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여기까지 도우셨다 (창립주일 설교- 사무엘상7장)

남수연 2019. 2. 17. 21:54


https://www.youtube.com/watch?v=Wlfz9XJ4ae0&t=310s

<설교영상>

오늘 창립9주년을 맞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교회가 하나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도 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가 여기 있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학교보다 중요한 것은 당연히 학생입니다.

그러나 좋은 학교가 좋은 학생을 길러내듯이 좋은 신자는 좋은 교회가 길러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의 생일이자 함께 좋은 교회를 세우고 스스로 좋은 교회가 되고자 열심히 달려온 모든 성도님들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왜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먼 길과 불편을 감수하며 교회에 나오시는 걸까?
물론 혈연과 인맥과 지연 같은 관계로 해서 나오게 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이유일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그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의 대인관계에서 티슈인맥이란 말이 있습니다.

티슈처럼 한번 쓰고 버리는 얕은 인간관계를 점점 선호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친해진다고 다 편하고 좋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친한 관계에는 그에 따른 과한 에너지 소모와 피로감도 따릅니다.

친하고도 만나면 즐겁고 편안한 관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불편한 걸 싫어하니 교회 안의 관계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불편과 긴장과 피로도를 감내하며 이렇게 한 교회로 뭉쳐서 같이 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뒤에서 우리를 동시에 막 밀어주시고 있는 것이죠.

오늘 창립주일에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에벤에셀 기념비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이긴 뒤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란 뜻입니다.

사무엘이 이 돌을 세우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님들의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는 은혜를 오늘 모두에게 주시리라 믿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시대는 제각기 소견대로 살았던 신앙의 암흑기, 혼돈의 사사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시대 속에 벌써 답이 들어있죠?

이스라엘은 애굽을 나온 뒤 광야시대 40년을 지나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제가 자꾸 성경역사를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창세기부터 현재의 나까지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믿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다 보면 역사가 한 줄로 이어지고 거기에 살이 붙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의 초창기 약 삼백오십년을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는 왕이 없었고 사사들이 일어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는 삼손이지만 곧 사울왕으로 시작되는 왕정시대를 이어주는 이 사무엘을 마지막 사사라고도 합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더 과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든 성막과 법궤에 대해서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법궤 위에 임재 하셨고 성막을 덮은 구름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엔 법궤가 이동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수아는 성막과 법궤를 실로라는 곳에 모셔 둡니다.

사사시대 내내 법궤는 실로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아직 어릴 때 이스라엘과 서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숙적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세가 기울자 하나님을 좀 이용하려고 실로에 있던 법궤를 전쟁터로 메고 나옵니다.

사람들은 뭔가 이용하려고 하는 머리가 정말 빨리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용당해주시질 않으신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삼만명이나 전사하고 전쟁에서 대패합니다.

게다가 설상가상 메고 나갔던 법궤를 블레셋 군사들에게 뺏깁니다.

참 황당한 일이죠.

블레셋은 의기양양하게 법궤를 메고 돌아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손이 독한 종기로 블레셋을 심판하십니다.

결국 법궤를 감당하지 못한 블레셋은 법궤를 수레에 실어 다시 이스라엘의 국경지대로 돌려보냅니다.

1절에서 읽은 대로 이 법궤를 받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산 위에 있던 아미나답의 집에 법궤를 모셔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기죠?
왜 법궤를 다시 실로로 모시지 않고 아미나답의 집에 두었냐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 후 20년 동안이나 아미나답의 집에 있었다고 합니다.
출애굽 이후 늘 이스라엘국민들의 중심에 거처했던 법궤가 변방의 한 가정집에 유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유는 여러 가지를 추측할 수 있지만 어쨌든 결론은 같습니다.

어떤 이유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다시 중앙성소에 모시고자 하는 열망이 식은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자손들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밀려 나셨다는 것이죠.

어떤 분들의 신앙을 보면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사기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믿고 한편 가나안땅의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도 믿고 있었습니다.

명목상 여호와를 믿을 뿐이지 실제 생활양식은 오히려 바알종교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융합하고 콜라보하는 걸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섞는 것을 유독 싫어하십니다.

레위기에 보면 두 재료로 직조한 옷도 입지 말고,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기독교에 무언가 섞인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이들의 20년 세월은 어땠을까요?
2절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우리 성경으로는 이십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좋은 의미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뒤에서 울부짖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나가지는 않고 현실의 괴로움에 한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이란 나라가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모든 걸 다 걷어 갑니다.

보이는 대로 다 약탈해 가니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잖아요?
그러나 법궤가 20년 그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방치됨이 말해주듯이 하나님을 잊고 산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숨쉬듯이 탄식이 절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받아들인 가나안의 풍요의 신들은 풍요를 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이 이렇다고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사는 죄악과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감춰진 내면엔 이런 냉혹한 삶을 지나온 불쌍한 자기에 대한 연민과 처량함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겉으로 강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무언가 이걸 건드리면 울컥 자기연민이 올라오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슬픔과 애처로움을 감추고 살지만 교회 밖에 선 절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삶으로 바뀌게 될까요?
애통이 극에 달하자 드디어 이스라엘자손들 마음에 하나님 생각이 간절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처지를 한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선지자 사무엘이 이스라엘 국민들을 미스바라는 곳에 소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집되고 모인 공동체는 단순한 군중이 아닙니다.

출애굽한 뒤 시내산 하나님 앞에 백성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거기서 서로 하나님과 백성하자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소집되고 모였다는 것은 바로 이 언약적 관계로 복귀하는 걸 말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 앞에 모여 언약관계로 돌아갔다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백성들이 소집된 모임에서 유래 된 말이 바로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입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부모와 자녀가 된 새언약의 관계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교회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만, 그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교회인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에 우리는 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믿음이 때로 곧 무너질 듯 흔들릴 때가 있지만 신기하게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믿음이 있잖아요?

사방으로 우겨 싸인 환경에 도저히 맞서지 못할 두려움이 생기다가도 신기하게 추스릴 힘이 불쑥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한 교회와 성도들을 무너지지 않고, 무너뜨릴 세력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두려웠던 블레셋을 이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속해 하나님 앞에 모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홀로 신앙으로는 세상의 블레셋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위기는 옵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그 순간,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 옵니다.

사무엘은 너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블레셋에서 건져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러 벌떼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진실 되게 하나님을 믿는데 이렇게 정반대로 상황이 악화 될 때 믿음은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사람들은 적을 보고 공포에 질려 도주하지 않았습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사무엘과 함께 부르짖어 마침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반드시 대적으로부터 보호하고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나 눈앞에 아예 적들이 나타나지도 않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적들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근심하고 두려워하던 일들이 눈앞에서 우리를 위협할 때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전쟁이 있어야 승리도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역사이래로 환난에서 도망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많은 기도제목들 속에서 버티고 이기며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잠언 213절은 우리에게 명쾌하게 가르칩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나님은 교회로 모인 우리들을 반드시 도와주시고 블레셋의 마병들로부터 승리하도록 함께 싸워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교회에는 외형 뿐 아니라 내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였다고 다 참된 교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복귀하기 위해 회개합니다.

자신들의 죄와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선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무엘이 블레셋이 몰려올 때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참된 교회의 표징은 회개와 속죄입니다.

회개만 있어도 안되고 속죄만 있어도 안됩니다.

가나안의 종교들이 하나님 신앙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엔 회개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종교들에 대해 사람들이 관대한 것은 회개하라고 하지 않아서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 낸 것이라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습니다.

회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기복과 기원,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스스로가 신의 간섭에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모든 자연종교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죄성을 불치병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뿌리가 나쁘다는 각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냉큼 가나안종교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죄를 지적받는 걸 싫어하잖아요?

죄를 지적하고 고치라면 다 싫어합니다.

자식들 키울 때 잘못된 것을 고쳐주려고 해봤으면 다 아실 것입니다.

꼬맹이들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온 이스라엘사람들에겐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참된 교회엔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와 하나님께로 그 삶을 돌이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께 무엇보다 이런 회개의 은혜가 풍성히 넘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사무엘은 어린 양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대열을 점검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먼저 어린 양으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제사법엔 속죄를 위해선 동물을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미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했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죄는 말로 미안하다하면 해결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심판을 면하려면 동물이 대신 죽어 속죄해야 할 만큼 철저하게 다뤄지는 게 죄의 형벌입니다.

속죄가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약시대엔 동물제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그 피로 모든 죄를 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님의 속죄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도우심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 위에 세워졌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교회입니다.

미스바에 모인 사람들은 신앙회복을 위해 모였지 전쟁하러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 손에는 무기 한 자루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악의 공격과 삶의 모든 문제를 이기는 가장 큰 무기는 기도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내 손에 들린 무기가 하나도 없다 해도 우리는 더 강력한 기도의 무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응답의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우리 손에 무기가 없어도 얼마든지 이기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자연의 위력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큰 번개와 벼락을 하늘에서 빗발치듯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번개와 벼락에 맞아 죽고 남은 사람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갑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다 끝난 싸움의 잔불을 정리합니다.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사람들이 미스바에서부터 이들을 추격하여 벧갈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10킬로 이상을 쫒아가 일망타진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이렇게 블레셋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이 놀라운 승리를 거둔 사무엘은 쫒아간 그 지점에다 돌로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적들이 눈에 안 보이기까지 좇아가 보니 그곳은 놀랍게도 블레셋 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기념비를 세우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블레셋을 따라오게 우리를 도우셨구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 이런 간증이 넘쳐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교회도, 믿음 안에서 누리는 복된 삶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13절에 의미심장한 말로 이 사건을 마무리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이스라엘의 안전은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이라는 조건이 붙은 것입니다.

사무엘을 중심으로 이들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잘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의 교회로 모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간다면 내년에도 더 미래에도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또 나를 도우셨구나

아직 내게 주어진 것들이 완전하지 않다 해도 오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존재하는 걸 믿는다면 지금 주신 작은 것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밝은 햇살아래 살고 있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합니까?

직장이 있어 출근하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십니까?

우리 곁에 부모와 자식들, 남편과 아내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누군가의 글을 보니 경제가 좋아지면 가족들 옷을 사게 되는 데 순서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애들 옷, 그 다음이 아내 옷, 그 다음 강아지 옷, 마지막이 남편 옷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 집도 좀 그런 것 같습니다.

무거운 가장의 짐을 지면서도 사주는 대로 입는 남편들도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늘 가족을 위해 제일 먼저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아내, 우리 엄마,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합니까?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교회로 세워져가는 주나산의 성도님들도 너무나 귀하고 감사한 가족들입니다.

내일 어디까지 인도하실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금 있는 평범한 행복에 감사하며 삽시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도우신 것처럼 반드시 내일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2019년2월17일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