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욥기23장8절-14절 (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남수연 2018. 11. 23. 16:36

지난주엔 사람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사건이 하나 있었죠.

제주에서 세 살짜리 딸을 이불에 감싼 채 어두운 밤바다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한 한 젊은 엄마의 죽음이었습니다.

죽은 아기가 먼저 바닷가에서 발견되었고 나중에 엄마의 시신도 발견되었죠.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그런 모진 선택을 했는지 너무 불쌍하다, 눈물이 난다이런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들 세대엔 자식 데리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살았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가난하고 절망적인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세상살이가 고단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겠죠.

죽음을 앞 둔 처지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엔 다시 과거부터 시작해 또 한 평생을 살라면 사양하고 싶습니다.

설령 이번엔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출발하라 한다 해도 인생이 별다르겠습니까?

아무리 출발이 좋아도 살다보면 어떤 함정과 재난들이 끼어들지 모르잖아요?

새로운 인생이라 해도 삶은 또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냥 남은 생애나 후회없이 잘 살아갑시다.

오늘 살펴 볼 욥기는 인간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진지하게 캐가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 왜냐고 묻고 싶을 때가 우리도 많잖아요?

이미 많은 고난을 통과했고, 지금도 크고 작은 문제와 근심이 늘 우리를 떠나지 않기에 오늘 말씀이 큰 교훈과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먼저 욥기에 대해 전체적인 것을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에 대해 조금씩이라도 배우며 계속 지식을 늘려가야 합니다.

욥기는 성경 중간에 들어와 있지만 욥이 살았던 시대는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시대 정도로 추정합니다.

욥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죠.

에스겔서에 노아, 다니엘, 욥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교훈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욥기는 언제 누가 기록했을까요?

이 고난을 몸소 겪은 주인공 욥이 살아생전에 기록했다면 간단하겠지만 이 긴 성경을 그때 썼다는 건 타당성이 좀 떨어집니다.

욥의 시대엔 간단한 기록이나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걸 후대에 어떤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문학적으로 완성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사실과 신앙적 창작이 어우러진 성경인 것이죠.

기록자는 모세나 솔로몬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욥기는 이 세상의 고난에 대해 가장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성경입니다.

처음에 욥은 최고의 복된 인생을 누리던 사람으로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화목한 가정, 잘 자란 열 명의 자식들, 부족할 것 없는 재산, 그리고 신앙과 명성.

드라마의 시작이 너무 행복하면 왠지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죠?
욥은 가장 존귀한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가장 비참한 자리로 추락합니다.

모든 재산과 노비들은 도적들에게 약탈당하고, 모여서 잔치를 하던 자식들은 강풍에 집이 무너져 한꺼번에 죽게 됩니다.

몸에는 악창이 생겨 기와조각으로 가려운 상처를 긁어야 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욥을 헌신짝처럼 내 버리고 집을 나갑니다.

그렇게 완벽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는다면 누구나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삶의 토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고난을 만나면 세상이 어제 느꼈던 그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죠.

지난 주 LA총기난사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앞으로 삶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고 말하잖아요?

여기서 왜 이런 고난이 사람들에게 찾아오냐는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며 편안하고 형통하게 살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욥의 소식을 들은 세 친구가 욥을 만나러 달려옵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집니다.

욥은 자기가 이런 험악한 고난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억울함을 주장합니다.

친구들의 입장은 하나님이 무죄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실 리 없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네가 잘못 했을거라는 것이죠.

남의 불행을 볼 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럴 만 해서 그런 일을 당했겠지

토론은 점점 난타전이 되고 인신공격으로 변해갑니다.

본문 23장 첫 부분에서도 욥은 이 고난이 억울함을 계속 호소합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잘못한 게 없는 데 맞으면 반항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욥이 하나님께 반항한다니 왠지 속이 시원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것 같잖아요?

우리도 갑자기 문제가 생길 때 속에서 먼저 튀어 나오는 말이 있거든요.

왜 또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해?
이런 생각이 잠시 들려 하다가 하나님 앞에 원망하게 될까봐 입을 다물죠.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욥기를 주신 것은 고난당하는 우리 마음의 괴로움과 답답함을 이해하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이 대표로 하나님께 따지고, 그 안엔 우리 모두의 억울함과 아픔, 하소연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이해하고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힘들고 속상할 때 욥기를 읽기만 해도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받아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모든 고난은 다 인과응보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이번에 제가 건강검진을 했더니 성적표가 좀 창피합니다.

특히 골다공증과 위장병, 담석, 이런 게 나와서 앞으로 치료하고 관리하는 데 좀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골다공증 같은 경우는 식습관과 운동부족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저는 유제품이 잘 안 맞아서 우유나 치즈 같은 걸 거의 잘 안 먹었거든요.

또 교직생활 때 늘 아침은 빵과 커피로 때웠고, 맵고 짜게 먹는 습관이 위장병을 키웠을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요즘 북한의 리선권 식으로 말하자면 목구멍으로 뭐가 넘어갔냐에 따라 몸이 그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런 것은 인과응보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고난이 다 잘못이 낳은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어떻게 해서 시작됩니까?

사탄이 먼저 욥의 신앙이 순수하지 않다고 딴지를 걸면서 결국 이 엄청난 고통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와 고통은 단순히 행위의 결과만이 아니라 더 복잡한 의미가 있고, 영적인 세계와 통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특히 사탄은 인간의 모든 고난의 배후에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덫에 걸려 넘어지면 인간관계건, 직장생활이건, 신앙상태건 괴롭게 꼬이는 것입니다.

절대로 스스로 시험에 들어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피할 수 있는 것에 넘어지고, 이겨낼 수 있는 것에 지면 삶이 정말 괴로워집니다.

큰 고난만 괴로운 게 아니잖아요?

작은 문제들도 얼마나 우릴 들볶을 수 있는지 아실거예요.

괜히 감정조절 안하고 우울해하거나, 미움에 사로잡히거나, 스스로 낙담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거죠.

말씀대로, 기뻐하고 기도로 힘을 내고 감사한 마음으로 성령충만하게 살아야 우리와 모두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자녀들이 늘 마귀의 위험에 처한 걸 아시지만 그걸 다 없애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오히려 너희가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셨잖아요?

욥에게 악한 일을 했던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욥의 고난과 후에 갑절의 복을 받은 그의 결말을 볼 때 고난의 목적은 오히려 축복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들을 통해 우리에게 개입하시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깊이 있게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모르긴 해도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모든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복되신 의도를 믿고 어려움 중에도 힘을 내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욥의 고난을 통해 어떻게 고난에 대처하는지를 배웁니다.

먼저 욥은 문제의 답을 계속 하나님께로부터 찾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욥이 어떻게든 이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께로부터 들으려고 앞으로 가서 찾고 뒤로 가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 봐도, 속 시원히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없을 때가 많잖아요?
그러나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답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든 하나님 앞에서 답을 구하고 끈질기게 기도한다면 먼저 얻어지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기의 왼쪽에서 일하시고 오른쪽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멀리 떨어져 계시지도 않고, 문제를 이미 아신다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결국 10절에서도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으니 이런 믿음이 드는 것입니다.

이 시련이 끝내 나를 순금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고뇌한 모든 문제는 반드시 우리를 순금처럼 깨끗하고 값어치 있게 바꿔 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본문 뒤에도 여전히 욥은 다시 하나님께 화를 냈다 신뢰했다 갈팡질팡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 전,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만나기 전까지 신앙의 모습입니다.

욥은 정말 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고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정직하고 진실했기에 이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욥이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온전한 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진짜 하나님을 대면한 다음, 스스로 티끌 가운데서 회개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사람들은 다 각자가 자기 양심을 기준해서 잘 살았다고 하죠.

남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구원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앞에서 자기 의가 얼마나 티끌 같은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입을 가리게 되는 것이죠.

신자들에게 오직 의는 그리스도의 의 하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점점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감도, 실망감도 적어집니다.

나와 똑같이 연약한 이 사람들은 단지 사랑하고 이해할 대상이 될 뿐이죠.

그걸 못하고 실패하는 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람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환경의 고통이나 신체의 질병이나 계속 하나님 앞으로 가져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되고 점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믿음으로 발전해 갈 것입니다.

 

또 욥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따랐습니다.

11,12절입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지지 아니 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고 말씀을 경외함으로 따르는 것이 매일의 삶에서, 혹 고난 중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면 믿음보다 현실의 방편으로 해결할 마음이 앞섭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현실적 머리만 돌아가지 마음이 하나님께 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말씀에 비추어 나를 곧추세우고 삶을 재정비하고 믿음의 삶을 충실하게 해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 하겠다 주저앉으면 힘은 더 빠지고 고통은 배가 될 뿐입니다.

그렇잖아도 우리 나이 정도 되면 남아있는 힘으로는 살기가 힘듭니다.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살아야 하거든요.

힘들 때일수록 말씀이 주시는 은혜로 새 힘을 받고, 말씀대로 사는 떳떳함으로 자신감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의 실력이 곧 믿음의 실력이 되는 것을 기억하고 힘들 때일수록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천재과학자 스티븐 호킹박사가 루게릭병으로 평생 고생했잖아요?

그 삶이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그는 자기 병이 신에게 저주받은 질병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우주를 뒤졌지만 결국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을 내고 죽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그렇게 선명하게 보여주신 율법에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았다면 어땠을까요?
떨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교훈의 순결함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욥의 결말과 같은 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욥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찾고 찾았지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그 상대보다 더 커야 그게 가능합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부모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커서 그 생각이 커지면 그때서야 부모가 왜 그렇게 했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훌쩍 넘어 계시기에 아무리 알려고 해도 도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우리의 지혜로운 것보다 낫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면 그것이 내 뜻이 이뤄지는 것보다 복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해 그 작정하신 뜻을 이뤄가실 것입니다.

욥은 이 불같은 시련을 넘어 38장에서 드디어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이 그렇게 궁금해 하던 고난의 문제에 대해 한 말씀도 안 하십니다.

 

그냥 광대한 우주의 기원과 법칙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소나기 같이 쏟아 내십니다.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그리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와 책임감을 피력하십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하나님의 이런 신실함과 책임감을 알게 되면 지금 내게 왜 이러시냐고 따질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게 있구나, 맡기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앞을 가로막아도 결국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시고 뜻을 이루실 것을 믿고 잠잠히 고난의 때를 이겨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혜는 고난 중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각자의 목소리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대로 하면 뭔가 어려운 처지를 벗어날 것 같지만 그렇게 만만했다면 고난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이 내 힘의 원천이기에 고난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욥은 자기 힘을 능가하는 고난에 억울함만 호소했지만 예수님을 만났던 바울사도는 감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도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잖아요?
바울사도처럼 어려운 처지에서도 족한 마음으로 감사할 때 주님은 더 큰 능력을 주셔서 어떤 고난이든 넉넉히 이겨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은 예수님 자신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욥기에도 역시 예수님에 대한 진리들이 담겨있습니다.

무고한 욥의 고난은 사람이 꼭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아님을 가르칩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장차 메시야의 고난을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지를 예언하죠.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를 대속하는 고난을 당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과하며 점점 완전해 집니다.

욥은 이 고난을 통과하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합니다.

욥은 하늘에 자기의 대속자가 있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왔고, 고난을 통해 예수님이 나의 구속자이신 것을 배우고, 고난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욥이 그래서 고난을 통해 얻은 놀라운 축복을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늘 끊이지 않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오늘 말씀을 기억하고 지혜롭게 이겨나갑시다.

모든 고민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십시오.

원망도 사람에게 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께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순종해야 할 말씀을 배워 욥처럼 옳은 길로 행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작정하신 가장 아름다운 뜻을 이루시고 욥에게 주신 것처럼 갑절의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2018년11월11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