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버이 날을 맞아 부모 되신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큰 위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원합니다.
우리 세대의 부모님은 먹고사는 데 지쳐 자식 재롱도 모르고 사셨습니다.
모든 게 궁핍했던 시대에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은 사랑스럽기 전에 무거운 책임으로 느껴지셨겠죠.
우리세대는 그런 부모님들께 사랑한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기억이 안 나더군요.
그 때는 말로 사랑한 게 아니라 땀과 수고로 했던 것 같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고 보니 어느덧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단 한분도 곁에 살아계시지 않다는 게, 세월이 참 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래도 어머니께 그렇게 불효한 편은 아닌데도 문득 문득 못 해드린 것들이 떠올라 ‘엄마, 미안해요’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부모라는 게 어려서는 큰 나무 같이 의지할 만하지만 연로해지면 대개는 자식들에게 큰 짐이 되는 게 솔직한 실정입니다.
아직 노부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을 무겁게 지고 있는 성도님들께 오늘 말씀이 격려가 되고, 우리 젊은 세대들은 앞으로 부모님들께 더욱 순종하고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다윗의 생애에 있었던 일화 중 하나입니다.
다윗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설교로 들었지만 다윗의 효성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의 각별한 효성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에 달에 맞게 오늘은 본문 중에서 다윗의 집안과 효심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정해졌지만 아직 사울왕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면적이 강원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도망 다녀봤자 금새 사울왕 귀에 들어가니 다윗의 도피생활이 한 곳에 길게 눌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해 아예 이스라엘의 원수나라 블레셋으로 넘어갔다 신분이 들통 나 간신히 아둘람 굴로 도망해 온 상황입니다.
아둘람은 예루살렘에서 한 4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곳은 석회석 지형이 녹아 크고 작은 굴이 많은 곳입니다.
현재 이 아둘람에서 발견 된 동굴 중에는 최대 칠 백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큰 동굴도 있습니다.
입구만 가리면 천연 요새가 되는 이 아둘람 동굴에 다윗이 은신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와 사백여 명이나 모였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니 환난 당한 사람들, 빚진 사람들,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업하다 부도난 사람들, 정착할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들, 억울하게 도망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나마 다윗에게 붙어 어떻게 좀 살아 볼까 모인 사람들이죠.
다윗의 도피생활에 전혀 도움이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움은커녕 먹이고 돌봐야 할 다윗의 짐만 더 늘어났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자기의 백성을 갖게 된 셈인데 하나님이 정해주신 왕의 통치의 시작치고는 좀 초라하고 구구해 보입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읽어보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 해도 그것이 이뤄지기까지 과정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대박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7,80년대 우리나라 경제가 급성장하며 돈이 돌고 부동산 신화가 일어났습니다.
짐가방 하나 들고 서울역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이길 마치 오늘 다윗에게 모여들 듯 했었죠.
도시에 인구가 늘어나며 교회도 커졌습니다.
사회전반에 퍼진 한탕주의와 급성장주의가 교회 안에도 밀려와 오늘날처럼 겉은 비대한데 영혼은 빈약한 한국교회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든 준비 된 만큼 순차적으로 책임과 권세도 주어져야 그게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인생 좀 살아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젊어서 잡은 재물이 복이 안된다고들 합니다.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한가하게 장기두시는 노인 분들 중에 젊을 때 잘나갔다하지 않는 분들 있나 찾아보십시오.
성경도 말씀하죠.
잠언 20장 2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단숨에 왕으로 임명받은 사울왕과 고난을 통해 왕으로 준비된 다윗왕의 일대기는 이 사실을 극명하게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한 숟가락씩 먹지 않으면 체하는 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아무리 소화력이 왕성한 초코도 간식을 꿀꺽 삼키면 토하더군요.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자신도 삼십년을 가난한 목수로 사셨던 것을 우리는 잊지 말고 조급한 마음이 들 때 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과 인격을 겸손하게 연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1절을 보니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 중에는 부모와 형제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점점 미쳐가는 사울왕에게서 생명의 위기감을 느낀 가족들이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글쎄요. 이럴 때 가족이란 게 어떨까요?
가장 가까운 것 같고 내가 잘 안될 때 힘이 될 것 같지만 정말 힘들 때는 가족이 뭉쳐있는 게 더 큰 짐인 경우도 많습니다.
다윗 같은 상황이라면 형들에게 부모를 맡겨서 돌려보낸다고 뭐라 할 사람없습니다.
은신처가 발각되면 당장에라도 도망쳐야 할 처지에 노부모까지 모신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한 일이죠.
아무리 부모 형편이 힘들다고 다 돌봐드립니까?
각자 형편을 핑계대고 노부모를 팽개치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 가정의 달을 맞아 희귀병을 앓고 있는 자식들을 돌보는 부모들 이야기가 TV에 방영되더군요.
고통을 당하는 어린 자식들 곁에서 눈물로 지새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재산을 다 팔아가면서도 자식이 살아있기만 바라며 곁을 지키는 부모의 모습은 정말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온전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인들 그런 정성 없이 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노년을 보내고 투병하는 부모를 달게 돌봐드리는 자식들은 흔치 않습니다.
도망자의 신세에 거동조차 힘들게 뻔한 노부모를 받아들이는 다윗의 효성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다윗은 가정에서 대접받고 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남자 신데렐라가 있다면 다윗이 그렇습니다.
사람들 집안사를 들여다보면 형제 간 부모 간 갈등 없는 집이 거의 없는 것 같더군요.
다윗의 집안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셉이 늦둥이로 야곱의 편애를 받고 자란 것과 반대로 다윗은 막내라 역차별을 받고 자랐습니다.
부모도 죄인이라 자식을 둘 이상 두면 대개 더 이쁜 자식이 있다더군요.
그런데 사람들 자랄 때 얘기하는 거 보면 혜택 받았다는 사람보다 차별당하고 자랐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큰 애들은 본능적으로 사랑이 동생에게 가는 걸 느껴서 상처받고, 작은 애들은 부모들이 그걸 감추려고 큰 애, 큰 애하는 걸 보고 동생이라 차별받았다고 생각하며 자랍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에 보면 다 그로 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다윗이 과거에 사무엘에게 사울의 뒤를 이을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던 날 어땠습니까?
사무엘이 아버지 이새에게 아들을 다 데려와 줄 세우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일곱 형들만 부르고 다윗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혼자 벌판에서 양떼들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막내에 대한 기대감도 없었고 애정도 각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애정이 있다면 비록 어리다 할지라도 축복이라도 좀 받게 하려고 사무엘 앞에 꾸역꾸역 데리고 나오는 게 부모 마음일 것입니다.
형제들은 또 어땠습니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날, 그 전쟁터에 간 이유가 거기 싸우러 나간 세 명의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오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갔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아버지 이새가 그 위험한 전쟁터에 이번엔 가장 어린 다윗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린 동생이 이렇게 전쟁터까지 음식을 갖고 찾아왔으면 형들이 고마워하고 동생의 신변을 걱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형이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그래도 읽는 게 실감납니다.
큰 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먼 길을 찾아온 동생을 이렇게 못되게 몰아붙이며 나무라는 형이 또 있겠습니까?
다윗이 집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자랐는지 알 수 있죠?
그런 형제와 부모가 오늘 다윗에게 목숨을 보호 받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사람이 받은 상처가 그렇게 빨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족들이라고 주고받은 비수 같은 말이 물을 벤 것처럼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베인 상처는 아주 오래 감정으로 기억되고, 무의식에까지 영원히 남습니다.
다윗이 아무리 호인이라도 어릴 때 당한 차별이 아무렇지도 않았겠습니까?
시편 27장에서 다윗은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부모의 마음에서 소외당하고 버려졌다는 게 섭섭했다는 것이고, 그걸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절대 우리 속을 풀어주지 못합니다.
그게 그 사람들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무의식까지 치유되려면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오늘 다윗이 그런 갈등의 관계를 넘어 형제들과 부모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영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와 악을 용서해주신 초월적인 사랑을 믿게 되면 용서고 상처고 뭐고 중요치 않아집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밖에서 가면을 쓰고 힘겹게 살다 집에 오면 피곤한 가면을 벗어 던집니다.
집에서까지 가면을 쓰고 있으면 그건 큰 병입니다.
체면과 교양과 평판을 생각해서 한껏 가려놓았던 본성들과 깊이 뿌리박힌 가족사의 아픔들이 집에 들어오면 불쑥 불쑥 튀어나오죠.
그래서 가족은 사랑도 주고 위로도 주고 상처도 주고 분노도 줍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용서를 배우고 사랑을 연습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아무에게도 받을 수 없는 용서를 가족이니까 기대하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받을 수 없는 사랑을 가족에게 서로 받으며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을 이유는 다윗만큼 많습니다.
어릴 때 상처받았고, 차별받았고, 신체 멀쩡한 형들이 일곱이나 있고, 도망자 신세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니 모시지 못할 이유가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그런데 다윗은 부모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더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이웃나라 모압왕을 찾아갑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이 모압왕을 찾아가 하나님이 다음 길을 인도하실 때 까지 부모님을 안전하게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연로하신 노부모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쉬운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모압에 부모님을 맡긴 것은 그만큼 다윗의 현실이 위험했다는 것이고 부모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을 말해줍니다.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모두에게 다 있을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든 짐을 주신다면 감당할 능력도 주시고 방법도 열어 주십니다.
모압왕이 선뜻 다윗의 부모를 맡아주지 않습니까?
다윗왕과 모압왕의 신뢰감도 참 놀랍죠.
어찌 생각하면 모압은 다윗왕에게는 외가와 같은 곳입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룻이 모압여인입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모압은 다윗에게 증조모의 고국인 셈이죠.
꼭 그런 관계로 모압이 다윗의 부모를 맡아 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돋보이는 것은 다윗은 누구나의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왕 같이 철천지 원수를 삼자고 달려들지 않는 한 다윗은 누구와도 화평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을 돕기 위해 나중에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보면 방방곡곡, 출신도 다양하게 찾아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너그럽고 겸손한 인격 때문입니다.
사람이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선 서로 경계하지만 상대가 겸손하고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면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엽니다.
겸손한 사람 곁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부모님을 모압 땅에 맡기고 다시 요새로 돌아가 4백명의 난민들을 돌봤습니다.
다윗의 일대기에서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이 사건을 특별히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백성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은 억울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골육지친을 챙기는 다윗의 사람 됨됨이를 주목해 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짐을 주시고, 문제를 주시고, 직장을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다음 것을 받을 자격이 있나 주목해서 보십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자격을 인정받았고, 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까지 약속 받았습니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끌어안는 다윗의 모습은 죄와 사망에 고통당하는 온 인류를 품에 안으신 참 목자 그리스도를 예표할만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의 이런 모습에서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죠.
불안에 떨고 있는 부모님의 안위를 모압왕에게 의탁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에 육신의 모친인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도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그 분들이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직 신앙이 없는 부모님의 경우 노인들은 완고해서 믿음 갖기가 힘듭니다.
우리의 진심어린 효심만이 부모님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힘이 없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때로 우리 곁에 두시고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난민 사백명을 보내셨다면 그들을 건사할 능력도 주십니다.
노부모를 내게 맡기셨다면 반드시 감당할 힘도 주십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내놓은 통계에 보면 60세 이상 된 사람 중에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은 5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자식 키우며 먹고 살기에 급급해 노후대비를 전혀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 되고 이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은 이런 위기의 부모들을 위해 계명을 주시고 우리의 축복까지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만 아니고 자식들도 효도하게 잘 키워야 합니다.
부모 섬김도 어려서부터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식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는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우리교회의 다음세대들도 육신의 부모님을 잘 공경하시길 바랍니다.
자식에게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좋은 데 부모에 대한 효심은 부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한 다윗은 그 이전에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순종하고 공경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하실지를 알기까지 부모를 맡아 달라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십년이 넘는 도피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의 온 정신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시편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고백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과정 중엔 광야도 있고 아둘람 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의 눈을 고정할 때 충분히 이기고 견딜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자를 하나님은 반드시 인도해주십니다.
5절에 드디어 선지자 갓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음 걸음을 지시해주십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변방으로 피신해 있지 말고 이스라엘 땅 안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좀 더 멀리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은 다윗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사울왕의 영토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던 명령이지만 다윗의 소원과는 달랐습니다.
사백명의 난민들을 이끌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는 게 절대 좋은 작전 같아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나마 안전했던 요새를 떠나 즉시 유다 땅을 향해 떠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내 생각과 다를 때에도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반드시 행동의 순종으로 나타나야 진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그 속을 꿰뚫어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이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음이 없으니 행동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찌나 교묘하게 변조시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지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부모에게 드릴 생활비와 헌금을 둘 다 내놓기가 싫어서 만든 율법조항이 고르반입니다.
헌금을 바치느라고 부모님 생활비를 못 드린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롱하고 부모도 공경하지 않는 가식적인 종교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온갖 가식으로 치장하고 믿음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해 선언하셨습니다.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겠느냐
오늘 본문에서 다윗에게 몰려든 오합지졸들을 볼 때 이들의 미래는 잘해야 조선시대 활빈당 정도나 될까 말까한 형편입니다.
지금 시작한 작은 일이나 그간의 내 삶의 초라한 성적표라도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홀대했던 노부모부터 형제들과 구구한 난민에 이르기까지 다윗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너무 맘에 드는 일들만 좋아하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만 곁에 두고 좀 귀찮은 사람들에겐 곁을 주지 않고 사는 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오늘 다윗에게 몰려온 사백명의 난민들이 먼저 모인 다음, 그 다음에야 비로서 이름난 용사들이 다윗에게 몰려와 육백명의 용맹한 건국충신들이 됩니다.
남들이야 도와주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지, 한없이 도와줘도 고마운 내색도 없는 가족들을 돌보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부모를 모시는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뤄주십니다.
그 일을 믿음과 사랑으로 해 낼 때 우리에게도 좋은 일, 건강하고 아름다운 생애로 인도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몇 년 전 인간극장에서 시영이라는 아기와 엄마의 이야기가 방영되었습니다.
늦게 아기를 갖게 된 엄마 은영씨는 유난히 임신과정이 힘들었지만 노산이라 그런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출산하고 나서야 유방암 말기에 여기저기 암이 전이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은영씨는 삶에 집착하지 않고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고 떠나려고 마음먹었지만 시영이가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하루라도 더 딸 곁을 지키고 싶었던 은영씨는 악착같이 투병생활을 하며 시영이가 세 살이 되던 해까지 버티다 결국 생을 마감했습니다.
죽기 전에 엄마는 딸이 유난히 잘 따르던 고모부와 고모를 붙잡고 시영이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해달라며 어린 딸을 맡겼습니다.
시영이는 그래서 고모부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유치원에 다녀온 시영이가 고모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고모부를 아버지라고 부를래요.
그럼 아빠는 어떻게 하고?
아빠는 아빠고 고모부는 이제 아버지예요.
그렇게 고모부에게는 가슴으로 낳은 딸이 생겼습니다.
그 고모부가 제가 다니는 학교의 교수님입니다.
그 예쁜 자식을 품에 안아 키우지 못하고 먼저 떠난 엄마가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는 것도 고맙고, 부모님이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를 키워주신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가 자식들 때문에 전전긍긍하듯 우리 부모님들이 그렇게 우리를 안고 업고 키우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곁에 보내주신 부모님, 그리고 형제와 자식들 모두를 다 넓은 마음으로 품고 약속의 축복을 받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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