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한 사람을 뽑으라면 누구일 것 같습니까?
바로 타의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다윗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즉, 구약성경의 모든 기록들이 예수님을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 않습니까?
다윗의 생애는 더더욱 직간접적으로 예수님과 관련이 깊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이렇게 많이 할애해 놓은 것은 당연히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역시 단순히 이스라엘 왕조실록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세계에 좀 더 맛을 들여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계도 점점 믿음의 눈으로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의 장남인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사건입니다.
인간역사로 볼 때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밀쳐내고 권력을 잡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죠.
사실 아담의 범죄도 아버지를 밀어내고 왕이 되려는 반역 아니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내가 왕이 되려는 이런 반역이 수시로 고개를 들잖아요.
압살롬은 아주 계획적으로 몇 년에 걸쳐 이 반역을 도모합니다.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감언이설로 꾀는 데 성경은 이것을 압살롬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표현합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자기에게 향하게 했다는 것이죠.
이것은 신앙지도자들이 가장 받기 쉬운 유혹입니다.
하나님께 향해야할 성도들의 마음을 암암리에 가로채기가 아주 쉽습니다.
같이 망하자는 것이죠.
어느 정도 세력이 모아지자 압살롬은 아버지가 거처하는 예루살렘을 떠나 헤브론에 가서 스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대다수의 지파들이 반역에 가담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진압은 커녕 오히려 다윗이 죽게 된 상황입니다.
황급히 왕궁을 빠져나와 도피를 하는 다윗왕은 맨발로 울면서 감람산을 넘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반역이 얼마나 쓰라렸겠습니까?
다윗의 왕위 복권은 거의 불가능한 아주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이 반역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의 승리로 종결됩니다.
본문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게 되어 피난 생활 중 자신을 공궤했던 바르실래와 작별하는 광경입니다.
대강 배경을 이해하셨으면 먼저 바르실래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의 도피생활 중에 전적으로 다윗을 지원해준 길르앗 땅의 갑부였습니다.
그런데 단지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인품과 신앙 면에서 정말 훈훈한 사람입니다.
오늘 2015년의 마지막 주일설교의 주인공으로 바르실래를 택한 이유는 우리가 다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축복을 받기를 원해서입니다.
본문에서 바르실래는 환궁하는 다윗을 전송하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와있습니다.
33절에 보면 다윗은 자신을 공궤했던 바르실래에게 같이 왕궁으로 가자고 간곡하게 청하고 있습니다.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가장 위급한 시절에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은혜를 갚으려는 다윗왕도 훈훈하죠.
도움을 받고도 형편이 피면 은혜를 잊는 게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르실래는 정중하게 다윗왕의 청을 거절합니다.
이미 자기 나이 팔십에 왕궁에 간들 좋은 것도 모르고, 입맛도 예전 같지 않고, 분별도 못할 나이니 가봐야 왕께 누만 끼친다는 것이죠.
나이가 먹으면 다 이렇게 겸손해 질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노욕이란 말이 왜 나오겠습니까?
사람은 나이가 먹을수록 대개 더 완고해 지고 자기 것을 지키려고 더 집착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도 자기 발로 못 내려오고 결국 끌려 내려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르실래는 자기 스스로를 분별해서 도움이 될지 폐가 될지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부자가 겸손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바르실래가 얼마나 부자였나면 왕의 도피생활 중에 다윗과 그의 모든 일행들을 거둘 만큼 재력이 빵빵했습니다.
왕의 일행과 군사들이 수천명이었던 것을 볼 때 그 사람들을 상당 기간 먹여 살렸다는 것은 보통 부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때 바르실래가 다윗일행을 공궤하지 않았다면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마 남아 난 군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왕이 오늘 바르실래에 대해 애틋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사람들은 다 부자를 좋아하고 부자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저도 부자가 좋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 부자가 되면 제가 정말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 같은 부자가 되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가난한 게 낫습니다.
예수님은 부의 위험에 대해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사람들에게 거만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죄를 지어도 없는사람의 범죄는 그나마 한두명에게 폐를 주지만 있는사람의 범죄는 주로 수많은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마음껏 재물로 축복하실 수 있도록 바르실래 같은 겸손한 인격을 점점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는 본성상 교만한 자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이것을 인정하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루어 주시길 기도할 때 점점 나아지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우리 가정들마다 일이 다 잘되고, 좋은 직장도 구하고, 계획하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축복해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 그렇다면 바르실래가 다윗왕을 이렇게 도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 어디에도 바르실래가 과거에 다윗왕과 막역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다윗이 바르실래의 고향 길르앗 땅에 갔었다는 기록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돌아가는 상황대로 압살롬의 왕권이 굳어지면 다윗왕의 목숨도 위태하고 도와준 바르실래도 화를 당할게 뻔합니다.
바르실래는 단지 돈이 많아 권력자를 후원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왕의 복권을 확신하고 훗날의 권력을 노린 것도 아닙니다.
다윗의 어느 면이 바르실래의 마음을 움직여 위험을 무릎쓰고 거금을 들여 다윗을 공궤하게 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먼저, 인간적인 면에서 바르실래가 다윗왕을 도울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 돕고 싶어야 돕지 상대가 아무리 다급하다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돕는 시늉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 여기저기에서 바르실래가 다윗이 마음에 들어 도와주게 된 단서를 찾아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왕의 숙적이었던 1대 왕 사울과 바르실래가 사는 길르앗 사람들과의 인연에서 시작됩니다.
사울이 막 왕 위에 올랐을 때, 이 길르앗사람들이 암몬족속의 선전포고로 다 죽게 될 위기를 만납니다.
이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 땅으로 이스라엘 땅이지만 아무래도 가나안지역에 있는 이스라엘과의 결속력이 좀 약했습니다.
위기 상황이지만 강을 넘어와 지원해 줄 사람들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죠.
그 때 사울왕이 그 전갈을 받고 군사들을 소집해서 요단강을 넘어가 길르앗야베스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그리고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합니다.
블레셋인들은 당시 전쟁의 전례대로 사울왕의 머리를 베고 시체를 성벽에 못박아 놓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길르앗야베스 장수들이 밤새 달려가 목숨을 걸고 사울과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와 장사를 치르고 칠일동안 금식하며 애도합니다.
과거 사울왕이 자기들에게 베푼 은덕을 갚으려고 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사울왕이 죽고 2대 왕에 오른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그래서 이들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너희가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 나도 너희의 선할 일에 보답할 것이다’ 이렇게 치하합니다.
길르앗의 유력자였던 바르실래가 그 일을 통해 사울왕과 원수였던 다윗왕의 선한 인격에 강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에 대해 기록한 성경 70여장에 걸친 내용 중 어디를 봐도 다윗은 잔인하거나 독한 면모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어떤 적이든 원수이든 신기하리 만치 인자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22은 말씀하죠.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또 잠언 11장 1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남에게 독한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나 하나님이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안드신다는 거예요.
가족들도 기분이 상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닫는 이유가 인자하게 대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속으로 남을 무시하며 독불장군처럼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일이 선한 결과를 맺도록 하나님이 질서를 만드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항상 복을 빌어주고 인자하게 모두를 대하길 축복드립니다.
3. 바르실래가 다윗왕을 도운 것은 단지 다윗왕의 인격에 감동되어서 만은 아닙니다.
다윗왕을 도운 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르실래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왕으로 택해지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입니다.
기름을 부어 직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에게 순종해야 했습니다.
기름부은 자를 대적하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기름부음 받은 왕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예루살렘의 번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뜻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쫒겨 다닐 때,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이 하나님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기에 자기 손으로 해칠 수 없다고 다윗은 그 기회를 번번히 포기했습니다.
다윗왕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기름부은 왕일 뿐 아니라 그 왕위를 영원히 보장하겠다고 약속을 받은 왕입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왕을 공궤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다윗 자신도 기름부은 사울왕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결과 그 덕에 오늘 같은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길르앗을 도운 사울왕에게 악을 행했다면 오늘 길르앗사람 바르실래에게 어떻게 도움을 받았겠습니까?
우리가 성도들을 돕고, 교회를 위한 수고를 하고, 복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손해도 보고, 고생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10절에서 우리에게 이런 의미로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성도들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결코 그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그 증거로 바르실래의 선한 행위에 대해 다윗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축복이 주어진 것을 오늘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받은 것 이상으로 보은을 합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자기는 늙어서 못가지만 아들 김함을 데려가 달라고 말합니다.
바르실래의 인격을 봐서 이때다 아들을 청탁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들 김함 역시 위기에 처한 다윗왕을 거두는 아버지를 따라 다윗왕을 섬긴 사람입니다.
다윗을 곁에서 도울만한 실력을 다 갖췄기에 아들을 추천한 것입니다.
다윗은 기꺼이 김함을 데려가겠다고 하며 김함의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해 줍니다.
38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행한 선한 일은 결국 자식에게까지 축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실 우리의 수고와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면 나보다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을 부모들은 기꺼이 선택할 것입니다.
자식이 지금의 나보다 잘되는 게 더 큰 보상이죠.
다윗은 김함과 그의 형제들을 데려다가 극진히 보살피고 존귀하게 대우를 해줍니다.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놀랍습니다.
다윗이 늙어 죽게 되었을 때 솔로몬에게 몇 가지 유언을 남기는데요.
그 중에 이런 유언을 합니다.
왕상2장7절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내가 죽어도 바르실래의 아들들은 지금처럼 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바르실래의 아들들은 다윗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고 마셨다는 것이죠.
바르실래가 받은 축복이 그가 베푼 것에 비해 얼마나 과분한 것입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받을 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다윗만 보상한 게 아니라 하나님도 바르실래의 신앙에 따라 크게 축복하십니다.
바르실래가 사는 길르앗 땅은 중심부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보니 외세의 침략에 취약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이스라엘 영토 중에서 가장 먼저 아람나라로 넘어갔습니다.
바르실래의 자손들이 아무리 길르앗에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부자로 살았다 해도 가장 먼저 약탈당하고 죽임을 당했을 게 뻔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섬긴 일로 인해 그의 자손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안정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참 놀랍죠?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목격했기에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런데 바르실래의 아들 김함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더 있습니다.
아주 희미하지만 성경에는 김함에 대한 미묘한 단서를 하나 제공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41장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내용보다 이 지명이 의미심장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베들레헴 근처에 게롯김함이라는 여관이 있었다는 겁니다.
게롯김함은 김함의 여관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게, 다윗왕이 자기의 고향인 베들레헴 땅을 김함에게 주었을 거라는 겁니다.
김함의 땅에 세운 여관이라 게롯김함인 것이죠.
베들레헴에 있는 여관, 뭐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바로 성탄절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있는 여관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잖아요?
옛날 작은 마을에 여관이 몇 개씩 있질 않았습니다.
성경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여관이 바로 김함의 여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계속 같은 가게가 뒤를 잇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윗왕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바르실래의 아들인 김함후손의 여관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옛날 다윗왕이 고난을 받을 때 바르실래에게 그 몸을 의탁하였듯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그 후손의 여관에 몸을 의탁하셨던 것이죠.
그 옛날 고난 받는 다윗왕을 섬긴 바르실래와 같이 지금도 십자가의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마음에 예수님은 거처를 정하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바르실래 처럼 예수님을 섬기지만 주님이 종말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때 우리를 공궤해주실 거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분명하게 재확인시켜 줍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한해동안 우리가 다같이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며 수고하며 주님보시기에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셨고 이미 많은 은혜를 주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위해 상을 베푸실 줄 믿습니다.
다윗왕이 자신이 위기에 있을 때 공궤했던 바르실래에게 그의 후손들을 후대하고 존귀하게 만들어 주었듯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힘든 중에도 물질로 주님을 섬겼고, 피곤한 중에도 몸으로 주님을 섬겼고, 때로 마음이 슬픈 중에도 주님의 위로를 믿고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했잖아요?
바르실래가 위기에 빠진 다윗왕조를 위해 자기가 가진 재산으로 도왔듯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각자가 가진 것으로 봉사한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항상 주의 나라에서 길리우고 먹이며 영광스런 유업을 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새해에도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공급해주셔서 어려울 때나 기쁠 때나 주님만을 끝까지 따르는 복된 주는나의산성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12월27일 주일설교 남수연
'사무엘상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상23장1절-14절( 다윗과 그일라) (0) | 2017.06.07 |
---|---|
사무엘상22장1절-5절 (다윗의 효성) (0) | 2016.05.18 |
오벧에돔 (사무엘하6장1절-15절) (0) | 2015.11.18 |
여기까지 도우셨다(삼상7장1절-14절) (0) | 2014.08.14 |
한나의 기도 (사무엘상1장9절-20절) (0) | 201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