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CGS6WoINu8
우리가 요즘 다윗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윗의 나라는 우리가 지금 구원받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나라를 구약성도들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새 수도로 삼았죠.
이 예루살렘이 신앙의 중심지가 되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앙 관계는 언약궤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십계명 돌판이 들었죠.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것에도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 돌판이 담긴 법궤를 덮는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두 그룹이 마주 보고 날개를 펴서 모은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두 그룹 사이에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속죄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백성들이 우리처럼 계명을 지키지 못했을 거잖아요?
속죄해 주셔야죠.
그러니까 법궤는 신앙의 두 핵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계명 돌판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공의, 그것을 지키지 못하기에 받을 심판을 대속자의 피가 덮어주는 사랑.
법궤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법궤는 광야생활 중에 백성들을 인도했고,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땅에 입성하도록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거룩한 성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매일 동행하시고 천국에 이르도록 인도하시는 것과 같죠.
역대상13장에서 오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좀 더 상세히 다룹니다.
역대상 말씀에서 보충하며 오늘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법궤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수레를 몰던 웃사가 죽는 뜻밖의 사건이 터집니다.
국가의 경축일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죠.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가 막 태동하던 때 비슷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부정직한 헌금을 드렸다 죽었던 사건입니다.
두 사건 사이의 시간은 천년의 간격이 있고, 구약과 신약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사건의 본질, 발생 이유, 담긴 교훈은 똑같습니다.
이런 교훈들은 우리 신앙을 엄숙히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 쓰라린 실패만 신경 쓸 것이 아닙니다.
법궤로 인해 큰 복을 받은 오벳에돔이 있습니다.
또 잘못 된 것을 바로 잡은 뒤 법궤는 온 백성들이 기뻐하는 중에 다윗성에 모셔집니다.
웃사가 죽은 것에만 신경쓰지 마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1.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려는 일차 계획이 실패한 부분입니다.
1) 당시 언약궤가 바알레유다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기럇여아림이라고도 하고, 신약시대 지명은 엠마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부터는 약 15킬로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언약궤가 개인 집에 모셔져 있다는 게 좀 의아하죠.
그렇게 된 사연이 사무엘 상에 나옵니다.
본문으로부터 백 년 전, 사사시대 끝 무렵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엘리제사장 밑에서 섬길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로 나갑니다.
결과는 더 처참한 패배였고 설상가상 언약궤마저 블레셋에 뺏기게 됩니다.
블레셋은 언약궤를 전리품처럼 챙겨 의기양양하게 가져갔지만 언약궤로 인해 큰 재앙이 닥칩니다.
언약궤를 맡은 마을마다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게 된 것이죠.
결국 블레셋 지도자들은 사람은 없이,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돌려 보냅니다.
처음엔 국경 인근 벧세메스에서 언약궤를 받았습니다.
주민들은 대체 언약궤 속에 무엇이 있길래 블레셋이 무서워 돌려보냈나 호기심이 생겨 궤를 열어보았다 70명이 죽습니다.
놀란 벧세메스 사람들은 언약궤를 본문의 아비나답의 집으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마치 폭탄처럼 여기저기 돌려지게 된 것이죠.
아비나답의 집이 산에 있었다는 걸 보면 당시 이스라엘 곳곳에 만들어 놨던 산당이 있는 집이었을 것 같습니다.
엘리제사장이 죽고,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다시 사울왕이 40년을 통치하고, 지금 다윗왕까지 어림잡아 백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백 년이면 까마득한 시간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했고, 요단강 물을 갈랐던 그 법궤는 거의 전설이 된 것이죠.
사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신앙의 상징이 법궤 외에는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법궤를 그 정도로 방치했는지 이해가 잘 안되죠.
사실 법궤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릴 수도 없는 것이잖아요?
다윗은 어떻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하나님의 언약궤를 귀하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다윗의 믿음으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다윗의 광야 망명 중에도 선지자 갓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함께 있었던 것도 요인입니다.
우리 믿음이 바르게 가도록 믿음의 형제들, 신앙의 지도자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2)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웁니다.
명실공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걸 온 국민에게 알리는 국가행사가 되게 했던 것이죠.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이 전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데리고 바알레유다로 갔다고 합니다.
대회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죠.
기럇여아림이 블레셋 국경에 가깝기에 블레셋과의 충돌에도 대비했을 것입니다.
역대하 13장을 보면 이때 삼만 명 군인들 외에 각 지파의 장로들, 제사장, 레위인 등 상당수가 참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법궤 입성의 분위기를 띄워줄 많은 악기들이 동원된 큰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아닌데, 그런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나요?
3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하죠.
법궤는 고핫자손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라 하셨고 제사장이 메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레에 싣고 이동합니다.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있는 법궤가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법궤가 짐짝처럼 소가 끄는 마차 위에 덜렁 놓여져 운반되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죠.
아니나 다를까 나곤의 타작 마당이라는 곳에 이르러 갑자기 소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소는 웬만하면 잘 뛰지 않는 동물이잖아요?
무엇에 놀랐는지 소가 뛰기 시작하자 수레를 따라가던 웃사가 법궤가 떨어질까봐 급히 손을 펴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웃사를 쳐 그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2. 웃사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입니다.
하나님이 왜 웃사를 치셨냐는 것이죠.
웃사에게 그럴만한 문제들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판단을 잘 못하지 않으십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역대하에서는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잡은 것에 진노하셨다고 합니다.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잡은 것이 잘못이라 죽이셨다는 것이죠.
1) 웃사는 성물은 만지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이동할 때는 제사장들이 먼저 지성소 앞 휘장으로 법궤를 덮습니다.
만지기는커녕 보이지도 않게 하라시는 것이죠.
정해진 제사장 외에 성물을 만지면 죽음을 당한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말씀의 경고대로 죽은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설마’라는 샛길을 절대로 두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왜 제사장들은 만져도 죽지 않는 데, 이외의 사람들은 죽었을까요?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사장들이지만 그들은 속죄제물을 드린 뒤 봉사했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한 속죄 제물을 허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십니다.
하나님의 앞에 선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이 살 길입니다.
하나님은 웃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법궤를 수레에 싣게 된 과정에서 좀 따져보겠습니다.
이날 분명히 제사장들이 다 참여했다고 했죠.
법궤를 레위인이 메고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을리는 없습니다.
2절에도 보면 다윗이 법궤를 메어오려고 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왜 계획이 변경돼서 웃사와 아효가 법궤를 수레에 싣고 몰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그 방식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웃사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집에 법궤가 들어올 때도 블레셋이 만든 새 수레에 법궤가 실려서 왔잖아요?
그때 아무 문제가 없었으니 이 방법이 맞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백 년 동안 법궤를 관리했던 아비나답의 가문은 법궤에 대한 가장 큰 권한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지 않았겠습니까?
가정이든, 사회든, 교회든 남보다 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랑이 작으면 더군다나 자기의 희생이 커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크면 아무리 헌신해도 티가 안 나죠.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희생한 만큼 내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웃사의 주장대로 수레를 이용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입김이 더 쎈 것이 오늘 불행의 원인입니다.
내 믿음에서도 하나님 말씀보다 내 입김이 더 쎄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2) 웃사는 왜 그렇게 수레를 고집했을까요?
만일 제사장들이 와서 법궤를 멘다면 웃사를 누가 알아줍니까?
정신의학에서는 인간은 보상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보상욕구 때문에 무슨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법궤를 보관했던 자기를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수레에 싣고 자기가 앞장서서 끌고 가야 사람들이 알아주죠.
웃사는 새롭게 시작되는 신정국가 다윗의 나라에 침투하는 공로주의, 세속주의, 실용주의입니다.
이 사건은 말씀에 도전하는 이런 죄악을 초장에 잡기 위한 즉각적인 심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 이후 헌금 좀 속였다고 죽는 사람은 없었잖아요?
그랬다면 우리가 여태 살아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보기가 되는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 말씀 기준대로 살게 기초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죠.
3) 웃사에게 하나님은 결코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산당들마다 모셔놓은 우상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백 년이 지나는 동안 법궤에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운반하는 대로 움직이고, 아무 말 못 하는 우상과 똑같은 것이죠.
백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던 하나님이 오벳에돔의 집에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11절을 보면 삼 개월 만에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경외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 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법궤를 가나안땅의 우상이나 똑같이 여겼던 웃사는 자기가 마치 법궤 전문가, 법궤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처럼 착각했던 것입니다.
웃사가 그 마음으로 법궤를 다루려는 순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웃사가 하나님 앞에 가장 교만한 순간 죽은 것입니다.
3. 오벧에돔은 사람을 죽인 두려운 법궤를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법궤를 맡게 된 걸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가족 모두가 경외하며 섬겼던 것이죠.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역대상에 보면 오벧에돔의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고 밝힙니다.
오벧에돔의 가족들의 모든 가업에 대박이 났을 것입니다.
가축도 사람도 왕성한 태의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무명가수들이 유명가수가 되려고 경합하는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가 끝났습니다.
우승상금 3억을 받은 사람은 홍이* 이라는 가수입니다.
교사였던 부모는 홍이* 씨가 어렸을 때 해외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 교육선교사되었습니다.
지금은 우간다에 있는 대학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홍이* 씨가 노래에 재능도 있지만 찬양할 때 마음을 사로잡고 큰 감동을 주는 특별함이 있더군요.
마지막 경연곡에서 홍이* 씨가 인후염이 걸린 상태에서 노래하던 중 음이탈실수가 나왔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안타까워했지만 점수는 일곱명 중 여섯번째였습니다.
그런데 문자 투표를 종합한 결과 1등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본선에서 음이탈이 나고도 1등한 사람은 오디션 역사상 없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삑사리가 좀 났어도 우리를 인도하셔서 좋은 결말을 만드시는 하나님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도 마음 속으로 응원했었는데 참 기뻤습니다.
우승하고 집에서 가서 부모님과 이삭형제는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그 말만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틀림없이 그 상금은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 쓰여질 것입니다.
편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한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위로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물질이나 건강이나 그런 복을 받은 것보다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믿음의 복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무사히 다윗성으로 옮겨진 뒤 다윗은 법궤를 위해 봉사할 직분자를 세웁니다.
역대상 15장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오벧에돔과 여히야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이더라
오벧에돔이 부자가 되었지만 그것보다 더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법궤 곁에서 더 하나님을 섬기길 원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같은 마음을 오늘 교독문인 시편27편에서 노래했죠.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역대상 26장은 또 오벧에돔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이렇게 전합니다.
오벧에돔의 자손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한 뒤 이렇게 덧붙입니다.
8절,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5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만 해도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다 능력있고 뛰어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믿고 잘 섬기려는 우리와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자손들과 같은 믿음과 능력을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4. 두 번 째 시도로 언약궤는 다윗성으로 옮겨집니다.
1) 사실 웃사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 인생에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도 딱 부러지게 징계하신 것입니다.
다윗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궤를 통해 다윗왕조를 더 견고히 하고 사람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정치적 의도는 없었을까요?
법궤를 모셔 오는 것이 충분히 정치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우리가 쇼 잘하잖아요?
사람은 처음엔 순수했어도 은연중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웃사가 죽는 걸 보며 다윗의 반응이 뭐라고 나옵니까?
8절,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다윗이 분했다고 합니다.
역대서에는 노했다고 합니다.
다윗이 누구에게 분한 마음과 노를 드러낸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분노를 가질 수 있냐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할 때가 없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 봉사도 안하고, 신앙생활도 잘 안 하면 별로 분노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데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떨까요?
다윗이 삼만 명의 군인들을 차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 모이는 데만도 며칠에, 삼만 명이 먹고 자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죠.
장로들과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모두 초청했잖아요?
아직 왕가의 재산도 없던 다윗에겐 재정적인 어려움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걸 몰라주시고 판을 엎어 버리신 하나님께 얼굴이 후끈해지며 분한 마음이 순간 드는 것이죠.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자동으로 항상 겸손하고 경외하고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다윗도 그렇습니다.
신자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 할만큼 했는데, 외면당한 것 같아 속에 화가 나 있고,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분노를 그냥 두십니다.
이럴 땐 우선 쉬어야 합니다.
다윗의 분노가 어떻게 가라앉는지를 보십시오.
2) 언약궤를 모신 오벧에돔의 소유를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말을 듣고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내게도 좋은 분이셨지’ 그걸 다시 떠올리는 것이죠.
저는 ‘새롭게 하소서’나 ‘내가 매일 기쁘게’라는 기독교 방송의 간증 영상을 자주 봅니다.
여러 성도들에게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셨는지,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서로 나누는 믿음의 교제를 해야 합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오늘 설교에서 어떤 걸 알게 되었는지, 요즘 이런 것이 궁금하다든지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걸 통해서 은혜와 힘을 얻게 됩니다.
3) 다윗은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삼개월 동안 율법을 철저히 연구합니다.
말씀을 잘 배우면 하나님께 화 났던 문제에 대해 오해가 풀립니다.
역대하15장13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다윗은 궤를 메라는 규례를 지키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대로 다스리는 것이 다윗이 해야 할 일입니다.
율법에 관심 없던 남북왕조의 왕들이 백성들을 파멸로 이끈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 초반에 이것을 섬뜩하게 각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안되겠다 싶으면 하나님은 때로 섬뜩하게 징계하십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 다윗은 제사장들에게 궤를 메게 합니다.
4)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나라의 중앙에 옮겨오는 목적을 되찾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궤를 옮겨오는 것이었잖아요?
언약궤를 메고 오는 행렬도 달라졌습니다.
처음엔 삼만 명의 군대가 호위하고 다윗은 왕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정치적인 행사로 보이죠.
그런데 14절에서 다윗은 왕이 아닌, 봉사하는 예배자가 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하나님의 징계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죠.
이제 다윗성에 법궤가 모셔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속죄의 사랑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고,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며 속죄에 크신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웃사의 충격적인 죽음을 통해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단단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법궤가 다윗의 나라의 중심에 있게 되었습니다.
법궤는 죄인들을 자녀 삼으시기 위해 속죄의 제물로 부어지실 예수님의 대속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 자체에 감격하고 감사했겠어요?
다윗도, 웃사도,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각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어떨까요?
하나님과 원수 된 채 살았을 나를 위해 주님의 목숨을 대신하신 그 사랑에만 깊이 감사하며 드리는 예배일까요?
우리 교회가 매 주일 이렇게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예배한다면 오벧에돔에게 주셨던 그 소유와 믿음의 복을 우리 모두에게 항상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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