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nrPXgCEqGos
새해가 시작된 지 두 주일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각오를 다지고 새해를 시작했는 데, 뭐가 좀 달라지셨나요?
이렇게 올해도 변하지 않고 똑같이 살아간다면 믿음으로 사는 게 뭐가 다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죠.
오늘 3장은 다윗의 왕조가 세워져 가는 과정인데, 좀 묘합니다.
마치 요즘 영화 ‘서울의 봄’ 같은 쿠데타 상황이 느껴지죠.
배신과 권모술수, 이해타산이 복잡하게 엮이며 나라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징하는 다윗왕조를 세우시는 데, 방법이 세속나라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여 의아하죠.
그렇지만 지금도 사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보다 오늘 다윗의 나라가 우리와 더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물론 성령충만하면 우리에게도 예루살렘교회가 나옵니다.
다윗의 생애엔 우리처럼 미숙하고 야비하고 밉살맞은 부분들이 죽을 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과 삶은 분명히 하나님께 맞춰져 있었습니다.
목적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큰 죄를 짓지 않고 괜찮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에 가수 간미0 씨가 남편의 전도로 교회를 처음 가게 되었는데, 설교를 가만히 들어보니 전부 자기 생각하고 똑같았다고 합니다.
속으로 ‘나는 하나님을 안 믿어도 벌써 저렇게 살고 있는데, 굳이 교회를 다녀야 할 필요가 뭐지?’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보다 더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지난 주 한 야구선수의 집이 나오는 인터넷 영상을 보았습니다.
텍사스에 있는 오천오백 평 집이 나오는 데, 집에 화장실이 14개였습니다.
처음엔 ‘이게 다 뭐지?’ 싶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고 살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 선수의 가족들이 한국집에서 오랜만에 만난 모습이 나오더군요.
평소 추선수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아주 반듯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세 자녀들을 교육하는 걸 보니 선수로만이 아니라 부모로서도 대단히 노력하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아이들도 우리 말을 아주 잘 하게 가르쳤더군요.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식사준비 하는 엄마를 돕고, 서로를 존중하고 위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실 가족보다는 영화 속에 나오는 그런 가족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막내 딸은 아빠부터 시작해 나이 순으로 가족들이 수저를 들고 나서야 맨 끝에 수저를 들더군요.
요즘 우리나라 식탁에서도 거의 보기 힘든 진기한 모습이죠.
이 사람 본인이 옳고 그른 것에 기준을 갖고 있고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 시키는 모습에 좀 놀랐습니다.
선수 생활이건 가정생활이건 저렇게 철저히 해 낼 수 있을다는 게 본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한 가지인들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없어져 버리는 때가 올 텐데, 남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따른 게 남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외한 게 남고, 힘겹게라도 순종한 게 남죠.
우리는 사는 목적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고, 부족해도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뜻하시는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연약해도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 것입니다.
오늘 다윗 왕조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우리 삶의 막후에서 일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알고 등장인물들에게서 교훈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1. 다윗의 나라가 점점 강해지고 있던 중 3장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난 주 2장에서 다윗은 유다지파에 속한 헤브론에서 왕으로 즉위합니다.
북쪽 열한 지파는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웁니다.
나라가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로 오늘 본문까지는 칠 년 정도의 꽤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1절을 보면 양측 군사들 사이엔 계속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판세는 완전히 다윗에게로 넘어 온 것이죠.
이 정도면 다윗이 왕국을 통일하려고 움직여 볼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칠년이 지나도록 다윗이 꼼짝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다 할 하나님의 사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 나라이고 피흘리면 안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부 총질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걸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기다린 7년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계속 일하고 계셨습니다.
역대상12장을 보면 당시 북쪽 지파에서 많은 장수들이 군사들을 데리고 매일 다윗에게로 돌아왔다고 기록합니다.
때로는 내가 나서야 하지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면 기도만 하고 기다려도 되는 일이 많습니다.
사실 어려운 일이야 우리가 나서서 될 일도 아니잖아요?
올해도 그런 문제들 다 있으실 텐데, 믿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판세가 점점 우리에게 기울고 분명히 하나님의 뜻대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1) 그런 다윗에게 기다렸던 통일왕국을 이룰 사건이 일어납니다.
북쪽 지파를 다스리던 이스보셋왕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그 소용돌이를 몰고 옵니다.
전에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왕과 요나단을 포함한 아들들이 다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마도 어리고 약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심약한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군대장관 아브넬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것이 북쪽 지파의 정세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에게 리스바라는 첩이 있었습니다.
아브넬장군이 이 리스바를 자기의 여자로 취한 것입니다.
왕의 후궁을 취한다는 것은 치정보다는 보통 정치적인 면으로 해석됩니다.
왕 같은 권력을 가졌다는 자신감이나 과시에서 나오는 것이죠.
이스보셋이 이걸 보고 있자니 왕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큰 용기를 내서 아브넬을 불러 따집니다.
그러자 적반하장으로 아브넬이 오히려 이스보셋에게 분노를 터트립니다.
‘진작 다윗이 앉았어야 할 왕좌에 앉혀준 게 누군데, 감히 나를 유다의 개머리처럼 혼내다니, 내가 이 나라를 맹세코 다윗에게 돌리겠다’고 선전 포고를 합니다.
그 말에 이스보셋은 두려워서 한 마디도 못했다고 하죠.
그리고 아브넬은 내친김에 다윗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내가 열한 지파를 가져다 당신에게 바치겠다는 것이죠.
아브넬의 속셈이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기울어 가는 사울 집에 있는 것보다 떠오르는 다윗의 나라에서 일등공신이 되겠다는 것이죠.
이미 아브넬은 이것을 저울질했고, 마침 구실을 찾은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게 기다리던 통일의 기회가 온 것일까요?
다윗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피 흘리는 통일도 아니잖아요?
기회일까요, 위기일까요?
우리가 읽은 본문 만으로는 얼핏 기회일 것 같지만 위기입니다.
다윗이 이런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에 대해 신중하게 물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시글락 때처럼, 또 칠 년 막판에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2) 다윗의 머리도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다윗이 명석하고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잖아요?
머리가 좋은 사람은 일이 생기면 머리가 저절로 돌아갑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어떻게 할지 순식간에 계획이 나오죠.
다윗이 하나님께 묻기도 전에 벌써 계산이 다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꾀가 많으면 제 꾀에 잘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넘겨 짚어 청사진을 혼자 그렸다가 안되면 더 낙심하는 게 똑똑한 성도들입니다.
신앙은 언제든 앞서지 않고 따라가는 게 더 유리합니다.
뒤따르는 신앙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강한 신뢰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죠.
다윗은 먼저 사울의 딸이자 자기의 아내였던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앞에 보면 이미 아내가 여섯 명이나 되는데요.
이 결정 하나에도 몇 가지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왕에게 쫒겨 다니느라 아내를 놓친 것이 아쉬웠을 테고, 정식 결혼한 아내니 데려오는 것도 틀리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딸을 다시 아내로 데려옴으로 사울을 따르던 북쪽 지파에게 메시지를 주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사위라는 점이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줄일 수가 있을 거라는 계산인 것이죠.
또 사울왕의 딸인 미갈이 남에게서 자식을 낳게 되면 언제든 다시 사울왕조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도 미갈을 데려오는 게 좋은 것이죠.
다윗의 신임이 필요한 아브넬은 당연히 미갈을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보셋왕에게도 전령을 보내 왕의 누나인 나의 아내 미갈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아무리 아브넬이라 해도 마음대로 왕녀인 미갈을 데려갈 수는 없잖아요?
힘이 빠진 이스보셋 편에서는 누나를 다윗에게 보내 화합하는 게 더 낫다는 계산이 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격변기에 사람들의 정치적인 계산들이 서로 얽혀 한편의 역사 드라마가 3장에서 씌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3) 그 와중에 참 서글픈 남자가 보이죠.
미갈과 재혼한 발디엘이라는 사람은 아내를 뺏기는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발디엘이 울면서 미갈을 쫒아갔다는 기록을 왜 성경이 남겼을까요?
이미 남의 아내가 된 미갈을 굳이 자기 목적을 위해 데려오는 냉정한 정치인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이 장면은 훗날 다윗이 우리야에게서 밧세바를 뺏어오는 장면의 복선이기도 하죠.
이스라엘 역대왕 중 최고의 왕 다윗의 약점을 성경은 숨김없이 기록합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선조가 되고, 오실 메시야에 대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지만 그 역시 그의 후손이신 메시야의 대속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죄인인 것이죠.
예수님은 티끌 만한 죄나 오점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산상수훈에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그렇게 살지 못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기이하고 놀라우신 구주이십니다.
2. 그러나 술술 풀릴 것 같던 모든 일은 사람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1) 한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면서 이 계획은 완전히 틀어져 버립니다.
22절에 나오는 요압장군입니다.
다윗의 신복들과 우두머리인 요압이 적군을 치고 노략물을 들고 헤브론으로 귀환합니다.
여기서 요압이라는 인물이 다윗 왕국에 뜨거운 감자 같은 사람입니다.
요압이 이 조약을 어떻게 뒤집어 놓고 다윗을 위태롭게 하는지가 본문 뒤로 이어집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다윗에게 쫒아갑니다.
그리고 아브넬을 살려 보낸 것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적군의 장수가 염탐하러 온 것을 모르고 그냥 잘 대접해서 보냈냐는 것이죠.
왕이 지금 자기 정치를 하는 데, 장군이 선을 넘는 간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몰래 전령을 보내서 편히 가고 있는 아브넬을 다시 불러옵니다.
그리고 성문에서 아브넬을 살해합니다.
성경은 요압이 아브넬의 배를 찔렀다고 꼭 집어서 전합니다.
왜냐하면 앞 2장에서 요압과 아브넬이 전투 할 때 아브넬의 창이 요압의 동생 아사헬의 배를 찔러 죽였기 때문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동생의 복수죠.
둘째는 북쪽 지파의 수장인 아브넬이 통일의 공을 세우고 다윗에게 돌아오면 현재 최고 권력자인 자기 자리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다윗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웬 인간들의 피 튀기는 암투가 세상 국가들과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의 나라는 이 세상 가운데 세워지는 것이고,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은 다 죄인들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지금 뜻을 이루시는데 천사들이 와서 일하는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별로 다를 바가 없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갑니까?
오늘 나오는 인물들과 다름없이 다들 먹고사는 문제, 성공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죠.
그러나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겠습니까?
2) 하나님은 아브넬과 다윗의 계산을 요압의 계산으로 막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 계획을 막으셨습니까?
21절을 보면 아브넬이 자기가 다윗에게 온 나라를 다스릴 수 있도록 권력을 주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메시야의 왕국을 상징하는 다윗의 나라는 아브넬이 갖다 바치는 게 아닙니다.
다윗 또한 머리로 굴려 많은 수를 두지만, 우리 생각대로 하나님나라가 진행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두시면 우리는 벌써 큰일을 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내 믿음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도,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 도와준다면 반드시 자기 지분을 요구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공짜 밥은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올해도 남의 도움 안 받고 사는 게 제일 좋겠지만, 내 힘으로 안되는 일을 만나면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하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에게 뭔가 바라고 기대한다는 게 제일 치사하다는 걸 아실 것입니다.
사실로 따져도, 다윗이 감지덕지 아브넬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17절에서 다윗과 조약을 맺은 아브넬이 북쪽 장로들에게 뭐라고 말하나 보십시오.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미 하나님이 다 작업을 해 놓고 계시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보면 아브넬이 죽은 뒤에 북쪽 지파의 장로들이 제 발로 걸어와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나섭니다.
괜한 권력을 아브넬에게 줌으로 다윗왕조에 큰 문제가 될 뻔한 것을 하나님이 막으셨던 것이죠.
이것은 또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실 나라에 인간의 공로가 끼어들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홀로 대속으로 완수하신 주님의 나라를 감사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요?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결국 그 보상을 하늘에서 주시기 위해 우리를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실한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를 위해 헌신한 뒤, 한결같이 하는 말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으로 큰 정치적 위기를 만납니다.
1) 북쪽 지파와의 문제입니다.
북쪽 지파에서 당연히 다윗이 아브넬을 죽였다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북쪽 지파의 신뢰를 쌓아가던 다윗의 공든 탑이 한순간 무너지게 된 것이죠.
뒤에 보면 다윗은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정말 혼신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여 백성들에게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아브넬의 죽음을 국장으로 치르며 자신이 상여를 따라갑니다.
아브넬을 죽인 요압을 저주하고, 아브넬을 위해서는 애가를 지어서 부릅니다.
장례하는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하며 슬퍼합니다.
그런 다윗의 노력으로 사람들은 다윗과 아브넬의 죽음이 상관이 없다는 걸 비로서 인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정성 어린 대처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신뢰감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일이 크게 잘못된 것 같을 때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다윗이 모든 걸 동원해 위기를 극복하는 걸 우리도 잘 배워야 하겠죠.
다윗이 시글락에 망명갔던 때를 떠올리며 분명히 후회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수와 잘못된 판단으로 일이 어렵게 될 때가 있죠.
성급했던 것을 회개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도한다면 일을 수습할 지혜를 주시고 오히려 뜻밖의 좋은 결과도 얻을 수도 있다는 것도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 그러나 다윗이 요압에 대해서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하죠.
39절,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우리 인생 드라마에도 내 편만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들도 섞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야구선숭의 둘째 아들이 그동안 룸메이트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아빠에게 이제 일인실 기숙사를 좀 쓰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아빠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하는 말이 룸메이트가 자기에게 불평이 너무 많고 성격이 너무 안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야구선수 아빠가 단호히 안된다고 말합니다.
네가 살아갈 세상에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는데 안 맞을 때마다 피하겠냐는 것입니다.
누적연봉이 천구 백 억인 사람이 아이를 기숙사 2인실에 넣은 것도 특이하죠.
아이들이 불편을 느끼기도 전에 다 알아서 해주는 요즘 부모들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돈 없는 부모들은 자식 기 살리겠다고 무리해서 최고로 해주는데,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당당하게 자식을 안 좋은 환경에 두어서 훈련시키더군요.
이 사람이 아는 것이죠.
그 훈련과 인내가 얼마나 유익한지를.
우리의 시련과 연단이 하나님께 그러신 것입니다.
사람이 40대가 넘어가면 전두엽이 점점 줄어든다고 합니다.
전두엽은 이마 쪽에 있는 뇌로 배려, 인내, 창의성, 판단력과 감정을 주관합니다.
전두엽이 줄어들면 의욕이 없다, 아이디어가 줄어든다, 같은 패턴만을 고집한다, 쉽게 화가 난다, 대화가 항상 똑같다.
매사가 시들하고 재미도 없어지고 우울감이 자주 든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또 생각이나 관심이 점점 한쪽 방향으로 치우칩니다.
검은색과 흰색만 있고 그 사이에 다양한 회색지대가 없어지는 것이죠.
‘늙지 않는 뇌의 비결’이라는 책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회색지대를 많이 늘려야 한다고 하더군요.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자꾸 그렇게만 살면 전두엽이 점점 더 줄어듭니다.
나는 그런 것 절대로 못 해, 나는 그런 사람 이해가 안돼.
나는 한번 아니면 아닌 사람이야.
이런 말이 자꾸 늘어나면 안됩니다.
나이 들면 정치적인 성향도 계속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래서 지지하지 않는 쪽 이야기도 자꾸 들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우리 직장이나, 혹 가정에서도 함께 있는 게 괴로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고, 나를 못살게 구는 사람도 있잖아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환경이나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을 평생 끼고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두시는 것을 어떡하겠습니까?
다윗에게 오늘 깊은 고민과 두려움을 주는 요압장군을 왜 죽을 때까지 곁에 두셨겠습니까?
다윗이 죽을 때까지 요압은 건강하게 살아있었습니다.
다윗을 다루시는 데 죽는 순간까지 요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곁에 갈구는 사람을 왜 두셨겠습니까?
세상이 좋은 사람들하고만 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뭔가 불편해야 안일한 죄에 빠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사람하고 함께 할 때보다 싫은 사람하고 함께 할 때,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 분명히 우리가 더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적어도 내가 얼마나 옹졸하고, 포용력이 부족하고,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사람인지라도 절실히 볼 수 있게 되죠.
올해도 우리 곁에 있는, 내 힘으로 당해내기 힘든 그런 사람과 문제들과도 잘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굼뜬 것 같아도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다윗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왕조를 통해 예수님의 나라를 빌드업 해 가십니다.
올해도 연약한 우리들을 도와주시며 주님의 선하신 뜻을 조금씩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도 오늘 본문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해서 선을 선택하며 살아야겠지만, 타인들에 대해서는 회색지대를 두고 마음을 넓혀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잠언에서 14장4절에서 기가 막힌 말씀을 하죠.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뒤에 보면 다윗의 나라가 굳게 서는 데 요압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오늘도 욥이 나서서 큰 실책을 막아주게 하셨잖아요?
올해도 우리에게 붙여 놓으신 환경과 사람을 통해 더 성장하고, 또 복음을 전할 대상으로 알고 잘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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