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나의 삶을 통해 인생의 고난과 의미를 생각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이 한 고비를 넘고나면 또 다른 고난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참 험난한 여정인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가운데는 한 고비를 넘어 한숨을 돌리는 분도 있고 코 앞에 고난과 마주 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해답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닥칠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 왜입니까?라고 되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경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 말씀 속에 다 기록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통해 직접 말씀해주시면 속이 시원할 텐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에게 직접 계시하시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에 놀라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아담에게 그러하셨듯이 완전한 우리의 자유의지로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 삶 가운데서 숨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페어 플레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려고 덤비지 않으신다는 거죠.
그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하나님은 오늘 고난 가운데 있는 한 여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여인의 삶을 주관하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인생도 꼭 같은 은혜로 인도해주시겠다는 뜻 인줄 믿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짐을 벗기시고 우리를 억누르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각자의 마음에 말씀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인생 속에 갇혀있는 주인공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 주인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입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흔히 보던 이발소 그림 중에 머리가 곱슬하고 흰 옷을 입은 서양아이가 기도하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옆에는 오늘도 무사히라고 써있었죠.
이 기도하는 어린아이가 바로 사무엘을 그린 것입니다.
한나가 인생의 벼랑 끝에 몰려 하나님께 서원하고 기도하여 낳은 아이입니다.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한나는 믿음과 인격이 성숙한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자식을 낳지 못한 상황에도 끝까지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나는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성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본문1절을 보면 남편 엘가나의 족보가 길게 나열되어 있음을 봅니다.
족보가 길게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집안이 명문 집안이란 뜻입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역대상6장에는 그의 족보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의 조상이 야곱의 아들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레위지파 사람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던 선민 이스라엘에서 제사장 가문이면 누구나 인정하고 존중하는 명문 가문이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이 가정이 물질적으로도 부유한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자가 이렇게 시집을 잘 가면 그 당시야 더한 축복이 없는 일이죠.
모두들 한나의 인생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니 그런 여인의 인생에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혼 부부 가운데 7쌍 중 1쌍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통계가 얼마 전 발표 된 걸 보았습니다.
불임율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불임 가정은 한번에 400만원이 넘는 인공시술비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95%가 정신적 고통과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시크릿가든에서 현빈 어머니인 문분홍여사역을 맡았던 탤런트 박0금씨가 시험관 아기 시술을 12번이나 했는데도 실패했던 사실을 TV프로그램에서 밝혔습니다.
시술이 실패할 때 마다 매번 똑같은 고통과 눈물을 쏟으며 매달렸으나 모두 다 실패하고 결국 가정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노0연씨 역시 두 번의 시험관 아기를 시도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12번의 인공시술은 12번 출산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불임으로 힘든 결혼 생활을 하다 시댁으로부터 이혼을 당했습니다.
자신의 결함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시댁을 나왔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그 집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반 지하 방 한칸을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 년이 채 안되어 남편은 재혼을 했고 얼마 후 두 부부가 아이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더 큰 상처를 받고 괴로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한나가 처한 고통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이가 없자 결국 남편은 후처를 들이게 됩니다.
엘가나의 인품으로 보아 처음부터 두 아내를 맞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후처인 브닌나가 들어오자 마자 떡하니 자식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연이어 여러 자식을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브닌나는 때만 되면 자식들을 앞세워 아이 못 낫는 한나를 격동시키고 괴롭게 합니다.
후처와 그녀의 아이들이 한 집안에서 뛰어 다닐 때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녀의 인생은 하루 하루가 가시밭 길을 걷는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의 정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여기까지가 우리가 괴로워하는 문제의 정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나의 인생이 끝나면 안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여기까지 보고 인생을 좌절하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인생을 끝까지 보라고 오늘 이 말씀을 주신 줄 믿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혼 당한 분은 그 아픔으로 교회를 나오게 되었고 아이를 셋이나 둔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 또한 인생이 결말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정점에서 한나가 취한 행동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해답이 그렇듯이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주셨다고 기록 된 성경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한나 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 통곡하며 간절한 기도를 쏟아 붓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이고 어떤 기도가 응답을 받느냐는 것이 우리의 관심일 것입니다.
아무렴 한나가 그동안 아이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이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도 했다 투정도 했다 원망도 했다 긴 세월 부르짖던 한나의 기도가 드디어 바로 오늘 응답받는 기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것은 만일 나의 고통을 돌아보아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기도입니다.
자식을 얻었지만 그걸 하나님께 드리면 한나에게 남는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한나는 그런 남는 거 없는 기도를 했을까요?
서원기도에 대해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합니다.
내가 구하는 어떤 것을 주시면 어떤 댓가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협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나가 했던 서원기도의 의미는 다릅니다.
기도하는 이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권리도 당연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서원기도는 내가 기도하고 있는 이 문제의 권리를 하나님께 양도하겠다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럼 내게 남는 건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나를 향한 사랑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 맛으로도 나는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이런 진정한 서원기도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나의 기도가 단지 나의 구하는 것을 무조건 달라는 게 아님을 보게 됩니다.
이미 한나는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인생의 주권자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무엘2장7절에 한나는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합니다.
본장의 18절에 보면 한나는 기도를 마치고 난 후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가 있는 기도는 그 결과에 상관 없이 우리 마음의 근심을 거두고 평강을 주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라는 집착이 있으면 하나님은 응답을 보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해결에 집착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 집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가장 빠른 문제 해결이고 앞으로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문제들은 우리 인생의 완전한 해답이 아닙니다.
신앙의 의미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나를 맞춰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를 위한 가장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비로서 한나의 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비로서 하나님은 준비했던 것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고 서원했던 대로 젖을 뗀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성소에 올라가 엘리 제사장에게 아이를 맡깁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릿한 어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내려올 때 어머니 한나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예상이 틀렸습니다.
사무엘2장 1절을 보니 아이를 두고 내려올 때 한나가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뜻밖에도 한나의 기도에 터질 듯한 기쁨과 구원의 감격이 충만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을 허용하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의 목적이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절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니 아들을 다시 드려도 좋다는 것이죠.
살아계신 전능하신 창조주께 아이의 일생을 맡기니 내가 맡는 것 보다 더 축복 된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드린 사무엘 대신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희 학교 선생님이 아들을 군대 보낸 다음날 새벽기도를 하러 일어났는 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앞을 가리고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울며 울며 교회를 갔다고 합니다.
기역자로 꺽여 있는 교회 복도를 딱 돌아서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다. 네가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은 여기까지고 이 모퉁이를 도는 이제부터 내가 책임지겠다.
그 음성을 들은 순간 추스릴 수 없이 아프던 마음이 갑자기 평안해지며 아들에 대한 모든 염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이후 다시는 눈물도 나오지 않더랍니다.
기도하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님은 고난 당하는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함께 있어주십니다.
비록 우리의 실패와 실수로 인한 것일지라도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움켜 쥔 문제들과 내 인생을 내 맘대로 고집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한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오늘 한나가 드린 진정한 기도에 이르기 까지 우리에게 기도의 씨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드디어 내 인생의 운전대를 마음놓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빠지실 때가 없으십니다.
어느날 제가 기도 중에 문득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어린 시절 살던 허름한 방에 제가 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을 모르던 때였죠.
그런데 놀랍게도 어린 시절 그 장소 위에 지금 느끼는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러 있다는 걸 느끼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자녀가 되지 않았던 그 옛날부터 나를 알고 계셨고 인생의 고비마다 함께 하시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감사의 눈물이 절로 났습니다.
시편22장10절에 기록된 대로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다는 고백을 저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견디기 힘들고 막막하고 걱정 가운데 있으십니까?
우리의 평범한 날에도 이렇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어려움으로 허덕이는 우리에게 왜 가까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가슴에 확 와 닿는 책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수잔 렌즈키스가 쓴 가시에 묻은 꿀을 핥아 먹는 것 같은 인생입니다.
작가는 웃음이나 눈물이 어떠한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든지 모두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통해 이해하자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지나온 우리 인생의 절망적인 한 부분을 잘라서 생각하면 얼마나 암담했던 시간들입니까?
그런데 그 부분을 조금 더 길게 보니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오늘 이 자리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설마 나 같은 별 볼일 없는 인간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알고나 계실까?
내 문제 같은 것에 주님이 관심을 가지고나 계실까 생각합니다.
이거 겸손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는 아주 염려스런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증거가 십자가 아닙니까?
심판 당할 내 대신 아들을 심판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자청해서 십자가에 오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자식을 죽음에서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자청해서 거기에 못박히겠습니까?
삶이 팍팍하고 하나님이 멀리 있다 생각될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께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나와 같이 마음을 쏟아 놓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이 축복으로 변하는 기적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멘.
오늘 한나의 인생에 고난이 온 이유를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5절과 6절은 거듭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고난의 책임을 뒤집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 한나에게 불임의 고통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한나의 태를 닫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아들 사무엘의 출생이 구속사적인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된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는 선민들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이 극도로 혼란한 암흑기였습니다.
사사기21장 25절은 이렇게 그 시대를 평가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왕좌에서 내버리고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행동했으니 얼마나 사회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울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록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이 타락했다 해도 메시야를 보내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닫혀있는 한나의 태와 같이 인간의 모든 조건으로 구원이 불가능하다해도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을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소와 하나님을 업신여긴 제사장 엘리와 극악한 그의 아들들을 버리시고 이스라엘을 지도할 새 제사장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사무엘2장 35절에 선지자를 보내 엘리 제사장에게 예언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이 제사장이 바로 오늘 한나가 낳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을 보내신 궁극적 이유는 다윗 왕에게 기름을 부어 영원한 왕조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조가 지금 영원합니까?
이 말씀은 이중적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세우실 충실한 제사장은 바로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서 영원히 행하시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 다
한나의 임신에는 인류에게 메시야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태를 열어 사무엘을 낳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다윗 왕에게 기름 부어 왕조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닫힌 태와 같은 인생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믿음으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려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필사적인 붙드심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위기가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팽팽한 긴장의 줄을 슬그머니 놓고 싶을 때도 주님은 밧줄로 우리 몸을 주님께 묶어서라도 끌고 가심을 믿습니다.
혹시 우리 앞에 태의 문이 닫히듯 앞 길이 닫혀있을 때에도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준비하신 길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을 믿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 어머니의 기도를 배우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주님의 일군을 세우실 때 많은 경우 기도의 어머니를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어떤 자식이라도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다면 망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의 기도가 감싸고 있는 한 이 땅에서의 어떤 악의 세력도 침몰하여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지난22일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 강진이 발생하여 큰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건물 잔해를 들어내고 구조작업을 하던 중 한 여성이 건물 더미에 깔려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엄마의 몸을 들어내니 그 안에 아기가 살아 있었습니다.
엄마의 온 몸으로 감싸 안고 있던 아기는 작은 상처만 입고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자식을 보호하고 죽어가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사랑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식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보좌가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그가 오늘 본문에서 서원한 대로 젖을 떼자 어린 사무엘에게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입혀 성소로 데려갑니다.
해마다 한 번씩 사무엘의 자라는 몸 치수에 맞춰 에봇을 새로 장만하여 성소에 올라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위해 한 일이 에봇을 지어다 준 일 뿐이었겠습니까?
한나는 실로에 가서 사무엘을 보고 돌아와 일년 뒤 다시 아들을 보러 갈 때 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사무엘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제사장이며 정치적 지도자로 추앙받던 사무엘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7장에 보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기록합니다.
누가 나만큼 간절한 심정으로 내 자식을 위해 기도해 주겠습니까?
내 기도가 없는 데 내 자식이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홀로 싸우며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서대문 영천시장은 콩나물장사가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콩나물 통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나가는 길에 교회에 들려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어머니의 인생 목표는 아들을 믿음으로 키워 하나님의 일군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을 훌륭히 키워 큰 제약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을 키워 낸 것이 어머니의 새벽 기도임을 잊지 않으려고 회사의 심벌마크를 종으로 정했습니다.
종근당 제약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한나의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많은 줄로 믿습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것은 저 앞에 있는 축복을 향해 나가는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것은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께 먼저 집착하라고 하십니다.
날마다 드리는 평범한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돈을 남겨주기 보다 기도를 남겨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돈은 우리 자식들에게 복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아이들의 장래를 맡기고 쌓아둔 기도는 오늘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나를 위해 쓰임받는 귀한 삶으로 우리 아이들을 인도할 것입니다.
곧 우리의 손을 떠나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자식들을 내가 움켜쥐고 있지 마시고 하나님께 맡기시고 오직 기도로 자녀들의 앞길을 준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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