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27장1절-7절 (거짓 피난처 시글락)

남수연 2017. 6. 21. 18:39

오늘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다윗의 도피생활 속에서 깨달음과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다윗의 나라에는 예수님의 나라가 감추어져 있고 인간적인 다윗은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인생의 문제들과 믿음의 시련들을 다윗의 연단을 통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성경은 다윗이 지긋지긋한 사울의 추적을 피해 이웃나라 블레셋으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이야기입니다.

힘든 상황이 점점 옥죄어 올 때 하나님은 그래도 하나님만 신뢰할 것을 기대하시지만 우리의 행동은 늘 실망스럽습니다.

급한 일이 생기면 야속하게도 신앙이 제일 먼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우리는 당장 세상 방법을 동원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 불로 태워야 할 걸 다 태워버리려고 하시지만 우리는 그게 없어질까봐 다급히 세상방식으로 불을 끕니다.

오늘 다윗이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을 벗어나 세상을 찾아갑니다.

다윗의 망명은 잘 한 일일까요, 잘 못한 일일까요?
다윗의 인간적인 선택과 그 결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어떻게 뜻을 이루시는 지 본문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에도 유익한 깨달음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울왕의 추격이 십년 가까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윗은 결국 블레셋으로의 망명을 선택합니다.

다윗의 선택은 분명 잘 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선지자 갓을 통해 하나님은 모압 땅으로 갔던 다윗에게 유다 땅에 머물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다윗의 망명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도 힘들었지만 따라온 육백명의 군사들과 그 가족들의 안전과 식량 수급이 날마다 문제였습니다.

다윗 자신에게도 돌봐야 할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두 아내가 생겼습니다.

혼자라면 어떻게 피해 다니겠지만 원치도 않은 큰 무리들을 떠맡게 되었으니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나 의미 없이 우리에게 얹혀 진 짐은 없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알았기에 이걸 벗어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다윗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다 이렇게 많은 짐을 지게 되었나 먹먹해 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으면 위로는 되지만 돌아보면 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윗에게 가장 빠른 해결방법은 일단 사울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이스라엘의 대적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윗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당장 눈 앞에 해법이 있다면 그걸 외면하겠습니까?자식들 공부는 시켜야겠고 집세는 올라가고, 물가는 뛰고 있습니다.

월급을 더 준다면 주일을 못 지키는 직장이라도 옮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현실을 믿음으로 살아내기는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1절에 보니 다윗도 고민했다고 합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리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로 묻지 않고 자기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왜 묻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물어 봤자 가지 말라고 하실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 뜻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내 생각을 따를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는 세상 못 산다. 성경대로 사는 것은 비현실적이다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은 현실을 사는 방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실업인들이 세상적 방법으로 기업을 경영하다 현실에서 결국 불법자가 되고 있습니까?

이번에 김상0 공정거래위원장의 첫 번째 칼날이 누굴 겨누고 있습니까?

납품단가 후려치기' 의혹을 받고 있는 김성0 회장과 편법경영승계 논란이 되는 하림그룹입니다.

이런 기업주들이 다 간증하고 다니고, 교회를 세우고 했던 분들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을 따랐지 사업은 세상원리를 따른 결과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믿음과 생활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신앙인 다윗도 분명히 주어진 말씀을 어기고 현실적으로 더 쉬워 보이는 블레셋 행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윗의 생각대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에 넘어간 다윗을 더 이상 수색하지 않고 포기합니다.

적국이라 염려되었던 아기스왕은 다윗을 성대하게 환영합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가나안 땅에서 블레셋왕도 군사력이 아쉬웠습니다.

가나안 땅의 소문난 용장 다윗과 육 백 명의 용병을 왜 마다하겠습니까?

누가 순순히 남에게 이용당해 주겠습니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받아 주는 것입니다.

아기스는 다윗 일행을 환대하고 시글락이라는 촌락 성읍을 주어 살게 해주었습니다.

십여년 만에 다윗은 성벽이 있는 안전한 마을에서 지붕이 있는 집을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잠자리가 편했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일년 사개월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다윗의 시글락은 과연 피난처였을까요?

다윗은 험악한 광야에서 사울에게 쫒겨 다닐 때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는 수많은 시편을 지었습니다.

시편59편을 보면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 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광야의 도망자 신세 중에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와 평안에 대해 주옥같은 시편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시글락 시절에 다윗은 한편의 시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메말랐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때 입술에 찬송이 있고 마음에 즐거운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처량하고 구슬프기 밖에 더 합니까?

하나님을 향해 서면 광야도 아름답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생애 중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사건 만큼 치졸한 현실이 시글락의 삶이었다는 것을 본문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시글락은 다윗이 생각해도 영구히 머물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를 고향 삼아 산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생계를 위해 도적 떼 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8절부터 보면 다윗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합니다.

그 땅을 쳐서 남녀를 다 죽이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본문에 보니 그 중 일부는 아기스왕에게 상납합니다.

뇌물을 받은 아기스왕이 어디를 침략해서 얻었냐고 물을 때 다윗은 거기다 거짓말까지 합니다.

세상을 세상원리대로 살면 거짓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다윗이 침략한 곳과 전혀 다른 곳을 대죠?

사실인즉 다윗이 침략한 곳은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였습니다.

다윗이 도적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나름 나라를 생각했고 한편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신자들이 주일예배나 헌금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나머지는 다 세상을 따라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기스가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친 것을 알면 의심할까봐 다윗은 한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다 죽여버립니다.

그리고선 자기 민족인 유다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죠.

얼마나 다윗의 거짓말이 능란했으면 아기스가 속아 넘어갑니다.

12절에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 생각하니라.

심령에 하나님에 대한 노래가 말라버린 시인 다윗, 단지 생존을 위해 잔인한 도적떼로 전락한 다윗, 아기스에게 의심받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거짓말을 지어내는 다윗.

이것이 시글락에서의 다윗의 모습입니다.

시글락은 거짓 피난처였습니다.

성도에게 세상은 아무리 편안하고 부요해도 가짜 피난처입니다.

오히려 삶이 광야 같아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오아시스 같은 기쁨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년 사 개월이란 시간이 의미 없이 지난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위기가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들이 닥칩니다.

아기스왕이 사울왕과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아기스는 당연히 다윗의 군대도 이 전쟁에 참가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 때를 위해 받아 준 것이잖아요?

다윗은 이제 자기가 왕이 되어 통치 할 이스라엘 사람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겨야 됩니까, 져야 됩니까?

속이며 사는 삶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결국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습니까?

우리에게 뭔가 숨기고 속이는 게 있기에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들더군요.

정육점을 경영하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냉장고에 닭이 딱 한 마리가 남았는데 마침 마지막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식구끼리 먹게 닭 한마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신나게 마지막 닭을 꺼내 저울에 올려 놓았습니다.

2킬로 나가네요 했더니 손님은 그것 보다 좀 더 큰 놈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순간 주인의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빨리 이걸 팔고 들어가면 딱 좋겠는데.

주인은 네 있습니다. 라고 말한 뒤 저울 위에 닭을 들고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고 닭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닭을 꺼내왔습니다.

그 닭을 저울에 달자 2.5킬로가 나왔습니다.

주인이 살짝 손으로 눌렀던 것이죠.

닭을 봉지에 넣어 주자 손님이 나가려다 다시 돌아서서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했을까요?

아까 그 2킬로짜리도 마저 주세요.

정말 소름끼치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

죄는 언제든지 끔찍한 수치와 파멸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어울려 살고, 죄와 타협하며 살 때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글락의 삶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땅의 일에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세상의 아들들은 집요하게 우리를 억압하며 결국 믿음을 다 포기시킵니다.

다윗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블레셋군대와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 절대절명의 순간을 어떻게 넘겼을까요?

 

이스라엘 땅이 가까이 올수록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하고 심장이 뛰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다윗을 돌보십니다.

뜻하지 않게 블레셋의 지방 군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장군을 데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가겠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돌변하여 사울왕 편에 설지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죠.

아기스왕은 결국 다윗에게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다윗이 구사일생으로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넘긴 것입니다.

지난 주 나발의 가문을 멸절시키겠다고 칼을 찼던 다윗을 아비가일을 통해 막으셨던 하나님이 이번엔 블레셋장군들을 통해 막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잘못 된 선택으로 인한 위기 중에서 번번이 일을 바로 잡아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나발의 일에서도 다윗은 오히려 아내를 얻고, 그 덕에 나발의 재산도 얻습니다.

오늘도 보면 다윗을 돌려보내야 되는 아기스왕이 미안해서 쩔쩔매고, 다윗은 오히려 자기 충정을 못 믿겠냐며 큰 소리를 치며 돌아옵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이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이 막을 건 막아주시고, 오히려 일이 더 잘되게 방향을 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 입은 사람을 아무도 못 당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이 얻은 시글락도 그렇습니다.

본래 이 시글락은 유다 땅이었습니다.

조상들이 뺏긴 땅을 다윗은 그냥 어부지리로 되찾았은 것입니다.

다윗이 먹고 살기 위해 침략한 아말렉은 본래 하나님이 멸절시키라고 하셨던 족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약해서 방치했던 아말렉을 다윗은 그냥 자기 일하다 처리한 것입니다.

자다가도 떡이 굴러 들어오는 것이죠.

사무엘서의 기록자는 무슨 의도로 이것을 꼭 집어서 기록했을까요?

왠지 본문성경은 다윗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얻은 성과를 은근히 추켜세우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어떤 사상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다윗 언약 때문에 다윗과 그의 왕국을 이렇게 세우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의 족보에서 태어나실 예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다윗의 후손 예수님을 통해 영구한 나라를 세워주신다는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후손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질 구원의 언약을 하나님과 맺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언약을 최초로 믿은 그 나라의 백성입니다.

다윗의 시편은 온통 그가 믿고 고대하는 그리스도로 꽉 차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 아말렉을 이기고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잃었던 땅 시글락을 되찾게 하신 것은 다윗왕국의 받을 영광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걸 인간 다윗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모든 것을 찾아 되돌려 주신다는 것이죠.

은혜를 입고 축복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한 일이 없어도 그걸 물려 받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편애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와 고난으로 해산한 기막힌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의문에 빠집니다.

, 하나님이 왜 이렇게 잘 해주시지?

내가 요즘 잘 한 것도 없는데.

우리 서원이가 지난 주 처음으로 혼자 차를 몰고 학교를 갔습니다.

밖이 어두워지고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 안 오는 거예요.

밤 운동을 나가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공원 쪽이 아니라 자꾸 골목 길을 보며 서성이게 되더군요.

기다리면서 보니 딸의 가방을 들고 함께 집으로 오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을 어디선가 기다렸다가 함께 오는 거겠죠?

좀 있다 보니 쌩쌩카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여자아이가 나타나더니 그 뒤를 황급히 따라오는 아빠엄마의 모습이 나타나더군요.

항상 자식을 뒤 쫒는 이 부모의 마음 누가 심어 놓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다윗을 왜 그렇게 쫒으시겠습니까?

부모는 잘 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식이라도 편들어 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잠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어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실 그 나라에 자신을 선택해 주심이 감사해 어떻게든 믿음으로 버텨온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자기 한 몸 감당하기도 힘든데, 얹혀 진 식솔들을 책임지기 위해 허덕이다 궁여지책으로 시글락을 선택한 다윗의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나님만 그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피치 못하게 다른 길을 선택할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보십니다.

그래서 그 길에서 망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시고 또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30장까지 이어집니다.

다윗이 다 잘됐다고 기뻐하며 시글락으로 돌아갔더니 아말렉사람들이 시글락을 약탈해 불태우고 부녀들을 모조리 잡아 끌고 가 버린 것입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다윗을 돌로 치려 했다고 합니다.

다윗에게 가장 큰 위기가 또 닥친 것입니다.

그제야 다윗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몇 장을 넘기고서 이제야 다시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말이 등장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시 응답하십니다.

다윗은 아말렉을 쫒아가 대승을 거두고 뺏긴 모든 것을 찾아 돌아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하나님은 철저히 다윗의 편에 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와 계획을 벗어난 결정이 얼마나 그동안 다윗을 비굴하게 하고 불한당이 되게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이 뒤를 봐주시기에 잃은 것이 하나도 없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글락 행에 대해 아쉬움을 갖습니다.

다윗이 출전할 뻔 했던 그 전투에서 사울왕과 아들 요나단이 전사를 합니다.

불과 일년 사개월만 더 참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 명령대로 유다에 남아 좀 더 도피생활을 하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이스라엘이 곤경에 빠졌을 때 다윗의 군대가 블레셋을 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울이 전사한 뒤 자연스럽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 위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국에 망명가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출정까지 했던 다윗을 그 민족이 순순히 반기겠습니까?

결국 다윗은 간신히 유다지파 한 지파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사울왕조를 고집하는 열한지파의 추종세력과 싸우다 무려 칠년 반이 지나서야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빠른 길일 것 같았는데, 더 편하고 유리한 길일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결정한 일들이 우리를 더 오래 곤란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바르고 형통하게 사는 유일한 생활의 법입니다.

말씀과 기도 안에 사는 것이 가장 복된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잘 깨닫고 항상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7년6월18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