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이후에도 최근 잇달아 들려오는 우리 사회의 황당한 사건, 사고 소식들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윤일병 사망사고나 김해 여고생 사망사건, 포천 시신유기사건 같은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악행을 볼 때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 건지 막막해집니다.
더 이상 국가가 안전망이 되주지 못한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대대적인 회개와 각성운동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 국가적인 어려움을 벗어나야 할 때인 것을 느낍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주 한나의 기도를 통해 출생한 사무엘선지자가 이스라엘백성들의 영적각성을 주도하여 숙적인 블레셋을 이긴 내용입니다.
우리를 둘러 싼 블레셋이 지금 내 주변에 있지 않습니까?
언제 나를 급습할지 모르는 대적 블레셋의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구하라,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말씀했는 데 너희가 구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 행복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블레셋이 와서 다 뺏어가는 것이죠.
건강도, 재산도, 마음의 평안도, 원수 블레셋이 그냥 남겨두질 않습니다.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 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에도 미스바의 회개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도움 받고 원수 블레셋을 이기는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환경이 우리를 겹겹이 우겨 싸고 헤쳐나갈 길이 막막할 때, 우리가 항상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백성들이 블레셋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의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 앞 서 있었던 사건을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무엘 전 엘리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군사력과 병기에서 열세에 몰렸던 이스라엘은 삼천명이 죽는 패배를 당한 뒤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나가면 하나님이 전쟁을 승리하게 해주실 거라는 발상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곧 잘 써먹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걸고 무언가를 하면 더 잘 들어주지 않으시겠냐는 재빠른 계산을 우리가 늘 하는 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약궤가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지만 승리는 커녕 사만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궤는 블레셋에 뺏기는 치욕스런 패배를 당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궤를 탈취해 간 블레셋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결국 블레셋 연합군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 접경지역으로 돌려보낸 것이 본문 앞 부분의 내용입니다.
1절에 보니 하나님의 언약궤는 그 뒤 20여년을 블레셋 접경지대인 기럇여아림이란 곳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나라의 중심부에 두지 않고 여전히 변방에 두었다는 것은 당시 약소국 이스라엘의 처지를 말해줍니다.
블레셋의 국경지역에 있는 언약궤를 옮겨오는 것이 블레셋을 자극할 까 무서워 20년 동안 숨을 죽이고 살았다는 것이죠.
본문에서 부터 30여년이 더 지나서야 다윗왕이 이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갑니다.
그 때 삼 만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동원했던 것을 보면 왜 지금까지 법궤가 변방에 모셔있는 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법궤조차 마음대로 옮겨올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눈치보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곤고합니까?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땅의 종교문화를 받아들이고 활개치고 살려던 이스라엘은 되려 블레셋의 눈치나 살피는 종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세상 재미를 좀 누려보려고 한다면 세상권세를 잡은 사탄과 노예 계약을 맺어야 합니다.
요즘 자꾸 눈치볼 일이 생기고 자유가 없고 여러가지에 속박이 되는 것 같다면 참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런 중에 2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궤를 사모했다고 합니다.
번역이 썩 잘 된 것 같지 않은 귀절입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오히려 문맥이 잘 맞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뒤에서 울부짖었다는 것입니다.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상황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블레셋의 압제로 인해 무진장 고통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공포는 물론이고 농사만 지으면 다 털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이 아닌 뒤에서 처지를 한탄하며 애통해 했다는 것이죠.
제대로 하나님께 돌아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3절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마음만 동요했지, 아직 안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모든 비극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모든 우상신을 제거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현재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시험과 고난을 만났을 때, 이 말씀은 언제든 적용됩니다.
특히 삶에 어려운 시기엔 해결할 일들이 많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집니다.
평소에도 하나님을 잘 잊어버리지만 어느새 하나님을 잊고 혼자 일을 처리하려고 허둥댈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블레셋이란 인생의 모든 대적에게서 건져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는 것을 평생에 잘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좀 벗어나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겠습니까?
앞 서 언약궤를 뺏긴 그 전투도 블레셋의 마수에서 좀 벗어나 보려고 싸운 것입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해보고 여기 저기 기웃대며 내 인생에 답을 좀 찾아보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공허뿐입니다.
세상에서 이거다 싶은 것을 찾으셨다면, 곧 신물이 나거나 쓰디 쓴 배신의 잔을 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뒤에서 처지를 애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을 때 가장 행복하고 인생의 매듭도 술술 풀린 것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상을 다 제거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우상에 대해 타협의 여지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했을 때 근본적으로 세상의 신을 따르지 않겠다는 마음의 작정들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 크고 작은 우상들을 계속 거둬내며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닉하고 놓치못하는 세속의 우상들이 결국 우리 인생에 블레셋을 불러들이고 험난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빨리 가나안 우상종교 문화를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보면 현대판 우상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영적인 우상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우상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만든 신입니다.
인간의 모든 우상종교들의 출발은 내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명백하게 밝히십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지었느니라.
우리는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 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아버지시고 우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마땅히 섬기는 것이죠.그럴 때 우리 모든 영육이 가장 완벽한 안정과 행복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종교적인 활동이면 우상숭배나 똑같습니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과 우상종교는 딱 맞아 떨어집니다.
가나안의 우상종교에는 영적 호기심을 채워 줄 미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을 보고, 이단에 빠지고, 신비주의에 열광하는 것이 이런 종류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관심하다 어쩌다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되면 본성상 여기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미신들이 주는 영계의 신비한 맛을 주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통해 깨닫고 인격과 행동으로 책임감을 갖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골로새서 3장 5절은 말씀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자기 부패한 죄의 본성을 따라 세상의 재미를 탐닉하고, 점점 세상적인 재미와 세상의 성공을 탐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광야에서 거룩하신 하나님만 섬기던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의 우상종교를 만나니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았겠습니까?
웬 제사에 성적 쾌락이 있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재미가 있고, 신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는 것이죠.
게다가 가나안의 신이 풍요의 신이잖습니까?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는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아야 하는 데 거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욕심껏 복을 빌기만 하면 됩니다.
인간 탐욕에 맞아 떨어진 것이죠.
우리에게 우상이 없는 것 같으십니까?아닙니다.
다니엘서에서 느브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준 내용을 아실 것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꿈에 크고 두려운 한 우상을 보았는 데 한 돌이 나와서 우상을 머리부터 발까지 부서뜨려 세상에서 날려버리고 우상을 친 돌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을 꾸었죠.
세상이 거대한 우상이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 박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구속사적인 예언입니다.
우리가 몸 담은 이 세속이 거대한 우상의 몸통입니다.
여기서 태어난 우리는 이미 깊이 우상숭배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애착을 갖고 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 예수님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걸 버리고 예수님의 손을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내 돈을 다 버려야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게 쉽겠냐는 것입니다.
건강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면요?
내 직장을 놓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면요?
내 취미생활을 놓고 경건생활을 해야 한다면요?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 이것을 버리라면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다 우상입니다.
그런데 이걸 다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라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 많은 우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쥐어줄 때 비로소 지금 잡은 것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할 수 있는 세상의 우상은 우리가 발견한 신앙의 보물만큼 조금씩 조금씩 버리는 것입니다.
주일의 달콤한 늦잠과 등산과 조기축구의 행복 보다 예배가 주는 만족과 값어치를 알기에 주일성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얘기로 잡담하며 보내는 시간보다 말씀을 보며 QT하는 맛을 알게 되면 그걸 버리고 이걸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버리기보다 먼저 영적인 보물을 늘려가야 그다음 버려지는 것입니다.
세속보다 더 깊은 맛을 주는 신앙의 기쁨을 캐내기 위해서는 신앙에 집중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삶이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닌 데 어떻게 영적인 삶이 저절로 이뤄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칙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신앙에 집중한다는 것은 열정에 끌려 저절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집중은 뇌의 작용으로 우리가 의지를 다해 조절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신앙에 몰두해 실천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자꾸 내가 죽은 뒤에 만나게 될 다음 세계인 천국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창조하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해 자꾸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이천년 동안 예언되어왔고,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시고 이 땅의 흙을 밟고 삼십삼년을 사시고, 하나님으로 능력과 이적을 베푸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러실 필요가 도무지 없으신 데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뒤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시고 그들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
이렇게 성경의 중요한 사건들을 자꾸 생각하며 신앙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그리고 애써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가야 합니다.
영적인 깊이와 가치를 아는 만큼, 집착하는 세속의 우상도 죄의 탐욕도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갈등하게 하시는 것만큼 버리면 됩니다.
버릴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혹은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우상이 있다면, 쥐고 있는 영적인 재산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말고 따르라면 그것은 우상종교입니다.
세속과 죄를 버리란 말은 없고 복받고 평강을 누리라고 한다면 그게 이치에 맞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졌다면 안심보다는 좀 불편함을 느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말씀대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게 명백한 사실인 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평안과 안심만을 준다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믿음으로 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데도 버리지 못하는 우상은 반드시 우리를 믿음에서 끌어내리고, 호된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버리지 못해서 우리를 자꾸 갈등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까짓 게 뭐 그리 중하다고, 믿음의 본질도 아닌 데.
이렇게 생각하며 끼고 도는 그것이 실은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인 죄의 근원에 뿌리박고 있는 거대한 우상일 수 있습니다.
다행히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성경의 대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가 봉변을 당하고 죽음을 맞은 많은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 블레셋에 시달리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더해져 다행히도 그들이 사무엘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고 바른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오늘 하나님의 긍휼과 깨우쳐주심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버려야 할 죄와 우상들을 버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블레셋의 수렁에서 반드시 건져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이스라엘은 공동체적인 회개와 각성운동을 벌였습니다.
사무엘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다 미스바에 모아대대적인 부흥집회를 엽니다.
개인적으로 결단했으면 됐지 왜 그들을 다 한 자리에 모은 것일까요?
개인의 회개와 신앙각성만으로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죄에 대한 후회로 끝나거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버리기 쉽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젠 믿음생활을 좀 잘해보려고 생각했다가도 얼마 안되서 다시 무기력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권장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끈질긴 죄의 본성과 유혹하는 세력들을 아시기에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다 함께 가야 개인도 교회도 국가와 민족도 유리합니다.
사회에 범죄가 만연하고, 부패가 도를 넘어서는 중에서 개인이나 교회가 거룩하고 성결한 믿음을 갖는 게 어렵습니다.
정말 참담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윤일병 사망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윤일병은 착한 기독청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성다대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교회에서 항상 밝게 신앙생활을 해왔고 대학에서도 과대표를 했던 착실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윤일병이 악랄한 사회 소집단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믿음이 좋아도, 내가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해도, 악의 화신에 둘러싸이면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범죄로 가득한 세상에 있다면 안전하지 못합니다.
공산권에서 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무너지는 데 속수무책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고요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세상 정치가와 권세들을 위해 기도해라.
누군가 이번 사건을 보고 하나님이 계셨다면 도대체 윤일병을 위해 무엇을 하셨냐, 이걸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없다라고 했더군요.
하나님이 윤일병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윤일병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붙들어 주셨고 주님을 바라보며 견디다 주님 품에 안겼다고 믿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숨죽이고 우는 수많은 폭력 피해자들이 죽음의 절망에서 벗어났고, 장차 피해자가 될 많은 힘없는 청년들도 구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더 이상 악이 우리 삶의 터전을 집어 삼키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서로의 가정이 세워지길 기도하고 세상의 악을 대적하고 정의로운 삶의 질서를 확장해 가야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모든 구성원이 믿음으로 결속되어야 밖에서 밀려드는 악의 오염수를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얼마안가 다시 세속문화와 죄의 유혹과 의지의 박약으로 무너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교회적인 결속을 다지게 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조용히 기둥 뒤에 숨어 주일예배를 드리고 일찍 돌아가서 자유시간을 갖는 신앙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왔는지 갔는지 표시 안나는 큰 교회를 선호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개별적인 신앙이 건강한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신앙생활이 건전하게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성도들끼리 봉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오죽 잘 아셔서 이런 문제투성이임에도 교회를 세우셨겠습니까?성도들이 손과 발과 오장 육부와 세포로 얽힌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알고 함께 할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건강하고 사랑이 넘치는 주님의 몸이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긴급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블레셋이 대각성운동을 벌이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몰려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우리를 많이 당혹하게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돌아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잘 믿으려고 하는 데, 블레셋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세력 자체를 박멸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블레셋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던 중 사태가 더 심각해 지는 것 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블레셋이란 존재 자체가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주시는 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경험적으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이론으로 깨닫고, 생각으로 믿는 것들은 경험을 통해서만 진짜 살아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경험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블레셋이란 공포가 내게 다가올 때, 비로서 내가 진짜 의지하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전투가 있어야 승리도 있습니다.
블레셋을 통해 우리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점점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블레셋이 애당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예 블레셋이 없기를 바라지만 문제가 생기고 해결되는 크고 작은 과정들로 우리 인생이 꾸려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더욱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블레셋이 포위할 때 우리는 주저없이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늘 사무엘은 블레셋이 포위망을 좁혀 올 때 젖 먹는 어린 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의지해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모든 과정에 성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응답하시는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번엔 우레를 통해 블레셋을 진영을 무력화시키셨습니다.
이 싸움의 결과를 보면 하나님께는 블레셋의 침공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에 없었던 대승을 거둡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해서 벧갈이란 곳 까지 점령했다고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스스로도 놀라는 것이죠.
그런 간증들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기념비를 세우며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입니다.
여기가 어느 지점입니까?
미스바에서 한참 떨어진 블레셋의 진영이 있던 곳입니다.
얼떨결에 추격전을 벌이고 보니 어느새 블레셋의 영토까지 쳐들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또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은 하나님의 도움이 이것으로 다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내일 또 거기까지 도와주실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무엘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손으로 막으셔서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14절을 보십시오.
블레셋에게 뺏겼던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이 다 찾아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돌아가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과 화평하십시오.
모든 어려운 일마다 기도로 우리 주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한 것 이상으로까지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들끓던 수많은 문제들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강과 축복이 우리를 따라올 것입니다.
2014.8.10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사무엘상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사무엘하19장31절-39절) (0) | 2016.01.05 |
---|---|
오벧에돔 (사무엘하6장1절-15절) (0) | 2015.11.18 |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1장9절-20절) (0) | 2014.08.05 |
언약궤를 빼앗기다 (사무엘상4장1절-11절) (0) | 2014.03.13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사무엘상17장34절-49절) (0) | 2013.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