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울이 가고 다윗이 온다(사무엘하1장1절-12절) 송구영신

남수연 2024. 1. 5. 01:08

2023년을 보내고 2024년을 맞이하는 시간 앞에 있습니다.

올해를 뒤돌아보면 힘든 일들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 잘 이겨낸 것을 감사 드립니다.

올해 마지막 끝에 와서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들려왔죠.

이선0배우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에 제가 이선0씨가 남자 배우들 몇 명과 해외여행을 다니는 프로를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선0씨를 보면서 좀 의아했습니다.

기름기가 쫙 빠진 까칠해진 얼굴과 무표정을 넘어 공허한 표정이 마치 나는 세상에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사람도 삶이 참 무거웠나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 도봉구 한 아파트 화재로 생명을 잃은 한 가장의 소식도 너무 마음이 아팠죠.

불길을 피해 7개월 된 딸을 이불에 감싸 안고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렸는데 아이는 살았지만 아빠는 머리를 부딪쳐 끝내 숨졌습니다.

아이가 없었다면 4층 정도 높이에는 골절상 정도만 당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분이 독실한 크리스찬 약사로 주변에 너무 좋은 사람이라 알려져있더군요.

성실히 일해서 18평 아파트에서 30평아파트로 이사한 지가 얼마 안되었다는 것에 더 안타까웠습니다.

또 한 분은 지난 11월에 소천한 안양샘병원원장 박상0장로님입니다.

유명한 기독의료인이고 집안이 대를 이어 정말 많은 봉사와 헌신을 한 분입니다.

이번에도 베트남 선교를 갔다가 마지막 날 피로를 씻을 겸 바다 수영을 나갔다가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지난 주에 뒤늦게 기사를 보고 정말 놀랐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65세이고,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볼 때마다 이 땅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구나, 이것이 죄의 결과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사는 동안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아름답게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본 노인의학 전문의 루시 폴록이 발견한 지혜는 세 번에 한번은 죽음을 이야기하자라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상기하고 잘 죽기 위해서도 죽음을 상기해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배경엔 사울왕의 죽음이 있습니다.

사울이 죽어야 다윗의 시대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죽어야 할 사울이 무엇인지를 찾아 청산하고, 다윗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예배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1. 다윗이 청산해야 할 것은 시글락입니다.

우리는 내게 시글락이 무엇인지를 적용시켜보면 되겠죠.

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 이틀 머물더니

1) 시글락은 다윗이 머물면 안될 곳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왕으로 기름부으신 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쫒겨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중에 때로 더 고된 시기가 있는데, 그것은 필시 우리의 연단을 위해서입니다.

그때는 믿음으로 버텨야지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주 푸틴의 숙적 나발니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나발니는 3년 전 푸틴의 독살시도로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죠.

수감 중이던 나발니가 최근 행방이 묘연해 국제사회가 신변을 걱정하던 중러시아 최북단 교도소에서 발견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정적이 되는 것은 고난의 행군을 의미하죠.

푸틴이 나발니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누가 죽였는지 다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으로서 굳이 그런 오명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는 것이죠.

여러 죄목을 만들어서 종신형으로 감옥에 집어 넣어두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 당시에는 그런 걸 신경쓸 필요도 없습니다.

권력자는 언제든 숙적을 반역죄로 처단할 수가 있었던 때죠.

다윗이 사울의 살해 시도를 피해 도망 다닌 지가 십년이 넘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블레셋의 도시인 시글락에 망명했을 때입니다.

처음엔 다윗이 어떻게든 이스라엘 안에서 피신을 다닙니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 다윗의 은신처가 있던 광야에 가 보았습니다.

그냥 사방이 한없이 돌만 보이는 광야입니다.

그때 다윗이 데리고 다니던 용사들과 사방에서 찾아온 잡다한 사람들이 육백 명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잖아요?

양식을 구하려 인근 마을로 내려가면 사울에게 보고가 들어가 군대가 득달같이 쫒아옵니다.

심지어 다윗의 도움을 받았던 성읍도 똑같았습니다.

그런 생활에 지친 다윗이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블레셋왕은 다윗과 병사들을 이용할 요량으로 망명을 받아 주고 시글락이란 마을을 준 것입니다.

시글락은 연단의 시기에 지쳐서 하나님의 뜻을 피해 피난 가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짐짓 외면하며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시글락입니다.

 

2) 시글락에서 1년 반을 머물던 중에 블레셋과 사울왕과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처음에 시글락은 피난처 같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쫒아오지 못하는, 처자식들과 발 뻗고 잘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미안함은 있었지만 안전한 피난처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좀 벗어난다고 금방 재난이 닥치고 삶에 어려움이 닥치지는 않습니다.

믿음대로 사는 걸 포기하고 적당히 사니 몸도 마음도 편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예배 한 주 빠져도 몸이 푹 쉬는 것 같잖아요?

그러나 다윗을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두 나라 간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에 망명한 처지니 용병으로 나가 이스라엘과 싸워야 할 난감한 상황이 되는 것이죠.

이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왕이 전사합니다.

만일 참전하기만 했어도 다윗은 모시던 사울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있어서는 안될 곳에 머물렀기에 생긴 일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오죽했으면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 숙적인 블레셋에 망명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이런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글락에서 당하는 일들은 모멸과 수치와 진퇴양난의 위기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 다윗의 위기를 막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없다면 성경의 다윗도 없고 오늘의 우리도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했던 시글락에서 만난 위험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지 않으셨다면 진짜 우리는 큰 곤경에 빠졌을 것입니다.

저도 원수에게 권한다는 지주택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블레셋의 장군들이 먼저 다윗과는 함께 전쟁터에 나갈 수 없다고 나섭니다.

전쟁터에서 사울왕의 편에 서서 우리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게 돼서 다윗은 위기를 벗어나 부하들과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3) 와서 보니 이번엔 아말렉이 시글락을 빈집 털이 하듯 싹 털어간 것입니다.

마을을 불사르고, 성에 있던 여자들과 노약자들을 다 잡아간 것이죠.

시글락에 머문다면 이런 문제들이 줄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병사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울다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제사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진짜 위기에 처하면 나를 도와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잖아요?

이번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잃은 것을 다 찾아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이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맹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사울왕과 그의 아들들이 다 전사합니다.

다윗이 일 년 반만 더 견디고 사울왕이 패배에 빠진 순간 도왔다면 다윗의 왕위 등극은 그림이 달랐을 것입니다.

사울왕 사후에 이스라엘 국민들이 다윗을 즉시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던 빌미가 되었던 것이죠.

정치도 그렇잖아요?

싸워야 할 때 같이 싸우지 않고 자꾸 빠지는 사람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죠.

올해 우리에게서 시글락은 무엇이었일까요?

신앙의 곁길은 결코 피난처가 못됩니다.

힘들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정로에서 버텨야 합니다.

올해도 많이 버텼지만 다윗에게 남았던 그 1년 반을 믿음에 굳게 서서 내년에도 잘 버티시길 축원드립니다.

 

2. 두 번째로 청산해야 할 것은 사울입니다.

1) 우리 밖에 있는 사울과 우리 안에 있는 사울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아직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불타서 폐허가 된 시글락에서 이틀이 지난 것입니다.

이틀 동안 절망 속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무너진 시글락을 다시 짓고 살아야 하나, 아니면 다른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러나 다윗이 모를 뿐이지 이미 사울은 죽었고 다윗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외부의 적입니다.

올해도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죠.

일년 동안 다윗과 같은 이런 불가능한 환경과 상황을 벗어나고자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아직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 힘든 문제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울의 죽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소식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진짜 전전긍긍하던 문제인데 의외의 방법으로 풀어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겼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벌써 정해 놓으셨습니다.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이 아직 들려오지 않은 것이죠.

우리를 힘들게 하던 사울의 죽음의 소식이 새해 기쁘게 들려오길 계속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사울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 사울의 죽음을 알리는 말에서 우리 안에 있는 사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왕의 진영에서 도망쳤다는 한 청년이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다윗은 궁금하던 차에 전쟁이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전쟁은 패배하고 사울과 요난단이 죽었다는 참담한 말을 전합니다.

다윗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청년병사는 자기가 본 사실을 이렇게 고합니다.

6,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마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 데

우리는 여기서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있다는 말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기댄 게 아니라 자기 창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항상 사무엘의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사울 평생에 전쟁이 있었고, 병사들을 모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없으니 평생 적들과 싸워야 했던 것이죠.

한편 나중에 다윗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방 대적에게서 평화를 주셨다고 하죠.

항상 자기 힘으로 적들과 싸워야 했던 사울은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사울이 의지했던 것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이었던 것이죠.

마지막 순간까지 위태하게 의지하고 있던 것이 자기 창이었다는 것이 그 허망함을 말해줍니다.

결국 사울이 의지했던 군사력과 전쟁 무기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사울의 군사력들이 다 있습니다.

다급할 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할 것들을 신자들이 악착같이 모으며 삽니다.

, 건강, 사람, 세상의 성공, 가족, 실력.

나를 더 안전하게 보장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올해도 그걸 잡으려 쉬임 없이 달려왔는지도 모릅니다.

이거다 생각하고 쫒았지만 기댈 것 없는 창 자루라는 걸 뼈아프게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환난이 닥쳤을 때 백방으로 손을 써봐도 안되는 일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 생각했던 우리 안의 사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믿음으로 청산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사울의 죽음을 알린 청년병사에게서 우리가 청산할 것을 발견합니다.

청년은 창에 기댄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였다며 사울이 쓰고있던 왕의 관과 팔찌를 다윗에게 내놓습니다.

사실 사울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이게 아닙니다.

앞에 사무엘상 마지막을 보면 사울이 부상을 당한 것은 사실이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호위병사에게 말하지만 차마 사울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스스로 자기 칼에 엎어져서 자결하고 호위병사도 자결합니다.

아마도 그걸 보았던 이 청년이 다윗에게 보상을 바라고 혼란 중에 왕관과 팔찌를 벗기고 무용담을 꾸며서 다윗에게 가져왔던 것이죠.

세상 모든 권력자들은 청년의 공로를 추켜세우고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나의 적을 함께 원수로 알고, 내게 충성한 자는 상을 받는다는 걸 일부로라도 보여주는 게 세상 권력자입니다.

지난 주 뉴스에 보니 연말 무슨 회의에 김정은 측근 3인방이 대놓고 신형 벤츠를 타고 등장했다고 하더군요.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를 받고있는 북한에는 어느 나라도 고가의 사치품을 팔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비웃듯이 버젓이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공개한 것입니다.

또 자기에게 충성을 바친 사람들에게 환심을 쓰고 너희도 충성하면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청년은 다윗을 그런 세속의 권력자로 보았던 것이죠.

우리 안에도 이 청년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기회다 싶으면 무엇이든 이용하려는 게 사람 본성입니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남을 이용하려는 마음은 참 교묘합니다.

결국 이 청년은 자기 입으로 날조한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지 않아도 될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이런 걸 탐욕사라고 하죠.

다윗은 어땠습니까?

무고하게 자기를 죽이려하고 인생을 망치려 한 사울의 죽음에 옷을 찢고 통곡하고 금식했습니다.

로마서1220절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길 계획했는지 이해가 되죠.

새해엔 탐욕사하지 않도록 내 안의 그 청년을 청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돈도 주신 범위 내에 맞춰서 살고, 건강도 숨쉬는 것에만도 감사하고, 내 맘대로 안되는 상황들도 버티고 견디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이라도 생각해 보면 분명히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울은 가고 다윗이 오는 새해가 밝았습니다.

사울의 나라는 세속나라를 상징하고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새해에도 하나님이 통치하시길 소망합니다.

아직도 우리 삶에 어두움이 있다면 아직 사울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미 다 승자들입니다.

새해엔 세속적인 힘을 의지하는 대신 진짜 힘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또 나의 본능에서 나오는 탐욕에 의해 살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청결한 마음과 정직함,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태평성대를 누렸던 때는 다윗의 시대입니다.

다윗이 다스린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셨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와 우리가족들과 가정과 일터와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