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민 생활 십년이 넘어도 왜 영어를 못할까’ 라는 기사가 났었습니다.
십년 기러기아빠가 아내와 아이들이 공부하는 캐나다를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오랜 만에 만난 아내와 둘만의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떠났는데 그만 설레는 여행기분을 잡치고 말았습니다.
영국 입국심사대에서 아내가 영어를 못해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십년을 캐나다에 살면서 아직도 영어를 못하냐’며 아내의 자존심을 긁는 소리를 하고만 것입니다.
결론은 ‘이민 생활 기간과 영어는 관계가 없다’ 였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안 쓰고 온 종일 한국 사람들만 상대하면 삼십년이 지나도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생활 십년이 넘어도 왜 성경을 모를까’
늘 세상살이에 바쁘고 세상 사람들과만 말하고 살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나 중세처럼 성경이 금서도 아닌 데 마치 금서처럼 성경을 멀리 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말씀이 있네.’
이렇게 매일 새록새록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영혼과 육체를 강화시켜 주십니다.
말씀이 내면을 채우지 않으면 시들은 초목처럼 힘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옆에 두고 많이 읽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또 무작정 성경을 읽는 것보다 사무엘서는 누가 썼고, 사무엘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런 사전 지식을 배우며 읽으면 더 큰 유익이 됩니다.
성경 사무엘서는 선지자 사무엘과 사무엘이 왕으로 기름부은 1대 사울왕과 2대 다윗왕의 이야기로만 꾸며져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겠죠.
사무엘서의 핵심은 다윗왕조의 건립을 통해 장차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의 나라, 메시야왕국이 올 것을 예언하고 그 견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서를 읽을 때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예언적인 속뜻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를 어떻게 평가하고, 실제 어떤 복을 받고, 어떤 화를 만났는지를 보며 우리 신앙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런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약속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약속과 성취입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하잖아요?
그 하나님의 약속의 요지는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영원토록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과 맺었기에 다윗언약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언약이죠.
성경에 나온 모든 약속들은 다 중요하고, 이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다윗과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과는 특별한 우정이었던걸 아시죠?
흔히 다윗과 요나단을 동년배의 친구로 아는 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들의 생애를 성경연대기에 맞춰서 잘 따져보면 다윗과 요나단은 최소 이십 살에서 삼십 살 정도의 나이 차이가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돈독한 우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바탕에 피차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보내드렸던 문자에 있는 말씀 기억나십니까?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요나단이 한 말입니다.
요나단의 믿음의 수준이 느껴지죠?
사람 사이에도 정말 마음이 통하고 진실 된 관계가 되려면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셔야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의 사귐이 얼마나 얕고 얼마나 변덕이 심합니까?
다윗을 처음 만났을 때 요나단은 이미 아버지 사울왕의 군대 지휘관이었고 다윗은 아주 애송이였습니다.
그런 다윗을 보았을 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요나단이 이렇게 다윗을 사랑했지만 아버지 사울왕은 자기 왕위를 아들 요나단에게 물려주려고 평생에 다윗을 죽이려 쫒아 다녔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손에서 다윗을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다윗은 기약없는 망명길을 떠나게 됩니다.
다윗이 떠나던 날 요나단은 이렇게 약속해 달라고 제안합니다.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이것이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입니다.
내 집에 인자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요나단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다윗과 이런 약속을 했다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
즉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 분명히 이뤄질 것을 믿었고 거기에 근거를 두고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당시로선 누구도 다윗이 왕위에 오를 것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은 단지 인간 다윗과만 약속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언약 안에는 다윗의 자손을 통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요나단과 다윗의 약속은 더 크게 보면 하나님과 다윗언약에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오직 다윗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두 언약을 이해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울왕과 요나단은 블레셋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또 이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가나안의 최약소국, 최빈국이었던 이스라엘을 최강국으로 세우기 위한 가나안 전쟁을 치릅니다.
앞 장 14절을 보면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라고 하죠?
왜 다윗에게만 이런 각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일까요?
그 전쟁사를 잘 읽어보면 그것은 다윗이 각별히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늘 이기게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각별히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요.
하나님 없이 일이 잘 나가고 있다면 경계경보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나가면 그래봤자 오만방자해지고 갑질이나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하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뒤에 다윗이 마음에 두고 있던 한 가지 일을 기억했습니다.
바로 요나단과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본문1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게 됩니다.
이미 요나단은 죽었고 사울의 집안도 다 죽었는데 굳이 이 약속을 다시 꺼낼 필요가 있었을까요?
혹여라도 사울 가문에 사람이 남아 있다면 사실 왕권 유지를 위해선 싹을 잘라버려야 할 판이거든요.
여전히 사울왕조를 다시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왜 없겠습니까?
반란은 언제나 있잖아요?
사울의 자손을 찾아내 복권시키면 괜한 화근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이 죽었으니 그 언약을 교묘히 묻어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 신상이나 실질적인 이득을 떠나 반드시 언약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사람이 도움을 받을 때 마음하고, 나중 마음하고 같지 않습니다.
도움 받은 것은 금방 잊어버리고 섭섭하게 한 것은 끝까지 기억나죠.
그런 점에서 다윗의 됨됨이는 특별한 점이 있고 배워야 할 점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았을 때 ‘아, 내 마음에 꼭 드는 아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신 이유를 이런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에 철저히 신실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다윗하고 메시야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약속도 지키지 않는 사람하고 맺으시면 하나님의 언약이 헷갈리잖아요?
언약의 신실한 다윗은 다윗의 자손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기에 아주 알맞은 견본이 되는 것이죠.
다윗처럼 하나님도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기분에 따라 사람을 좋았다 싫었다 하지 말고 처음 믿고 좋아했던 사람 끝까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 무언의 약속이잖아요?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좋아해 주던 사람이 나중에 나를 미워하고 흘겨볼 때 정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남이 나를 배신할지언정 우리는 늘 사람사이에서 신실한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아무리 작은 도움이라도 받은 것을 잘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는 늘 행복하고 하나님도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울의 집 시종이었던 시바라는 사람을 부릅니다.
이 시바는 간교한 사람으로 나중에 다윗을 배신하는 내용이 뒤에 나옵니다.
다윗이 묻죠.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다윗의 이 말을 진심으로 알았을까요?
그가 대답합니다.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아들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냥 다리 저는 자라고만 말합니다.
왜 그랬겠어요?
하나 있긴 한데 다리 저는 자니 신경 쓰실 것 없다는 의도로 말한 것이죠.
다윗의 진심이 시바에겐 이해가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왜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는 4장에 그 배경이 나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모가 요나단의 어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안고 도망하다 그만 아이를 떨어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두 다리를 다 저는 불구가 된 것입니다.
한 다리만 절어도 정상적인 생활이 힘든데 두 자리를 다 절었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비참한 운명이 된 것이죠.
이 아들을 로드발에 살고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사람을 우리가 주목하길 바랍니다.
바로 마길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상황에 사울의 손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길은 사울집안과 가까웠던 이유로 사울왕조의 마지막 남은 왕손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도 대단히 의리 있는 사람이죠.
한번 의리 있는 사람은 보면 대개 끝까지 의리 있습니다.
마길은 요나단의 아들을 내 줄 때 잘못 될까봐 큰 근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왕자처럼 대우하는 다윗을 보고 크게 놀라고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후일에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을 떠나 기약 없이 피난길을 떠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때 이 마길이 다시 등장합니다.
사무엘하17장27절입니다.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다윗과 함께 피난하는 군사들의 수가 수천 명 이상이었고 함께 떠난 백성들의 수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들을 먹이려면 어마어마한 음식이 필요했습니다.
이걸 바르실래와 마길이 가져 나와 곤궁에 처한 다윗을 위로하고 힘을 주었다는 것이죠.
마길은 부자임에 틀림없고 인간성도 좋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사울왕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마길은 다윗의 인격을 알아보고 지체 없이 다윗의 후원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나산의 자녀들이 마길 같은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을 후히 대우했던 일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든 선을 베풀고 도울 수 있을 때 돕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돕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잘 배우고 그렇게 복되게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의 왕궁으로 불려 오게 됩니다.
6절에 이 둘의 만남이 그려집니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옛날 나이 먹은 요나단과 다윗이 만났듯이 지금 나이 먹은 다윗과 므비보셋이 만나고 있습니다.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 졌지만 왠지 가슴이 찡해지는 장면이지 않습니까?
다윗은 두 다리를 절며 자기 앞에 나온, 요나단을 꼭 닮은 므비보셋을 보는 순간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고 돌봐주었던 요나단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이 장면이 정말 아름답고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므비보셋으로 말하자면 다윗의 새 왕조에 적폐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끈질기게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왕의 손자입니다.
운이 좋아봤자 마길의 집에 숨어서 숨도 크게 못 쉬고 두려움 가운데 평생 살아갈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으로 인해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식탁에서 먹으며 평생 왕자 같은 대우를 받으며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식탁엔 얼마나 많은 각나라 귀빈들이 초대를 받았겠습니까?
두 발을 절뚝이는 므비보셋은 그들과 함께 늘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입니다.
이 므비보셋의 삶의 반전에서 혹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단지 다윗의 훌륭한 인격에 바치는 찬사가 아닙니다.
므비보셋 같은 숙명을 가진 우리들이 다윗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신분이 되는지를 역사 속에서 찾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므비보셋처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피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어떤 면에서든 우리는 므비보셋처럼 불구자였습니다.
거칠고 험악한 삶에 내동댕이쳐져 어딘가 불구가 되어 속으로 다 비관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상처들은 우리 인격에 깊은 장애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구자처럼 비뚤어지게 걸어갑니다.
저 자신도 저를 볼 때 정말 마음에 들지 않고 싫을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러지?’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상처로 비뚤어지고 장애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셔서 상처를 만져 주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온전케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앞날은 므비보셋 만큼이나 불확실하고 어두웠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그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영원한 심판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잃어버린 가문의 땅을 되찾았듯이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늘의 기업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므비보셋이 평생 다윗 왕의 상에서 먹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이미 먹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은사와 양식과 축복들이 매일 우리를 먹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생이 끝나는 날 우리는 하늘나라의 식탁으로 옮겨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서 그러셨잖아요?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너희들이 올 때 같이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우리를 위해 잔치상을 베풀고 기다리십니다.
8절에 보면 므비보셋이 이런 다윗의 은총에 놀라워 이렇게 아룁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좀 자존심 상하는 표현인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와 그런 나를 위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한 일과 우리가 받게 된 그 엄청난 영광의 차이를 안다면.
우리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자기를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아는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바울사도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렇잖아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왕조를 세우실 하나님의 언약에 자신의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 날에 자기와 후손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그 언약 안에 들어 있었기에 다윗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역대상8장을 보면 요나단부터 므비보셋과 아들 미가의 족보가 길게 이어집니다.
그 가문이 번성해서 이스라엘의 유력한 장군가문을 이루었다고 기록합니다.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을 막았던 사울의 가문은 멸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 유일하게 다윗언약에 믿음을 걸었던 요나단의 가문은 끝까지 다윗왕조와 함께 하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복을 주신다는 다윗언약을 믿으십니까?
우리와 우리 가족들이 요나단의 가문처럼 예수님 안에서 복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충실하게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게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요 주님의 편지라고 한 것입니다.
요즘 이단 교주들의 범죄가 폭로되며 기독교 전체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크게 주님의 영광 되돌리고 높이는 일은 못한다 해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마 우리 진실 되고 착한 행동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준다면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모두가 되기 위해 다윗처럼, 요나단처럼, 마길처럼, 은혜를 아는 므비보셋처럼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18년4월15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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