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읽으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많은 사람이 구약성경의 심판의 하나님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젖먹이까지 죽이라는 게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시냐는 것이죠.
성도님들도 솔직히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사울왕에게 이렇게 명령하셔야 할까요?
‘너희는 가서 틈만
나면 너희를 잔인하게 죽이는 저 아말렉 원수를 사랑해라,
동쪽 땅을 뺏으면 서쪽 땅도 내줘라’
하나님은 믿음의 교훈만을 위해 현실과 동떨어진 행동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당시는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던 고대 무법사회입니다.
고대 전쟁사에서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전쟁고아를 다 어떡하겠어요?
이런 명령은 당시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준이지만, 물론 그 안에는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사울에게 명령하신 아말렉 전쟁은 역사적으로는 두 나라의 악연으로 시작된 오래 된 전쟁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도 당연히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구원에 대한 믿음을 더욱 다지고 더 굳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중요하고 은혜로운 진리를 깨닫도록 모두의 귀를 활짝 열어 주시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할 마음을 주시길 소망합니다.
먼저 본문의 주제인 아말렉과의 전쟁과 그 속에 숨겨진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려면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쟁사를 좀 이해해야 합니다.
아말렉이란 나라가 성경에서 특별하게 등장한 것은 출애굽기17장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솔아래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너 광야길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군하던 이스라엘의 후방을 아말렉이 기습공격 합니다.
후미에 처진 사람들은 당연히 노약자, 아이들, 여자들이었죠.
이 기습공격은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 이스라엘에게 큰 타격을 입힙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 막막한 사막은 그 자체만도 두려움이잖아요?
요즘 사막을
횡단하는 무슨 프로그램이 있나보던데, 거기 출연한
차태현씨가 공황장애를 호소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가 본 이스라엘 사막을 생각해 볼 때, 그 방향도 없고 끝도 안 보이는 사막을 무작정 걷는다는 것은 정말 막막하고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일은 현실적으로 볼 때 그만큼 힘든 일이었습니다.
우리 구원의 여정도 그렇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까지 겪으니 공포심이 극대화 되는 것이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드림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하나님은
적들에게서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시려는가? 우리를
떠나셨나?’
이런
불안감과 두려움에 대열은 걷잡을 수 없이 술렁였을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기도하고 여호수아 장군이 나가서 아말렉과 싸웁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난 뒤 모세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는 승리의 깃발이라는 뜻이죠.
여기까지는 성경에 많이 나오는 전쟁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승리한 전투가 한 두 번이 아니잖아요?
문제는 이
전투 뒤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 전쟁을 아주 특별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아말렉이란 부족이 뭐길래 대열의 후미를 공격했다고, 하나님이 맹세까지 하시며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겠다고 하시냐는 것입니다.
그 정체는 신명기25장17절 모세의 유언에서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대제국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민족의 소문은 빠른 시간에 인근 나라에 퍼졌습니다.
홍해를 갈라 자기백성을 건너게 하시고 뒤쫒던 애굽 군대를 바닷물로 덮어 버린 대단한 여호와 신에 대해 들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모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출애굽기 15장, 모세의 노래를 보면 블레셋, 에돔, 모압이 다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이끄시는 대열을 습격하고 당돌히 싸움을 걸었던 것이죠.그리고 사백여년이 지난 오늘 하나님이 다시 사울왕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있다, 가서 다시 아말렉과 싸워 그들을 진멸하라’ 하나님이 참 뒤끝이 있으시죠?
우리는 여기서 아말렉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아말렉의 배후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저지하고 방해하는 사탄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사탄의 사령탑이 고대 이스라엘에선 아말렉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역사에 끊임없이 존재를 드러냅니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다 진멸한 것 같았는데, 사사기에 보면 아말렉이 또 어디서 나타나 이스라엘을 습격하고 괴롭힙니다.
오늘 사울왕을 통해 다시 진멸한 것 같은데 히스기야시대에 보면 이 아말렉이 또 등장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 때 아말렉을 쳐서 몰아냈다고 역대상4장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페르시아포로였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시대에 또 아말렉이 등장합니다.
포로시대의 이스라엘민족을 아예 말살시키려던 사악한 하만이라는 자가 아각자손이라고 에스더서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각은 오늘 본문에 나온 아말렉왕입니다.
아말렉은 진멸하면 또 나오고, 진멸하면 또 나오고, 계속해서 나타나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게
아말렉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정체입니다.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에 속한 세속나라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저지하는 것은 당연히 사탄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사탄의 왕국에 대한 전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동기로 볼 때는 그냥 숙적끼리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발자취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말렉의 배후는 반드시 진멸해야 할 사탄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어린아이까지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아말렉은 우리의 구원의 여정에도 항상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말렉과 싸워서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당연히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지난 주에도 아말렉은 우리의 삶을 엿보고 노리고 싸움을 걸었습니다.
한 주간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시험당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잘 이겨낸 부분도 있지만 실패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큰 시험은 이겼는데 말의 실수로 작은 일에서 실패한 게 있습니다.
오늘 성도님들이 급한 일로 많이 빠지셨는데 제가 어제 전화를 받으며 참 마귀는 부지런히도 일하는구나 싶더군요.
아말렉의 목적은 생활에 타격을 입혀 우리 믿음을 좌절시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세상과 문제에 정신을 뺏겨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 사이에 우리 삶과 믿음의 후방을 야금야금 공격하고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아말렉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항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미 야고보사도를 통해 가르쳐 주셨잖아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마귀를 모르고 사셨다면 모르는 사이 많은 것을 잃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사탄의 세력 아말렉과 싸워야 하는지를 본문에서 찾아 보려고 합니다.
1.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약점, 단점을 가졌습니다.
각자 약점들 다 알고 계시죠?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구원여정 중 후미를 공격했습니다.
약자와 뒤쳐진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후방,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아말렉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도 조금만 사귀어 보면 단점이 다 드러나는 데 사탄이 왜 우리 약점을 모르겠습니까?
사탄은 외부로부터 우리를 공격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괴롭히고 환경을 통해 우리를 가로막아 정신을 세상에 뺏기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실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약점, 단점과 내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군만 있는 게 아니라 적군이 있는 셈이죠.
약점이 있기 때문에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는 것이잖아요?
버럭 화내는 성격은 늘 그걸로 사람 관계에서 시험에 듭니다.
남의 눈만 신경쓰는 사람은 그런 치다꺼리하다 지쳐 스스로 시험에 듭니다.
물질에 약한 사람은 시험에 빠졌다하면 또 돈문제입니다.
오늘 사울왕도 그랬습니다.
견물생심이잖아요?
수중에 주무를 수 있는 돈이 들어오면 유혹받기가 쉽습니다.
횡령해서 망한 사람들은 다 돈 만지는 사람들입니다.
전에 삼성증권이 직원들에게 잘못해서 거액의 주식을 배당했었죠.
뻔히
알면서도 그걸 내다 팔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세 망쳤잖아요?
아말렉이
약탈해서 지니고 있는 물건들을 보니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사울왕 시대는 사사시대를 지낸 바로 뒤라 아주 가난했거든요.
잘 먹여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우양 떼를 보니 죽여서 파묻기가 아깝죠.
또 아각왕을 보니 그 위용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잔혹한 폭군들에겐 오금을 못 펴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김정은 앞에 설설 기는 측근들을 보고 트럼프대통령이 이성을 잃고 그 카리스마를 부러워했다고 하더군요.
만일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고 터덜터덜 빈손으로 돌아가면 대승을 거둔 개선행렬 같지가 않잖아요?
기름진 양떼와 소떼와 늠름한 낙타떼를 거느리고, 두 눈이 이글거리는 패전국의 왕을 쇠사슬에 끌고 돌아가면 얼마나 위대해 보이겠습니까?
백성들의 지지율은 높아지고 왕위는 더욱 견고해지겠죠.
이런 돈, 명예, 인기, 인정받고 싶은 열망, 권력유지, 이런 약점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시험에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자기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항상 경계하는 것이 시험에서 이기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렇게 불순종한 바탕엔 모든 인간의 가장 큰 죄와 약점이 사건을 진두지휘한 것입니다.
사울은 이 전쟁을 통해 은근히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인 것을 서서히 망각해 자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죠.
이것이야말로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가진 치명적인 죄성이고 약점입니다.
누구나 자기왕국을 세우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약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그렇게 지치도록 일하고 열심히 뛴 것이 내 왕국을 세우기 위함은 아니었던가요?
이 세상과
세상에 세운 인간의 왕국은 멸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기 왕국을 세우려다 망했습니다.
그 왕국을 움켜쥐려고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을 죽이는데 평생을 허비했습니다.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종말엔 오직 하나님의 왕국만 남습니다.
인간 사울은 폐위되고 다윗을 찾아내 그의 자손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해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복을 누리며 산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무수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진리에 눈을 뜨시길 축원드립니다.
이 땅에서 내 나라가 아닌 하나님나라를 같이 세우고 영원히 누리는 복된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또 이 싸움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납량특집 귀신영화가 왜 무섭습니까?
보이지 않는 적이 제일 무섭습니다.
악의 세력 아말렉과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아말렉 전투에서 정해 놓으셨습니다.
내가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리라
그래서 하나님이 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악의 세력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게 삽니다.
간혹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객관적으로 자기 생활을 지켜보면 악의 세력을 조금 감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당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아말렉과의 싸움은 반드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후서10장4절에서 이것을 다시한번 가르쳐 주죠.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매일 외울 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를 악에게서 구하옵소서.
오늘도 나를 시험에 빠트릴 악한 세력이 노리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지혜롭게 대적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는 것이잖아요?
이런 기도가 매일 필요합니다.
그냥 맨몸으로 세상에 나가지 마세요.
그렇게 기도하면 성령께서 시험을 깨닫게 하시고 대처할 지혜와 능력도 주시는 것입니다.
3. 또 아말렉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이 전쟁은 사울생각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무엘을 통해 정확히 지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다면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비참한 실패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문제를 정확히 말씀하시잖아요?
23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지킨다면 사탄과의 전쟁에서 유리하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배워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들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려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해라, 입에서 나쁜 말을 그치라, 감사해라, 이런 것들을 우리가 힘껏 지킨다면 누가 우리를 책잡고 싸움을 걸어 오겠습니까?
누군가 시험을 해와도 내가 떳떳하니 이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켰으니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당당하잖아요?
말씀을 못 지키면 양심이 죄책감을 불러오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왠지 떳떳하지가 않습니다.
양심이 괴롭히니 회개해야 하는 데 자꾸 남의 탓만 하고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점점 딱딱하고 완고해집니다.
사무엘과 사울왕의 대화를 보면 그런 것이 다 드러납니다.
사무엘은 계속해서 잘못을 회개하도록 몰고 가지만 사울왕은 초지일관 자신을 합리화하고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순종 못하면 왠지 기도도 피하게 되고 점점 믿음이 무기력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불순종에 아말렉은 회심의 일격을 가합니다.
아말렉왕은 결국 죽으면서까지 사울을 왕에서 끌어내리잖아요?
작은 전쟁에 자꾸 지다보면 결국 큰 습격에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서 죄짓지 않고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이 ‘진멸 전쟁’에 대해서 중요한 진리를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죠.
하나님이 모든 전쟁에서 적을 진멸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진멸’하라고 하실 때는 특별한 신앙의 내용을 가르치는 목적이 있으십니다.
우리 말 ‘진멸’은 그냥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멸’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헤렘’은 단순히 모조리 죽여 없앤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 ‘헤렘’은 ‘바친다’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은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하죠.
하나님이 죄인을 완전히 진멸해서 내 것이니까 내가 갖겠다는 이 ‘헤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표본입니다.
가나안땅 정복전쟁에서는 세상나라의 대표로 여리고성을 진멸, ‘헤렘’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의든 타의든 하나님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훼방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부정하고 살았지만 죽어서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통해 멸망을 당한 채 영원히 하나님께 복속되는 것입니다.
멸망상태에서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죠.
이것이 아말렉과 여리고전쟁 같은 헤렘전쟁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이 ‘헤렘’은 또 다른 용도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거룩하게 봉헌한 물건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 드린다고 서원한 물건 같은 것이죠.
헤렘으로 정해진 물건은 절대로 다시 사람들의 용도로 쓸 수 없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 헤렘으로 바쳐진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5장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우리 역시 영원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그 통치를 받게 ‘헤렘’당한 사람들입니다.
같은 ‘헤렘’이지만 아말렉이나 여리고가 ‘헤렘’ 당한 것과의 차이를 하시겠습니까?
피조물인 천사나 사람은 악하든 선하든, 반역하든 순종하든, 다 종말에는 하나님께 바쳐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마귀나 죄인처럼 철저한 진멸, 멸망을 통해 하나님께 복속될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 바쳐져 영원한 복락을 누리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 진멸전쟁 속에는 이런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경륜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섬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저처럼 늦었지만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길 원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한주간 세상살이에 지칠 대로 지쳤지만 성도님들도 주님 앞에 나와 이렇게 다들 헌신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가진 무언가로든 하나님나라를 위해 공헌하겠다는 책임감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나라니까요.
비록 내일도 먹고 살기 위해 일터로 간다 해도 이것이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핵심은 영적 아말렉과 우리도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후미, 후방인 단점들을 파악하고 항상 잘 다뤄야 합니다.
그 성질, 그 약점 나오지 않게 잘 단속해야 합니다.
특히 내 왕국을 이루기 위해 살지 않도록 계속 자신을 돌이켜야 합니다.
이 영적 전투는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매일 기도로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께 받쳐진 성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를 받으며 영원히 복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018년6월24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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