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23장1절-14절( 다윗과 그일라)

남수연 2017. 6. 7. 16:42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그의 책 예수님처럼에서 예수님은 우리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지난 한 주도 하나님 앞에 충분했다고 생각지 못하는 우리에겐 얼마나 다행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을 때 사람은 최상의 상태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불러내서 예수님의 보혈로 속죄하신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대로 우리를 다시 돌이켜 놓으시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하시는데 죄악과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은 최적의 학교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다듬어집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닮고 싶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예수님 닮으면 큰 일 나는 줄 압니다.

왠지 예수님 닮았다간 손해만 보며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냥 나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닮지 않은 인간은 마귀를 닮았다고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고... 내가 진리를 말하나 진리를 믿지 않느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 자신이 아니라 마귀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저도 온갖 위선과 욕심에 끌려 살았으니 마귀를 닮았던 것이죠.

고약한 것만 마귀가 아닙니다.

교묘한 위선과 친절과 도덕으로 위장한 마귀도 있습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목표는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맏아들인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말 잘 되게 하시고, 아름답게 하시고, 매순간 삶의 전성기를 누리며 살게 하시려는 것이죠.

그러나 완전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닮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믿음의 선배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바울 같은 사람들이죠.

같은 사람이기에 우리가 이해하기 수월하잖아요.

오늘 다윗의 생애는 어떻게 예수님을 닮는지를 알려 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다윗을 어떻게 축복하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가시는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강력한 동기를 확인하고 의지를 갖고 따라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1. 다윗은 어려움에 빠진 그일라 주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졌습니다.

본문 뿐 아니라 다윗의 생애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타인에 대한 다윗의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 동정, 연민은 분명히 성도의 표식입니다.

1절에 보면, 다윗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의 타작마당을 습격해 곡식을 다 탈취해 갔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농경사회에서 가을에 추수하면 그걸로 일년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추수 때 타작마당을 습격해 모조리 약탈해 갔다면 농민들은 굶어 죽습니다.

가끔 뉴스에서 애써 수확한 작물들을 밤에 몰래 훔쳐간 사건이 나오죠.

텅 빈 곡식창고 앞에서 망연자실한 노인의 모습을 보며 이런 짓을 하는 인간들은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흥분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일라 주민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아직 국민들을 책임져야 할 왕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의 왕은 사울입니다.

다윗이 차기 왕위 계승자로 하나님께 선택되었지만 사울은 자기 가문을 세우려고 다윗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3절에 다윗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나타납니다.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그동안 다윗과 추종자들 무리는 사울왕의 추적을 피해 이스라엘변방의 험악한 황무지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갓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이젠 멀리 돌아다니지 말고, 유다땅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어떤 사유가 있다 해도 성도들은 약속의 땅, 믿음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게다가 장차 이스라엘을 통치할 다윗이 외국이나 변방을 떠돌면 후에 국민들에게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국외에서 아무리 경력이 많고 공로가 많아도 국내에선 정치적으로 뿌리내리기 힘들잖아요?

이 말씀에 순종해서 지금 유다 땅 한 구석에 들어왔지만, 얼마나 불안한 상황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일라 주민들을 도와준다고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다니요?

들키지 않게 숨어 있기도 두려운 판에 왠 오지랖이냐는 것이죠.

다윗의 참모들의 말이 상식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호해야 할 사람은 다윗이 아니고 사울왕입니다.

그런데 이미 정신병 증세가 심해지고 왕권에만 집착하는 사울왕은 백성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다윗은 왕의 관심 밖에서 울고 있는 그일라주민들의 고통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시잖아요?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실 때 끝도 없이 몰려오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지금 사정으론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다리셨다는 듯이 응답하십니다.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이런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내 처지, 내 형편, 내 안전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내 삶은 누가 지킵니까?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도망자의 길을 다니고, 사울이 매일 찾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내 문제에만 매달린다고 나와 가정을 안전하게 지킬 수도 없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살아야 할 방식을 분명히 명시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가르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예수님이 계속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처럼 우리도 타인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내 일만 하고 내 신앙을 지키며 살기에도 사실 힘듭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 집안일에 쫒기다 주일에 늦잠도 못자고 겨우 교회에 나오는 것이 대부분 성도들의 삶입니다.

이런 처지와 형편만을 생각하면 다른 누구를 생각하고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렴 지금 다윗의 신세만 하겠습니까?

다윗이 이런 마음을 가졌을 때 결국 그 일은 누가 하십니까?

5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긍휼의 마음만 있고, 도와 줄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변을 생각하고 돌볼 때,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남에 대해 매정하게 선을 긋고 내 것만 챙기고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시잖아요?

5절에도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니라.

식량을 다 약탈당하고 실제로 이 사람들은 굶어 죽을 위기였습니다.

오늘날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영적으로 굶주리고 죽어가는 사람들도 구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숨가쁘게 일하고, 그 보상으로 세상을 더 누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 생활이 숨차게 반복되지만 영혼을 육적인 것으로 채울 수는 없습니다.

혼자 남았을 때, 잠시 손에서 일을 놓았을 때, 땅거미 지는 도시를 보면 왠지 모를 슬픔과 자신에 대한 연민이 몰려옵니다.

짙푸른 저녁 하늘을 바라볼 때 밀려오는 그 이상한 감정을 감당할 수 없기에 술집으로 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앞에 문제도 산더미고, 나 자신도 허덕이지만 육적으로 영적으로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다윗은 현재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도 누가 뭐랄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이끌고 계신 하나님을 확신했기에 현실에 침몰되지 않고 오히려 남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잘 적용되시길 바랍니다.

2. 다음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묻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서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 철저히 묻고 하나님의 의견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된다는 것은 관계가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관계를 갖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중 늘 하나님과 교제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며 행하셨습니다.

본문에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는 내용이 네 번 나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다윗은 계속 묻고 하나님은 계속 대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종교적 기도와 다른 것은 인격의 교제가 되고 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들의 기도를 보면 반복해서 경을 읽거나 명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상대가 없기 때문에 대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해 주시는 인격자 하나님이 계시기에 삼십분도 기도하고, 한 시간도 기도하고, 두 시간도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일라사람들을 위해 블레셋을 칠 것인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지만 참모들의 반대가 있자 재차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가 당당하게 블레셋을 물리치고 모든 것을 되찾아 옵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으며 사는 사람에게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왠지 당당해 보이는 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왠지 불안하고 위축돼 보이죠?

우리 자신이 기도를 할 때와 안 할 때 믿음의 차이를 알 것입니다.

다윗이 십년을 도망다니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왕권을 차지한 것은 기도의 힘입니다.

그 다음에도 다윗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이렇게 그일라주민들을 도와주고 잠시 그 성에 머물며 다윗 일행들은 오랜만에 짐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민 중 누군가 현상수배 된 다윗이 그일라성에 있다고 사울왕에게 밀고합니다.

독안에 든 쥐가 된 다윗을 치기 위해 사울왕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았다는 정보가 다윗에게 전해집니다.

이때 다윗은 또다시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그냥 도망가야 할 상황이 분명한 데 다윗은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사울이 정말 그일라성을 치러 올 까요?

그일라성 사람들이 우리 일행을 사울에게 넘겨줄까요, 우리 편이 될까요?

하나님의 응답에 혹시나 하는 다윗의 기대감은 와르르 무너집니다.

사울이 내려올 것이다.

그일라 주민들은 너를 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다.

그일라 주민들이 다윗을 배신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전혀 원치 않는 응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잖아요?

이전에 그일라를 도와주라고 하셨는데, 그랬더니 그 결과 몰살당할 위기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거봐, 그러니까 내가 기도 안 해.’ 그러시겠습니까?

다윗이 차라리 광야 요새에 납작 엎드려 있었으면 이런 위기를 만나지 않았겠죠.

이럴 바엔 차라리 묻지 말고, 상식선에서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상식과 경험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았다면 목동으로 일생을 마치는 게 상식입니다.

우리도 기도하지 않고 내 판단과 지혜와 힘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역경의 파도에 곤두박질치고, 타락한 본성대로 대응하고, 때로 세상제도의 희생양이 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다윗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앞 장에서 사울왕에게 쫒기던 다윗은 어디로 갈지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아히멜렉 제사장을 찾아갑니다.

그에게서 떡과 칼을 구해 정신없이 유랑의 길을 떠났죠.

그런데 이 일을 나중에 알게 된 사울은 다윗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아히멜렉제사장을 포함해 제사장 팔십오명을 죽입니다.

다윗이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 결과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졌는지를 철저히 깨달은 다윗은 그 이후 하나님께 묻고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일라사건 처럼 분명히 주님의 뜻을 순종했고 일이 잘 된 것 같았는데, 또 거기서 문제가 파생된다는 것입니다.

그일라를 구원했지만 일은 다시 원점으로, 도망자 신세로 돌아갑니다.

기도하고 치료해서 병이 나았는데, 다시 병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한 사건씩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오래 기도해서 바라던 직장에 들어갔는데, 다니다 보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면 처음 기도 응답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 직장에 들어가는 게 하나님의 응답이 맞습니다.

거기서 다른 문제가 생겼다면 다시 기도해서 그 다음 단계로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한번 기도한 대로 이뤄졌다고 그게 끝까지 저절로 좋은 일로 계속 이어지고 유지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나고 방향이 바뀌고, 그러면서 전체적인 성공적 신앙의 모양이 만들어 집니다.

그러므로 일이 원대로 되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며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이번 사건으로 다윗은 얻은 것이 하나도 없이 전쟁에 휩쓸리고, 배신을 맛보고, 참모들에게 눈총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다윗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큰 시각으로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릴 왕의 자격테스트에 합격한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백성의 형편을 생각하는 사람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그일라의 배신에도 다윗은 자기로 인한 주민들의 안위를 생각해 신속히 철수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암암리에 마음을 결정합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왕이 되면 좋겠다.

바로 앞 장에서 사백명의 무리들이 다윗을 따랐는데, 이 사건을 지나고 나서 다윗이 그일라를 떠날 때는 육백명으로 추종자들이 불어납니다.

그일라 사람들 중에도 이런 다윗이 왕이 될 것을 바라며 따라 붙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 우리 자녀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다 나를 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배은망덕한 그일라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왕국에서 그일라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후에 다윗왕국이 바벨론에 무너지고, 다시 포로가 귀환해서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합니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그때 이 그일라지방의 유지들이 성벽공사를 담부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일라와 예루살렘은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먼 거리에서 이 공사를 담당한 것입니다.

다윗을 배신하고 홀대했던 그일라사람들에게 천벌을 내리는게 다윗에 대한 보상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지방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눈물 나게 하고, 기도 중에 탄식하게 하는 사람들을 장래에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대한 가장 큰 보상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광야 요새에 복지부동하고 자기 신변만 지키고 있었다면 이런 일들이 다 일어났겠습니까?

우리는 제발 살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 아무 일이 없이 지루하고 안일한 생활 속에서는 믿음과 인격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온갖 난처한 일과 험악한 사건들을 통과하며 기도를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쁜 행동이 습관이 되어 저절로 나오듯이, 이렇게 하나님과 기도로 동행하는 삶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기에 하나님과 삶에 대해 둔탁해지고 실패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가장 좋은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합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사울왕과 다윗왕의 생애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구하지를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결국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제사장의 에봇이 누구에게 돌아옵니까?

왕의 통치에서 하나님께 물었던 것이 제사장의 에봇입니다.

사울왕이 아히멜렉 제사장 가문을 죽일 때, 그 중 살아남은 아비아달이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 오잖아요?

기도하는 다윗에게, 필요한 다윗에게 에봇이 온 것입니다.

다윗은 더 신이 나서 하나님께 물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도는 신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아히멜렉에게 에봇을 가져 오라 하고 다윗이 묻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물을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총동원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왕 위에 오른 다음엔 하나님께 묻겠다고 법궤도 모셔오잖아요?

기도 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기도하고, 기도의 모든 유익을 충만히 누리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점점 심령이 황폐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너그러움을 보겠습니다.

다윗은 그일라의 배신에 대해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일라 사람들도 참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검은머리 짐승은 키우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죠.

아마도 그일라 사람들은 아히멜렉제사장이 다윗을 도왔다 멸족 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사울왕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안전이 달리고 이익이 달리면 서로 배신합니다.

그래도 다윗이 이럴 수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목숨을 걸고 너희 주민들을 구했는데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전쟁은 목숨거는 거잖아요?

아무렴 블레셋과 싸울 때 아무도 피를 안 흘렸겠어요, 다치는 사람 없었겠습니까?
이렇게 내가 너희들을 구원했는데 너희 살자고 나를 밀고하고 넘겨주느냐.

이런 섭섭한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말이 본문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자기 때문에 위험해질까봐 얼른 짐을 싸서 철수했다는 말만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마음을 닮은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이 우와좌왕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를 잡았으니 저들은 보내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 살아서 뿔뿔이 제 길로 도망간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인격을 통해 우리 역시 마음의 도량을 자꾸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각박하게 살다보면 나만 챙기게 되고, 내가 가진 것만 지키려 들고, 내게 힘이 되주면 좋고, 나를 멀리하면 섭섭해집니다.

이렇게 우리 사이즈가 작아지지 않도록 사이즈를 키워가야 한다는 것이죠.

사람이든, 환경이든 집착하면 마음이 더 힘들고 시험에 듭니다.

떠날 사람 떠나고, 올 사람 오고.

나 싫어서 가는 사람 있으면 축복하고 보내줘요.

가는 인연이 있으면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인연도 있습니다.

섭섭한 마음 갖지 말고 축복해 주면서 보내고, 또 다른 좋은 사람들 보내주실 것을 기대하며 다윗같이 넓은 마음으로 그렇게 삽시다.

다른 사람이 내 편이 안 되도 나는 그 사람편이 되 주면서 삽시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정말 다윗 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 다윗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비밀은 사무엘상 1613절에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다윗이 사울 뒤를 이을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뒤 줄 곧 성령님께 크게 감동 되어서 죽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충만했던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는 우리의 의지와 마음이 성령님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에게서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 예수님을 닮은 모습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도 우리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은 다윗처럼 성령님의 인도대로 힘써 살아가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긍휼, 범사에 기도, 넓은 도량.

이것을 지키며 사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7년6월4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