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rEHxzR4PfDk&feature=youtu.be
<2019년9월1일 설교영상>
오늘 설교 제목은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입니다.
본문에서 읽었듯이, 다윗왕이 자신의 왕권을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의 생사를 묻는 말입니다.
인생이 자식에게도 쫒기고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의 마음은 자식의 사고현장으로 달려간 부모가 애타게 생존자 명단을 읽어 내려갈 때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철이 없어 이런 짓을 저지른 우리 아들을 살려 주었느냐’ 그래도 아들을 감싸고 목숨을 구하려는 다급하고 절박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부모 마음이죠.
1.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압살롬의 쿠데타를 배경으로 합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입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아내가 많았습니다.
아들이 열아홉이었는데 거의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친 형제간에도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 결국 피를 봐야 끝납니다.
재산 싸움도 그렇잖아요?
이복형제간의 치열한 왕권 다툼과 갈등이 사무엘서에 아주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위대하고 상징적인 왕이지만 그의 생애는 누구 못지않게 비애로 얼룩져 있습니다.
오늘도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다 목숨을 잃은 아들로 인해 통곡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성경에 “그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니 왕이 되는 꿈을 키워갈만 했겠죠.
그러나 다윗왕조는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 족보는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이죠.
일찍이 왕 위가 솔로몬에게 이어질 것을 다윗에게 통보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니 왕권을 차지하려면 쿠데타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죠.
압살롬은 하나님의 통치와 계획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밖 사람들이 그런데 관심 없이 살잖아요?압살롬은 오직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헤브론에서 쿠데타 왕권을 세운 뒤 예루살렘 궁궐로 진격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왕과 신하들은 야밤에 성을 버리고 도망가야 했습니다.다윗은 이 사실에 격분하면서가 아니라 울면서 이 길을 떠납니다.
왕위를 내려놓는 것보다 그토록 사랑했던 자식의 배신에 더 가슴이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상한 눈물을 흘려 본 부모들은 이 마음 잘 알죠.
압살롬은 예루살렘성을 점령한 뒤 대군을 이끌고 아버지를 죽이려 쫒아갑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진 것이죠.
오늘 말씀을 보니 승자가 누구입니까?
아버지 다윗왕입니다.
그러나 아들과 싸워 이겼다고 기뻐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승전보는 곧 아들이 죽었다는 비보입니다.
다윗왕이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는 이 절절한 모습은 모든 부모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 먼저 왜 다윗은 아들이 칼을 겨누는 뼈아픈 배신을 당했냐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에는 예기치 못했고 원치 않는 참담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미국에 다녀오면서 여행 중엔 정말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여러 번 겪었습니다.
나그네 인생인 우리 삶의 여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번 다윗의 위기는 이렇게 우연히 일어난 나쁜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과 밧세바 사건의 결과입니다.
다윗은 정욕에 눈이 멀어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죄를 은폐하려고 우리야를 죽였죠.
우리야를 전쟁터 한 가운데서 고립시키는 작전을 써서 혼자 싸우다 적군의 칼에 죽게 합니다.
그리고 버젓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 들여 왕비를 삼죠.
나중에 그 사이에서 솔로몬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 악독한 범죄 이후 다윗 생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릅니다.
이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짓는 죄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불러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알라고 성경을 기록해 주신 것이죠.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보내셔서 엄중히 책망하십니다.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때 회개하는 심경이 시편 51편에 절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바울의 고백과 똑같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본성의 죄까지 깨달은 사람의 고백은 다 이렇게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 다윗을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예수님의 피가 속죄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은 정말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무서운 말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사탄이 비방거리를 얻어 우리 삶에 무서운 회오리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가 이후로 어떤 끔찍한 비극을 불러오는지 본문 앞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장남 암논이 이복형제간인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겁탈합니다.
아버지의 성적 부도덕이 자식들에게도 그 죄를 합리화시킬 구실을 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그랬는데, 뭐’
이 사실을 안 오라비 압살롬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계략을 꾸며 여동생을 겁탈한 형 암논을 살해 합니다.
‘아버지는 충신도 죽였는데, 저깟 사악한 놈이야’
우리의 죄가 주변 사람들과 상황에 합리적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왜 내 식구들이 나를 타박하고 사람들이 내게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하지?’
그 원인은 과거의 내가, 혹은 평소 무심코 사람들에게 했던 말과 태도가 맺은 열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충신 우리야를 적진에 고립시켜 죽게 하는 작전을 수행했던 다윗의 측근 요압 장군은 어땠습니까?
나중에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요압이 아도니야에게 붙어 다윗을 배신합니다.
다윗에게 충성해봤자 우리야 꼴을 당할지 누가 알겠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짓는 모습을 남들도 다 보고 마귀도 보고 있습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무고한 남편 우리야를 죽인 결과가 이렇게 계속 무서운 재앙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서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성경 말씀을 벗어난 모든 죄에는 갈등, 분노, 복수, 상처가 뒤따르고 이런 감정을 이용하는 데 마귀는 선수입니다.
지난 주 누군가에게, 무슨 일인가로 많이 힘드셨습니까?혹시 내 죄가 마귀에게 틈을 준 것은 아닙니까?그렇기에 죄짓지 말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과 같은 참담한 비극을 만나지 않도록 예수님의 계명대로 잘 지키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깊이 새기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3. 다음은 아버지를 배반하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은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왕권을 이을 적임자라고 믿었습니다.
모든 죄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 데서 나옵니다.
지난주도 내 생각대로만 살았다면 거의 죄의 본성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우리는 지난주에도 정말 알게 모르게 죄 많이 지었습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모든 불신자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계명을 어기는 게 죄인 줄 모르고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압살롬의 마지막 결말은 모든 타락한 인간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이렇게 최후를 맞이합니다.
다윗 군대의 전술은 압살롬의 군대를 수풀로 유인해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야에서는 적은 병력이 노출 되서 불리할 수밖에 없잖아요?그런데 노새를 타고 수풀을 누비며 군대를 지휘하던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만 상수리나무 무성한 가지에 얽혀 꼼짝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 풍성한 머리털이 압살롬의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고 기록했었죠.
자기가 자랑하는 재능에 오히려 발목이 잡히는 사람들 종종 보잖아요?
주인이 나무에 매달린지 모르는 노새는 그냥 앞으로 달려가 버립니다.
압살롬만 나무에 매달린 채 꼼짝 못하게 된 것이죠.
이를 본 요압장군은 전쟁 전에 다윗이 부탁한 말을 무시하고 압살롬을 죽여버립니다.
다윗이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고 장수들에게 간곡히 부탁했거든요.
압살롬의 반역은 이렇게 비참하게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앞에 한 가지 사실을 무심하듯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압살롬이 생전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자기의 대를 이어줄 아들이 없는 것을 한탄해서 스스로 비문을 새겨 이름을 남긴 것이라고 하죠.
압살롬은 땅에서 자신의 존재가 이어지는 혈육이 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이것은 축복의 땅을 얻지 못했다는 걸 상징합니다.
그런데 앞 14장에 보면 이런 진술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이 있더라
이게 어떻게 된 말입니까?
그 사이에 세 아들이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사실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압살롬의 수려한 외모, 사람의 환심을 사는 정치적 능력, 번성했던 가문, 자랑스럽던 모든 것이 점점 사라지고 마지막 순간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죠.
무엇인가를 잔뜩 가지는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보니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구원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니라
압살롬이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그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갈라디아3장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우리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셨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죄로 인한 저주로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대신 저주 받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은 통곡하죠.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아무리 부모라 한들 자식의 죄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범죄 한 자식 대신 부모가 형을 당하는 제도는 없잖아요?
오늘 말씀은 자기 죄로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다윗의 비통함을 전할 뿐입니다.
33절,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더라면
인간으로서 당하는 가장 뼈저린 슬픔의 장면에서 혹시 무언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생애 중 극강의 비통함 속에다 하나님 자신의 아픔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배신하고 죄의 댓가인 저주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애통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위해 대신 죽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자식을 위해 할 수 없었던 이 대속의 사랑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다윗만큼 깊이 깨달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우리를 대신해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시편을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가장 큰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딸네 집을 방문한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잠깐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서원이가 사는 보스톤까지는 인천공항에서 직항 비행기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표 값이 좀 비싸서 시애틀에서 갈아타는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환승시간이 한 시간 반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시애틀에선 환승만 하고 보스턴에서 입국심사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먼저 도착한 시애틀에서 입국심사를 하더군요.
입국심사장에 줄이 까마득한 걸 보고 아차 싶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줄이 줄지를 않아서 불안불안 했는데 결국 보스톤행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공항관계자는 입국심사로 늦었기 때문에 다음 비행기로 연결해 준다고 염려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비행기 시간도 놓치고 나서야 입국심사가 끝났습니다.
서둘러 항공사 데스크로 가니 그 다음 비행기표를 다시 끊어 주더군요.
한 여섯 시간을 기다려 비행기를 타려고 게이트로 갔더니 비행기 예약이 만석이라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음 비행기 티켓을 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기다렸던 그 비행기도 남았던 몇 개 좌석을 VIP에게 먼저 배정해 주고 또 자리가 없어서 타지를 못했습니다.
만석이면 밀리고, VIP가 오면 먼저 좌석을 내주다보니 차례가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난생 처음 공항에서 밤을 지새게 되었습니다.
정말 시애들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 것이죠.
항공사에선 계속 다음 비행기 티켓을 쥐어 줬지만 알고 보니 그건 좌석번호도 없는 스텐바이 비행기표였던 것입니다.
네 번 비행기를 놓치고 나니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정말 이대로 공항을 벗어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보낼 것 같더라구요.
아무리 항의해도 원칙이 그러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희 남편이 영어를 좀 하지만 영어로 싸울 만큼 잘 하진 못합니다.
따져도 너무 예의바른 점잖은 말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 직원이 나와 우리 이름을 부르며 찾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이젠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보스톤 공항에 도착해 있는 짐 가방에서 김치냄새가 너무 난다는 것입니다.
보스톤에 사람이 있으면 먼저 짐을 좀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서원이한테 연락을 해서 사위와 둘이 짐을 찾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대책 없이 공항에 머물게 한다고 둘이 너무 흥분하더군요.
그리고 어떻게든 따져서 좌석을 구해 놓겠다고 하는데 왠지 믿음이 가더라구요.
나이 먹으면 그래서 자식 의지하게 되나봅니다.
그리고 영어 잘하는 사위가 야무지게 따져서 좌석번호를 받아 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먹고 있는 약들이 다 먼저 보낸 가방에 들어있었거든요.
부모님께 무슨 일 나면 책임지겠냐고 따져서 결국 비행기 좌석을 먼저 배정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 좌석을 받고 나니 그 안도감과 기쁨이 어땠겠습니까?
입장이 보장 된 티켓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꼈습니다.
가짜 티켓이 있더라구요.
나중에 천국 문 앞에서, 죽음의 순간에, 보장받은 완벽한 티켓이 있으십니까?
단지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는 안전한 티켓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정확하게 예수님의 구원의 피가 인증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 성찬식을 나눌 때 예수님께서 ‘내 아들아, 차라리 내가 죽고 네가 살거라’하는 그 음성을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저주 받을 내 대신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완벽한 구원을 보장해 주심을 믿고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무엘상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무엘하2장1절-11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다윗의 나라) (1) | 2024.01.12 |
---|---|
사울이 가고 다윗이 온다(사무엘하1장1절-12절) 송구영신 (2) | 2024.01.05 |
여기까지 도우셨다 (창립주일 설교- 사무엘상7장) (0) | 2019.02.17 |
사무엘상15장1절-9절 (아말렉을 진멸하라) (0) | 2018.06.27 |
사무엘하9장1절-13절 (다윗과 므비보셋) (0) | 2018.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