다.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는 기독실업가들을 보면 다 큰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눌 만큼 풍성하지 못하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태만한 삶의 방식이나 엮여있는 환경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유와 성공을 영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부족해서 일 것입니다.
유산을 백억쯤 받았다면 아마도 그거 쓰러 다니느라 주일예배 못 나오실지도 모릅니다.
직장에서 승승장구 승진만 하면 접대골프 핑계로 믿음생활이 나태해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의 나라를 위해 갑절로 받은 것을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 본 사람이 건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오히려 그 몸으로 봉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한 사람은 스포츠나 하러 다니지 실상은 아픈 사람들이 병원 자원봉사도 더 많이 다닙니다.
우리에게 지금 무엇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까?
부르짖어 기도하며 고난을 이겨내고 갑절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길 축원드립니다.
11절에 보면 고난 뒤에 오는 축복이 단지 물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모든 형제와 자매,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욥의 집으로 찾아와 음식을 먹고 욥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특히 재정적으로 절박해지면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을 느낍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제일 먼저 떠납니다.
욥에게 고난이 있을 때 가장 가까운 아내가 먼저 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욥이 고독하게 앉아 병과 싸울 때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끝나면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합니다.
가정이 회복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독하게 혼자 신앙생활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고독하고 외롭게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축복된 삶도 아닙니다.
항상 내 곁에 도와주는 사람과 내가 도울 사람과 멘토와 동역자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많은 것이 복된 삶입니다.
잠언18장1절은 말씀합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가족들이 뿔뿔이 개인주의로 사는 가정보다 틈만 나면 뭉치는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욥의 주변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그들이 욥을 위로하며 돈과 금을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내 곁에 많을 때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모든 소유를 갑절이나 주셨다는 데 어떻게 주셨겠습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금이 쏟아졌겠습니까?
함께 하는 사람들 속에서 도움도 받고 사업도 일으키고 지혜도 얻고 그렇게 모든 소유가 갑절이 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믿음의 형제들 중에 함께 하고 서로가 좋은 것으로 섬기고 도울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욥은 그 말년에 더 복을 받았다고 12절은 기록합니다.
노년에 구차하고 초라하게 늙어가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12절 이후에 기록된 욥의 재산을 보면 억소리가 나옵니다.
양 만 사천마리에 낙타가 육천마리, 소가 천 겨리와 암나귀가 천마리면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무일푼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지금 우리에게 아무 기반이 없고 실력도 없고 기댈 곳이 없다는 것으로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낮추시는 힘든 환경에서 인내하며 겸손하게 고난의 시기를 잘 보내고 마음과 믿음이 연단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준비하신 기업을 누리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16절에 보면 욥이 그 후에 백 사십년을 더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늙어서 나이가 차서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나이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일정한 생명의 연한을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뒤, 환경과 복잡한 삶의 스트레스와 사고와 부실한 건강관리로 수명이 단축되었지 하나님이 왜 인간의 연한을 다 살도록 원치 않으시겠습니까?
정상적으로 장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인간에게 정해주신 연수를 다 채워 살도록 건강을 잘 관리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고 노후대책도 잘 세우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어느 인간에게든 동일하게 부여하신 수를 다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몰염치한 일이 아닙니다.
백세 시대 건강하게 자녀들과 단란한 노년을 보내는 모습이 얼마나 복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겠습니까?
5월 가정의 달, 우리 성도님 가정과 우리 민족에게 모든 고난이 끝이 나고 오늘 욥에게 임한 축복이 충만히 임하시길 소원합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고난을 보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히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위기에 있는 불신 가족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가 더 뭉치고 함께 하며 고독하지 않은 즐겁고 유쾌한 삶을 살되 하나님이 정해주신 모든 연한을 다 채우고 복되게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5.11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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