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 기독교에 관련 된 안타까운 사건 사고 소식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청주의 한 교회 성지순례 중 발생한 테러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작년 말엔 중국에서 탈북자 사역을 하던 김정0선교사가 북한에 들어갔다 억류되었습니다.
얼마 전 북한에서 기자회견을 했었죠.
자신이 반국가범죄행위를 했다고 시인하고 사죄하는 내용이었지만 그 분의 진심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며칠 전 체코에서 서울과기대 김효0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송파구에 있는 개척 1년 된 교회에서 떠난 성지순례 길이었습니다.
성지순례를 마치고 자동차를 빌려 한반도통일염원에 대한 동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도로변에 주차된 트럭을 들이받은 사고였습니다.
김양은 뇌를 크게 다쳐 의식이 없이 프라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려면 4천만원의 치료비와 후송비 등이 1억원 정도 들어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며칠 전 대한항공과 각처의 도움으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갔던 개척교회 목사님이 카드빚을 내서 2천5백만원을 보탰다고 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다 믿음의 선한 동기로 시작했지만 결과가 너무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들을 하고 일을 진행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될 때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 지 누가 시원한 답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국 모두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영원히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처음 읽으신 분들은 마치 하나님만 믿고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3만4천명이나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까지 적군에게 뺏겼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물론 이 전쟁의 패배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선한 일을 하다 고난당한 사건들과는 다릅니다.
이런 역사서에 기록된 일들은 사건 하나만 봐서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앞 뒤 연결 된 사실들을 알아야 제대로 이유와 교훈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죽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두 차례의 전쟁으로 3만4천명의 이스라엘백성들이 죽었고, 언약궤를 메고 나간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제사장이 죽었습니다.
본문에 뒤 이어서 사망자가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두 아들이 죽고 법궤를 뺏겼다는 말을 듣고 엘리제사장이 충격을 받고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오늘 사건은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징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엘리제사장 가문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고 이것을 읽는 모든 성도를 향한 경고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을 깨달음과 은혜 가운데 인도해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오늘 벌어진 전투에 대해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전투가 상식적으로 볼 때 일어날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라는 나라와 전투를 하고 있죠.
블레셋은 현재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의 숙적이죠.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블레셋은 막강한 철기문명을 가진 강국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철기문명을 막기 위해 철공을 다 잡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철로 된 낫이나 칼을 고치려면 블레셋에 가서 고쳐 와야 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 나라에 전쟁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이 블레셋의 침공을 무서워했고 약탈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이 당당하게 블레셋과 맞붙어 싸우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시대가 역사적으로 볼 때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의 시대에서 가까운 것으로 추론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이 죽으며 삼천명 이상의 블레셋 방백과 귀족들을 죽인 사건이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죠.
아마도 전력이 약화된 틈에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여전히 강했습니다.
그들은 터무니없이 전세를 오판했던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예고 된 심판이 성취된 배경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방식이고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모든 일들과 상충되지 않게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대적한 블레셋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위협하는 블레셋이란 세력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젠 별 탈 없이 잘 굴러가는 것 같은 일상도, 직장일도, 건강도 자신할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거미줄 같은 사소한 문제에도 걸려 넘어지는 것이 변변치 못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세상과 마귀의 세력에 비할 때 우린 형편없는 약자들입니다.
우리 주변엔 언제고 블레셋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본문의 사건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는 엘리제사장 집안과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먼저 엘리제사장 집안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린 엘리제사장은 영적으로 어둡고 비둔한 사람이었습니다.
앞 3장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하나님께서 엘리제사장에게 말씀도 이상도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고 지도해야 할 제사장이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영적지도자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항상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깊이 깊이 묵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며 간절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저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고 성도님들도 성경을 읽으실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사사기시대 성경을 읽으면 어두움과 영적무지가 이스라엘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 느껴져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없을 때 우리 삶도 어둡습니다.
소경처럼 더듬으며 혼미하게 살아가는 것이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설령 내일 일을 모른다 해도 여전히 담대하고 용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확실한 미래는 보이지 않아도 확실한 하나님의 인도는 보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죄는 자신이 이런 어두운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제사장으로서 마땅한 행실을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두 아들의 방종한 삶이 앞 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이들은 아예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매일 언약궤 앞에서 제물을 드리고 회막에서 살다시피 해도 하나님을 모를 수가 있다는 것에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실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문제는 두 번째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성소에서 오만방자한 특권의식만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누구도 남보다 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에게 허락된 고기라는 명목으로 제물을 삶을 때 갈고리를 가져와 찔러 걸리는 대로 가져 갔다고 합니다.
고기를 구워 먹겠다고 제사도 드리기 전에 먼저 원하는 부위를 잘라가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회막에서 시종을 들던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엘리제사장의 죄는 아들들이 저주를 자초하는 이런 심각한 죄악을 보고도 뿌리 뽑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길 엘리제사장이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겨 하나님의 예물과 제물을 밟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지적하십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면 자식이 망합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40년 만에 심판의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2장30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은 눈멀고 귀먼 목석 우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행위에 대해 결코 용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정성으로 예배하고 영광을 올릴 때 하나님도 우리를 자녀로 존중히 대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신실하고 복 받을 예배자가 되고 우리 자녀들을 이런 예배자가 되도록 키우시길 축원드립니다.
결국 엘리와 그 불량한 두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사무엘에 의해 예고되었고 오늘 본문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실력도 안되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과감하게 전투를 벌이게 된 역사적인 배경, 하필 전쟁터로 언약궤를 가져오자는 기상천외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 언약궤가 오는 곳에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동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가 전쟁터에 나오지 않았다면 홉니와 비느하스도 회막에 머물러 있었고 죽지는 않았겠죠.
하나님께서 인간사 가운데서 뜻을 이루시는 신비하고 오묘함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선택하고 그 결과로 모든 일이 전개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정반대의 계획을 이루기도 하신다는 것이죠.
죄에 대한 심판 뿐 아니라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A를 원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B로 인도하길 원하실 때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원하는 데로 선택합니다.
절대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 가는 데도 결과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고난을 자초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아내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삶이 몰라보게 정리되고 규모있게 바뀌고 실패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패전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제사장들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죄에 편승한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오늘 전투로 법궤를 모셨던 실로라는 성읍도 파괴되었습니다.
실로는 광야에서 이동식 천막 안에 있던 법궤를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처음 모셨던 곳입니다.
여호수아가 에브라임지파라서 에브라임 경지 내에 있는 실로로 법궤를 모신 것 같습니다.
오늘 이스라엘백성이 왜 심판을 받았는지는 다른 성경이 정확하게 밝힙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푸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시편78편에 오늘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고 반항하여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며 그들의 조상들 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나가서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 주시며 그의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우상숭배와 거짓된 행위로 빗나간 삶을 살며 하나님께 반항했던 그들을 하나님이 크게 미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실로의 장막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언약궤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셨는 데 누가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지켜주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가정,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민족, 너무나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려고 차라리 자신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고 대적의 손에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징계할 때 얼마나 비장하신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대적에게 넘겨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니 당연히 들어주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체면도 있으니 내가 잘되는 게 하나님도 좋지않냐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식을 징계하고 바로 잡을 때 자신의 영광도 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목숨도 버리셨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입장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게 본심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오늘 법궤가 포로가 되어 블레셋으로 끌려가지만 다음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우상을 치시고 재앙을 내리신 뒤 스스로 이스라엘로 돌아오십니다.
본문에서 제사장을 징계하고 또 이스라엘백성들을 징계하신 이 사건의 관련성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 잘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부르실 때 기대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만 제사장인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복 받는 모습을 통해 다른 나라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장차 이 민족을 통해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시고 이 복음을 통해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땅의 모든 풍성한 복을 누리되 거룩한 제사장의 삶은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멸망당한 가나안 부족보다 더 심각하게 부패했다고 하나님은 질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를 심고 예수님을 전하고 그들로 함께 복을 받게 하라는 것이죠.
이것을 베드로사도가 베드로전서2장 9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런 삶을 살지 못할 때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풍성한 은혜도 메마르게 됩니다.
흘려보낼 곳이 없으니 공급하실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이 사명을 힘써 감당하라고 이렇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의 선한 행실로 악행 하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에게서 본성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든 행위는 죄라고 보면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변화 받지 못한 것은 외형은 구별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분명히 죄의 본성이 만들어낸 죄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기득권을 주장하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고 왕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악행하는 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범죄자가 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기억하고 우리에게도 적용하길 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등한시하고 세속에 빠져 죄의 본성대로 산다면 자연스런 환경을 통해, 사람을 통해, 몸과 마음의 건강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징계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우리의 삶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열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가진 것이 사소하고 작다고 하나님을 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악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작은 능력, 미미한 영향력일지라도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제사장 같은 삶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우리 삶도 안정되고 행복하고 만족과 보람도 넘치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언뜻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이 모든 일의 중심에 하나님을 둔 사람들 처럼 꽤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이미 4천명이 죽었는데도 언약궤를 가져와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언약궤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미 전세가 기울고 4천명이나 죽은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접전을 벌이겠습니까?
이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가짜 믿음에 자신들도 속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스스로가 속고 있는 거짓 확신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작년 청소년성령캠프에 참가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 정도만이 구원 확신이 확실하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캠프에 참가할 정도라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일 텐데 절반 정도만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인의 70%가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정말 미국인의 70%가 바른 믿음을 갖고 있고 천국에 갈거라고 믿어지십니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거짓 확신을 갖고 있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해주실 거라 확신했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인격자가 아닌 종교주의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번번이 제가 말씀드리지만 기독교를 세상의 종교와 같은 차원에서 믿는 것은 심각한 재앙이고 화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근본이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고 통치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본질 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본성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이 본성이 타락한 뒤에도 남아서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를 찾는 행위의 결과로 생긴 것이 종교입니다.
물론 순수하게 창조주를 섬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번영과 안위를 보장 받으려는 이기적인 목적입니다.
이런 종교주의적인 믿음이 오늘 이스라엘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전쟁터에 돼지머리 놓고 고사지내는 것처럼 언약궤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수많은 우상신과 하나님을 비슷하게 알았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던 여호와하나님을 모셔왔지만, 내일 가뭄이 들면 농경의 신인 바알을 찾아가 빌었을 거라는 것이죠.
종교주의와 참된 믿음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수종드느냐, 하나님이 내게 수종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누가 내 인생의 주체냐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라면 그 결과도 다릅니다.
내 실제적인 삶이 믿는 대상 때문에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근심할 수밖에 없는 데 하나님이 근심하지 말라니까 근심하지 못하는거죠.
분노해야 하는 데 용서하라고 하시니 내 감정을 누그러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단지 감정적인 확신이 믿음이 아닙니다.
감정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문제 앞에서 우리는 흔들릴 것입니다.
단순히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직 믿음이 아닙니다.
내 행동으로 내가 믿는 것을 입증하는 것까지 되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하며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믿음입니까?
내가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까지 있어야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마음에 평안도 주시고 확신도 주시고 기도도 응답해주시지만 우리의 의지와 행위로 믿음을 확증하고 또 성장토록 훈련해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시련을 이기고 요동치 않는 안정된 삶을 사는 실제적인 능력이고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많이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참 문제도 많고, 하루 하루 해결할 일도 버거운 데 과연 믿음이 얼마나 이 문제 속에서 힘이 될까?
마음의 짐과 감당하기 힘든 번민이 있을 때 믿음이 도움이 되고 있을까?
블레셋과의 전투는 매일 우리 삶에서 벌어집니다.
우리 믿음을 시험하고, 누려야 할 좋은 것들을 망가뜨리고, 가정을 집어 삼키려고 몰려오는 악의 세력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기지 못하면 본문처럼 참패하고 엄청난 심리적, 물리적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확실한 내세의 구원만이 아닌 현실의 어려움과 환난도 능히 감당하고 뛰어넘는 능력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사자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곧 만날 예수님을 생각하며 머리를 가다듬으며 천사의 얼굴들을 했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록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손양원목사님 같은 분의 이야기도 압니다.
믿음은 분명히 환경과 현실과 나 자신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아버지께서 승리케 하실 것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에 제가 참 마음이 기쁘고 좋아서 밤 잠을 못 이룬 날이 있습니다.
번민으로 잠을 못이루고 서성인 날들은 있지만 좋아서 잠이 잘 안오는 날 도 있습니다.
특별히 좋은 일,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아버지께서 마음에 평강과 기쁨을 가득 부어주시는 데 정말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이런 은혜와 힘을 주시기에 어떤 환경이든 이기며 좋은 결말을 보기까지 인내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더 굳게 신뢰하며 이런 평강과 자족하는 마음과 행복감이 매일 성도님들의 삶에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얼굴에 가득한 수심이 사라지고 힘든 형편들을 강하게 이겨낼 수 있을 텐데..
제 기도 제목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마음의 위로와 평안만 주시겠습니까?
문제도 해결해 주셔야죠.
어떤 기독교TV에서 설교하시던 미국 목사님이 자신에게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시더군요.
가난하던 시절 아주 낡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지붕에서 비가 새는 것이었습니다.
지붕수리비가 2천만원 정도 드니 손을 댈 수가 없어서 임시로 때우고 사는 데 비만 오면 항상 불안하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주택 보험금을 좀 타게 해주세요.
그게 천재지변을 대비해 들어놓은 보험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는 데 한 달 뒤, 태풍이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붕이 날라간 거예요.
보험회사에서 찾아와 조사를 하는 데 하는 말이 동네에서 이 집이 제일 낡은 집인 데 희한하게 태풍이 이 집 지붕 위를 통과했군요 하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형편을 아시고 도와주실 방법도 얼마든지 있으십니다.
기도하시고 기대하시고 평안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도 생활이 어려워서 하나님께 이렇게 원망어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돈 없는 게 어떤 기분인지나 아십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찍 죽은 집안에서 최소 여섯 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삼십년을 사셨습니다.
인생의 초라함과 가난과 매일의 염려를 왜 모르시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로 시작합니다.
본문이 징계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의 복선입니다.
이스라엘과 엘리제사장 가문의 타락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무엘선지자를 세워 다시 이 백성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천국의 아름다운 유업을 받기까지 지도하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에 백성들을 모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때 여지없이 블레셋이 쳐들어오지만 하나님이 우레를 보내셔서 진멸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모두 거룩하고 참된 예배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신 왕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나의 지경에서 잘 감당하길 축복드립니다.
또 종교주의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따를 때 우리를 위협하는 블레셋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물리치실 줄 믿습니다.
2014.3.9 주일예배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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