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마치 한 억울한 죽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법궤를 운반하던 한 사람이 법궤가 떨어지지 않게 붙들었다 하나님의 진노로 즉사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뭔가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위기 상황에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는 웃사는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고 단지 법궤를 석달 동안 보관했던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을까요?
이런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죽었나보다 이렇게 넘어가면 안되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리가 없는데 왜 웃사를 죽이셨지?’
‘내게 웃사와 같은 잘못된 점은 없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며 말씀을 이해하고 우리 언행이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사건의 진상을 여러모로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알고 우리는 웃사가 아닌 오벧에돔과 같이 복을 받는 신앙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사건의 역사적인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제작된 성막과 법궤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셔서 백성 가운데 거하셨던 장소입니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속죄제물의 피를 이 법궤 위에 흘려야만 백성들의 죄를 속죄받을 수 있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과 구원의 신성한 의미가 담겨있었고 실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안전하게 정착한 뒤 성막과 법궤도 기브온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가나안 땅의 타락한 문화에 빠졌고 결국 주변국과의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도 못한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이겨보겠다고 다시 법궤를 메고 나갑니다.
법궤를 부적처럼 쓰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런 전투를 하나님이 도와주실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대패하고 법궤마저 블레셋에게 뺏깁니다.
법궤를 탈취한 블레셋은 의기충천하지만 법궤로 인한 전염병의 큰 재앙을 받게 됩니다.
결국 블레셋은 이 두려운 법궤를 무인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돌아온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어 70여년을 지내왔습니다.
희한한 것은 그동안 이 법궤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신앙의 행위들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규례도, 하나님도 다 잊은 것이죠.
오늘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비로서 이 법궤를 왕궁으로 모셔올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선 이 법궤 이송식을 기획한 다윗왕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왕이 죽고 막 왕좌에 오른 다윗왕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 국민들을 신앙적으로 결속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킬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법궤를 옮겨오게 됩니다.
그런데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던 중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입니다.
법궤 운송식의 축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비명과 공포의 현장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축제분위기에 하나님은 완전 찬물을 끼얹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웃사 만큼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다윗왕입니다.
등극초기에 신앙의 힘을 빌려 백성들을 결집시킬 큰일을 기획했는데 완전히 역풍을 맞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의 등극을 저주하는 것처럼 되버린 것이죠.
다윗은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진노에 어쩔 줄을 모르고 분이 일어나 법궤 운반을 포기하고 황급히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무려 삼만명의 군사와 수많은 군중을 동원한 큰 행사였는데 완전 실패로 끝난 것이죠.
다윗의 선한 의도를 하나님이 막으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은 웃사의 입장입니다.
웃사는 누가 봐도 가장 억울한 사람입니다.
떨어지려는 법궤를 붙든 죄 밖에 없는 데 하나님의 진노로 즉사했습니다.
웃사는 할아버지인 아비나답 때부터 집에 하나님의 궤를 모시고 있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집에 법궤가 있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모태신앙이죠.
웃사의 눈에 70년 이상 집에 놓여있는 법궤는 거의 골동품에 가까운 종교적 기념물일 뿐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궤에서는 사람을 홀리는 어떤 신비한 징조나 광채도 없었습니다.
그런 것 없이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겠다 하셨으면 거기 계신 것입니다.
웃사에게 이런 평범한 법궤는 그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는 과거 언젠가 기적을 일으켰다던 성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한 실재적인 믿음이 되지 않으면 신앙은 화석화 된 종교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왕조가 세워지며 퇴물처럼 이 집안에 모셔있던 법궤가 다윗성으로 옮겨가게 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던 변방마을에 엄청난 인원이 몰려들어 법궤이송과 함께 축제의 퍼레이드가 벌어졌습니다.
웃사는 운송의 책임자가 되어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주악에 맞춰 장엄하게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갑자기 소가 무엇에 걸린듯 주춤거리는 바람에 궤가 움직였습니다.
웃사는 궤가 떨어질까봐 손을 내밀어 궤를 붙들었는데 그만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 장소를 베레스웃사라고 불렀다고 본문에 나와 있죠.
‘웃사가 찢겼다’ 그런 뜻입니다.
웃사는 왜 찢겨져 죽임을 당했을까요?
법궤는 인근에 있던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인근에 살던 오벧에돔은 대규모의 축제가 한 순간 공포로 바뀌며 졸지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궤를 얼떨결에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궤가 들어온 뒤 복을 받기 시작하는 데 삼개월만에 왕궁에 까지 소문이 날만큼 그의 가족들과 소유에 엄청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언더우드선교상을 받은 권영수선교사님이 필리핀에 학교를 세웠는데 정말 신기하게 학생들이 어떤 대회든 나가기만 하면 1등상을 받아오는 바람에 필리핀에서 아주 명문학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우리의 상황과 현실을 초월하게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에 이런 큰 복을 내려주신 것일까요?
본문을 기록한 역사가는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저는 왜 오벳에돔이 복을 받았을지를 곰곰이 묵상하다 TV프로를 하나 보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프로입니다.
우연히 그 프로의 뒷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이 프로에서는 출연자들 중에 음치와 실력자가 섞여서 립씽크로 노래를 합니다.
그 중에서 음치와 실력자를 가려내고 선택한 최후의 한 명이 마지막 무대에서 초대가수와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때로 진짜 실력자를 맞춰서 감동의 무대를 만들기도 하고, 음치를 잘못 선택해서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그날 가수가 인순이씨 였는데, 노래는 거위의 꿈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실력자일 것이라고 선택한 청년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인순이씨는 얼음이 되었고 장내는 경악했습니다.
그 청년은 방송사상 전무후무한 음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프로에 나온 것은 아버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2년 전에 청년이 아버지께 간이식수술을 해 드렸다더군요.
배에 큰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데 직업이 트레이너인 청년이 이로인해 여러가지 불편함이 많았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볼 때 마다 마음 아파하는 아버지께 자신이 당당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마음을 위로해 드리려고 나오게 되었다는 거예요.
음치들이 노래하는 걸 들으면 죄송하지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청년이 음정을 다 틀려가며 목청껏 노래하는데 장내가 완전 웃음바다가 되고 다들 포복절도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막 웃으면서 다들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인순이씨는 음치에 휘말려 자기도 음을 잊어버렸다고 할 지경이었는데 무대를 마치고 수백번도 더 부른 거위의 꿈 중에서 오늘 부른 노래가 가장 아름다운 거위의 꿈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걸 보면서 느낀거예요.
사람들은 다 진실을 원하고 있고 진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우리가 다 거짓되잖아요. 그래도 진실을 원한다는 거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초대형 집회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 진실 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오벧에돔이었습니다.
오벧에돔의 진심에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우연히 머물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여기 교회에 온 것도 우연이 아닌데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들어간 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자신의 의지대로 이리저리 운반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아비나답의 집에 묻혀 사람들에게 잊혀져있는 하나님의 궤와 거룩한 이름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경외했던 사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단지 삼개월 알았다고 절대 복 받을 만큼 사람은 갑자기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에는 차별이 없지만 하나님의 복은 받을만한 심령만큼 차별적으로 주십니다.
이후의 오벧에돔의 삶을 보면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 분명합니다.
다윗왕은 그날 양떼를 좇던 들판에서 자신을 불러내어 왕복을 입혀주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적이 시급할 때 사람이 진실하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무리와 왕 앞에서 우쭐한 마음으로 법궤의 인도자 행세를 하던 웃사에게 하나님께 대한 진실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 진실하기가 어렵죠.
웃사가 법궤에 손을 댄 것은 법궤에 붙은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을 두렵게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신앙생활 할 때는 강대상이 있는 강단에는 어려워서 올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예배와 관련된 모든 성구들을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기에 삼갔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거룩하신 자신을 죄인으로부터 구별하십니다.
죄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접촉되었다가는 오늘 웃사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막기구들의 이동에 대해 분명하게 명시를 해 놓으셨습니다.
반드시 고핫자손들이 법궤를 채에 꿰어 어깨에 메라고 하셨습니다.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편의를 위해 수레에 싣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만지지는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민4:15)
하나님은 이런 법도들을 분명히 기록해서 하나님의 언약궤 곁에 두고 지키라고 까지 분부를 하셨습니다.
이 두렵고 신성한 법궤를 모시는 직책을 맡았던 웃사는 그 직무에 대한 규례에 아무 관심이 없고, 무지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죄입니다.
몰라서 망합니다.
저의 해석이 웃사를 두 번 죽이는 것은 아니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 무지했던 웃사와 다윗이 자신의 생각대로 했다가 만난 엄청난 결과를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하지 않고 매일 죄성대로 행동해서 얻어지는 죄의 열매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대로 행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길은 즐겁고 평탄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따를 길이 대단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알려주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법궤를 운반하는 방법을 이미 성경으로 기록해 놓으셨잖아요.
우리가 매일 주님을 따르는 방법도 성경에 분명히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주님과 의논하며 성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발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곳에 안전하게 놓이게 됩니다.
오늘 다윗처럼 뭔가 급하게 붙잡으려 하고 서둘러 결정하려는 일은 자꾸 한 발 물러서서 오히려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안달하고 집착하며 성급하게 진행하는 일은 대개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관철시킬 때 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다윗이 그렇기에 법궤를 인도할 방법을 신중하게 연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자기의 목적에 신앙이란 명분을 이용하려는 것이나, 웃사가 의전을 주관하며 우쭐거리는 것에 하나님은 이용당하지 않으십니다.
냅다 깨버리시죠.
죄가 그 사람을 파멸시킬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마도 이 계획에서 이대로 성공했다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판단과 생각대로 신앙과 정치를 끌고 나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다윗은 세상나라를 세웠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충실하게 따르지 않는 신앙은 자기 의도대로 될 때는 교만해지고 의도가 꺽일 때는 낙망해서 포기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열망으로 불이 붙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불타는 분노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났습니다.
그렇게도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도 이랬으니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사건을 거리를 두고 관망해 보십시오.
한 사람 오벧에돔만이 이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국가적인 축제 속에서 법궤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법궤가 들어갔다고 그 집이 복을 받은 게 아닙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70년을 있었지만 복을 받았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벧에돔처럼 진심이 깃든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셔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심이고 진실하신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진실할까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가혹한 고통을 당하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진실되셨습니까?
오늘 다윗과 웃사처럼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진실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하나님이 아낌없이 복을 부어주신 그 진실된 오벧에돔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에서 큰 부자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인생을 즐기며 호의호식하며 잘 살았을까요?
역대상16장38절은 이렇게 오벧에돔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다윗이) 오벧에돔과 그 형제 육십팔 인을.. 문지기를 삼았고
그가 받은 복을 다 뒤로 하고 하나님의 궤를 따라가 문지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사람인데, 하나님이 주신 복을 호사스럽게 누리며 살아가는 게 싫기야 했겠습니까?
그러나 법궤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교제의 기쁨이 그것에 비할 수 없기에 온 가족들을 다 이끌고 하나님의 궤를 따라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다는 것이 하찮은 일처럼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는 게 영광입니다.
한달에 오천원이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후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안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위해 하는 일을 하나님은 결코 작게 보지 않으십니다.
성경 역대상26장에는 문지기가 된 오벧에돔과 자손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잖아요.
고라사람들의 문지기 반들은 이러하니라 오벧에돔의 아들들 맏아들 스마야와 둘째 여호사밧과 세째 요아와 네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오벧에돔이 성전의 문을 지키게 된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가족이 잘되고 그의 소유가 복을 받았던 것보다 더 진짜 복은 바로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법궤를 따라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따라는 삶이 진짜 복이라는 것이죠.
이들이 그저 무지하고 무능해서 문이나 지키러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벧에돔의 자손들에 대해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라
그 아들과 형제들이 다 능력이 있고 직무를 잘하는 유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먹고살기도 힘들고, 자식키우고 노후대비하기도 바쁜데 무슨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것저것을 손해보며 사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처럼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섬기기로 결심하셨다면 성경에 기록된 그의 자손들처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이름을 우리와 우리 자식들도 남기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오벧에돔이란 가족의 이름은 이로부터 이백년 후 역대하 25장을 끝으로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그 가문이 200년을 성전에서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5장은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침공하고 성전을 약탈한 내용입니다.
또 하나님의 전 안에 오벧에돔의 지키는 모든 금은과 기명과 왕궁의 재물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유다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르며 더 이상 성전을 찾지 않을 때도 오벧에돔은 성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침략자가 쳐들어와 모두가 도망쳤을 때 오벧에돔은 끝까지 홀로 남아 성전의 기명들을 지켰습니다.
역사가는 그 사실을 기록해 오늘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청년의 진실에 눈물이 난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오벧에돔의 진실에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도 웃사를 죽이신 하나님의 처사가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웃사의 죽음에만 못마땅한 눈총을 하나님께 보내지만 그 날 죽을 사람들이 웃사 뿐이었습니까?
그날 모인 사람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다 모태 죄인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던 다윗조차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속셈에 넘어갈 만큼 그 질기고 모진 인간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다 심판을 받아 영원히 죽을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해서 살 수 있는 죄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은 신약시대라고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이렇게 예배로 대면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속죄의 보혈이 심판의 법궤 위에 부어졌고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과 성령을 속인 죄로 웃사와 마찬가지로 죽었던 사실은 하나님의 거룩 앞에 우리가 경외심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신약시대에도 똑같이 보여줍니다.
웃사의 죽음을 보고 비로서 다윗과 이스라엘은 파멸의 길에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자체에 목적이 아니라 죄인들이 돌이켜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2절부터 나오는 2차 법궤운반식에서 1차와 달라진 어떤 점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까?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궤를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게 했습니다.
역대하15장에서 다윗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다윗은 하나님은 규례대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 것이죠.
또 3만명의 군사를 거느렸던 장군 다윗은 이번엔 베 에봇을 입은 신앙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웅장하고 장엄했던 악기 연주는 다윗과 백성들의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는 진심어린 예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 웃사가 죽음으로서 일어난 축복의 변화입니다.
‘웃사’라는 이름의 뜻은 ‘고집, 힘, 강함’ 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한 우리의 고집과 내 능력과 오만이 ‘웃사’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안에 웃사들을 얼마나 의지하고 자랑합니까?
그래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리의 웃사들이 죽어 나갔습니까?
웃사가 죽었을 때 슬퍼하고 분노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차피 웃사는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들입니다.
오히려 웃사가 죽은 것은 우리를 겸손히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영과 교만과 이기적 욕망들을 돌이키도록 우리 안에 웃사를 치셨기에 우리가 오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날마다 웃사는 죽고 복된 오벧에돔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15년11월8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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