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그일라주민들의 배신의 대한 다윗의 놀라운 관대함과 긍휼의 인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아주 딴 사람입니다.
육백명의 식솔들을 먹이기 위해 다윗은 나발에게 식량을 구걸하지만 모욕만 당하고 그만 이성을 잃고 맙니다.
분노한 다윗은 사백명의 군대를 이끌고 양민을 공격하러 출격합니다.
다행히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 덕택에 무모한 학살을 멈추게 되죠.
두 얼굴의 다윗이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인즉 이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건 속에는 우리의 인간사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 짓밟힌 자존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본성적인 약점.
이런 다윗과 우리를 다듬고 구원의 계획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또 본문 성경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발견하고 힘을 얻는 시간이 되시길 원합니다.
먼저 다윗이 이렇게 시험에 빠지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인간 다윗의 적나라한 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던 다윗이지만 그도 역시 죄인입니다.
다윗이라고 항상 저절로 성령충만 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성령께서 내면에 주시는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새 내 머리와 세상에서 얻은 경험과 방법대로 밀고 나갑니다.
본문엔 지난 주와 달리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말이 없이 자기 식으로 그냥 밀고 나갑니다.
다윗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오늘 사건의 발단은 1절에서 시작됩니다.
사무엘이 죽으매
사무엘선지자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사울왕이 유일하게 존중하고 의식했던 인물은 사무엘선지자 뿐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죽으면 사울왕이 겁낼 사람이 없어집니다.
다윗의 도피생활이 더 불안해 지는 것이죠.
사무엘은 다윗에게도 특별합니다.
다윗에게 다음 왕으로 기름을 부었을 뿐 아니라 도피생활 초기에 다윗을 보호했던 영적 후견인입니다.
이미 오랜 도피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쳐가던 다윗에게 상황이 좋아지기는 커녕 더 악화되는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온 것입니다.
생사가 달린 절박함 앞에서는 불가불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변화가 없는 지속적인 시련 중에 영적 침체에 빠지기가 더 쉽습니다.
암선고를 받을 때 보다 신앙에 더 위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꿈쩍 않는 환경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 주시는 것 같고, 점점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것이죠.
사실 하나님은 꽉 막힌 환경 중에서 가장 우리를 성장시키시는데요.
그동안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 살던 다윗이 이제 방향을 잃고 휘청거립니다.
다윗은 일어나 가능한대로 멀리, 유다의 최남단 바란 광야로 요새를 옮겨갑니다.
영적 침체가 오면 믿음이 아니라 본능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보이는 걸 믿으려 하거든요.
신앙에 위기가 오면 모든 문제가 다 산더미처럼 커 보이고 하나님만 가장 작아 보입니다.
다윗에게 식솔들과 함께 먹고사는 문제가 이제 산더미처럼 느껴집니다.
바란 광야로 멀찍이 물러나니 육백명 넘는 사람들의 음식 구하기도 더 어려워졌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곳곳에서 양치는 목자들을 보호해주고 도움을 좀 받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목초지를 찾아 방목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목축은 항상 강도나 약탈의 위험이 따랐거든요.
마침 다윗과 같은 유다지파 사람 중에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나발이 그냥 부자 정도가 아니라 거부였다고 합니다.
그 집엔 양이 삼 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있었습니다.
대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3절에 이 나발에 사람 됨됨이를 말합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다’
돈만 많았지 사람은 틀려먹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나발의 목자들과 그 많은 재산들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나발이 양털 깎는 날이 되었습니다.
일년에 한번 양털 깎는 날은 농업으로 말하자면 추수하는 날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음식을 풍성하게 차리고 먹고 즐기는 흥겨운 잔칫날이죠.
다윗은 나발이 양털 깎는다는 말을 듣고 열 명의 사람들을 보냅니다.
다윗이 얼마나 궁했는지, 나발에게 전한 전령의 말에 다 나타납니다.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한껏 축복을 한 뒤 말합니다.
‘그동안 내 사람들이 네 목자들을 보호했으니 이렇게 좋은 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식량을 좀 나눠주기를 원하노라’
8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사람들을 당신의 종이라고 할 뿐 아니라, 자기를 ‘네 아들 다윗’이라고 표현 할 정도입니다.
물론 같은 유다지파이니 ‘우리가 남이냐, 너는 내 친족이다’ 이런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러나 돈만 많은 속물에게 나는 네 아들이다 할 정도로 다윗이 몸을 낮춘 것은 그만큼 곤궁하고 절박하다는 뜻입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고, 뭘 구하려면 다 그럴 수 밖에 더 있습니까?
오너의 자리, 지도자의 자리, 가장의 자리가 때론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자기에게 몰려온 무리들을 먹이기에 수월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굶었다는 소리가 없잖아요?
또 이번처럼 비굴하게 도와달라고 애걸한 적도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해주시던 걸 지금 다윗이 혼자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위기로 시작 된 정신적, 물질적인 위기가 인간 다윗을 이렇게 초라하게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신앙의 위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때 마귀는 한 방에 쓰러뜨릴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심술궂은 나발의 핵폭탄급 발언이 쏟아집니다.
‘다윗이 누구이고 이새의 아들이 누구기에 내가 음식을 주겠느냐, 요즘에 주인에게서 나와 떠돌아 다니는 종이 많도다.’
우리가 말 한마디에 무너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말 한마디에 다윗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건 고의적으로 다윗을 대놓고 모욕하는 소리입니다.
정말 다윗이 왠 떠돌이냐, 누군지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다윗을 모르는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 없습니다.
골리앗을 누른 전설의 인물이 다윗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노래가 이웃나라 까지 퍼질 정도 인물이 다윗입니다.
사울왕과 다윗의 왕권 다툼을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그 좁은 땅 덩어리에 사울이 군사를 몰고 우르르 나타나면 다윗 일행이 우르르 도망 다니길 수년인데 그걸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나발의 말을 보면 이새의 아들인 것 까지 소상히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발은 왜 이렇게 까지 다윗을 모욕하여 분노를 불러 일으켰을까요?
아무리 나발의 이름이 ‘미련한 자’란 의미라고 하지만 그가 단지 미련해서 그런게 아닙니다.
부자는 어쩌다 보니 되는 것 아닙니다.
돈 번 사람들 절대 머리 나쁘지 않습니다.
나발의 모욕적 언사는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울왕과 다윗의 갈등을 익히 알고 있는 나발은 무 자르듯이 싹뚝 다윗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것입니다.
괜히 다윗을 도왔다가 무슨 일을 당하게요.
떡 몇 덩이 줬다고 팔십오명의 제사장을 죽여 버린 사울왕입니다.
그일라 주민들도 다윗을 배신할 수 밖에 없었잖아요?
사업가들은 정치권에 눈치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발은 다윗과 같은 유다지파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지역감정과 비교할 수 없는 게 이스라엘의 지파감정입니다.
사울왕의 시선이 곱지 않은 유다지파였던 나발은 철저히 몸을 사려야 했습니다.
다시는 다윗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모욕을 줘버린 것입니다.
그래야 또 손을 벌리고 빌붙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죠.
이 나발의 모욕에 다윗이 무너진 것입니다.
백성의 구원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지만 자존심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생사의 문제가 걸렸을 때는 이겼는데, 밥 세끼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다윗은 그동안 억눌렀던 화가 한번에 폭발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땐, 아무 일도 없을 땐, 원래 그런 마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본성이 나오면 신기하게 내 안에 별의 별게 다 들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그동안 눌러 온 서럽고 억울했던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한 것입니다.
이게 다윗이 없던 성질이 나온 것이겠습니까?
인간 속에 이런 파괴적인 본성이 다 있다는 거예요.
다윗이 왜 이렇게 오래 사울에게 쫒겨 광야를 떠돌고 있는지 짐작이 되죠.
그걸 처절하게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발 집안의 죄 없는 사람까지 죄다 다윗의 칼날에 죽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애써 지켜왔던 무혈 등극의 명분도 사라지고, 쌓았던 인격과 명성도 물거품이 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지혜롭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등장합니다.
아비가일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성대한 음식을 장만해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다윗일행을 맞으러 갑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엎드려 구하는 데, 남편의 목숨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을 대적하는 원수들은 다 나발처럼 심판되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대단하고 무서운 아내죠?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흥분해서 까맣게 잊고 있던 명분을 꺼냅니다.
다윗왕의 이 싸움은 여호와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뭐가 부족해서 이런 모욕과 고난을 당하는 게 아니지 않냐는 것이죠.
이게 다윗이 들어야 할 말이고 낙담하는 우리가 들어야 할 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느라 당장 눈에 보기에 더 쉬운 길도 버리고 시련의 길을 가는 것이잖아요?
아비가일은 다윗이 두려워하고 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 냅니다.
다윗이 근본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사울왕에게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29절에서 다윗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싸여 있다고 위로합니다.
또 모든게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진 다윗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의 집을 든든히 세울 것이라’
그때 가서 나를 좀 기억해 달라고 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아비가일의 말처럼 우리 집을, 우리 인생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정신 차릴 마지막 말을 날립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지도자로 세우셨을 때, 이 일이 오점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에 이 일을 생각할 때 무죄한 양민의 피를 흘린 것이 얼마나 후회가 되겠냐는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을 설득하는 내용들을 보면 정말 최고의 협상가이자 믿음의 용장입니다.
아비가일이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꿰뚫고 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지혜가 철철 넘치는 말을 듣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이제까지 참았는데, 내 손으로 원수를 갚고 양민들을 죽이려하다니.’
다윗이 오직 끔찍했으면 하나님이 너를 통해 나를 막지 않으셨으면 아침에 대 학살이 일어났을거라고 말했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윗은 그 자리에서 회군을 해서 돌아옵니다.
한편 어리석은 나발은 다윗을 모욕해 돌려보내고 꽤나 작전을 잘 썼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양털도 다 깎아 큰돈도 들어왔겠다, 왕이 부럽지 않게 큰 잔치상을 차리고 진탕 먹고 취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비가일이 어제 다윗의 군대가 온 가문을 멸하려고 출동했었다는 소식을 듣자 갑자기 충격을 받고 온 몸이 굳어 버립니다.
아마 나발도 정신차리고 보니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아찔했나 봅니다.
그리고 열흘 뒤 하나님이 치셔서 나발은 사망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아비가일을 감동하셔서 실족한 다윗을 돌이키십니다.
우리의 여정에서도 누군가를 통해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벽으로 떠밀리지 않고 돌아 설 수 있었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른 이에게 아비가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영적 침체에 빠져 범죄할 뻔 했던 다윗을 아비가일이라는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 막으신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끝나면 좋겠는 데, 이 사건의 결말이 우리를 살짝 당황하게 합니다.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원수를 갚아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즉시 사람을 보내 아비가일에게 청혼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상복이나 벗었나 모르겠다만 얼른 짐을 싸서 다윗에게로 와 그의 아내가 됩니다.
이게, 뭔가 인간적인 치정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영 거룩한 결말같이 보이질 않죠.
우리 인생사가 어디 거룩한 것으로만 됩니까?
그야말로 희로애락의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하루하루가 우리의 삶 아니겠습니까?
신앙의 삶은 인간사를 뛰어 넘어 고고한 자리에서 노는 게 아닙니다.
이런 죄의 냄새가 풍기고 인간의 정욕이 뒤섞인 인생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거룩을 구별하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흠이 없이 왕위에 오르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나발의 피를 흘려 보복하는 것을 막으셨다고 하잖습니까?
이렇게 허점이 있는 인간 다윗이지만 그래도 다윗에겐 예수님의 성품의 아주 일부를 비슷하게 읽어낼 부분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다윗과 다윗왕조는 장차 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왕권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는 죄 많은 백성들이 모이지만 그들이 피를 흘리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라에서 심판당하고 피 흘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피흘려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무고한 동족들의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다윗이 군인이잖아요.
다윗이 그토록 성전을 짓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피를 많이 본 사람이기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시죠.
너의 후손, 그가 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일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역사적으로는 이루었지만 실제 하나님이 영구히 거하실 성전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지으신다는 상징입니다.
그리고 삼천년 전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왕조는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사울왕조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막으려는 이 세상의 왕, 사탄의 세력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이 두 나라 속에서, 세상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세상이 주는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누리려는 어리석은 자 나발.
장차 영구히 세워질 예수님의 나라를 확신하며 그 편에 서는 아비가일.
너무나 명료한 구원의 그림 아닙니까?
예수님의 나라를 믿고 대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이 다윗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을 통해 보여주시는 진리입니다.
인간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 역사의 한 사건 속에 하나님은 이렇듯 자상하게 구원의 그림을 그려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왕위로 이끌 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모욕을 참지 못하고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또 이성에 대한 약점은 다윗의 큰 약점이자 모든 인간의 약점입니다.
그러나 다윗 노년에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때 왕궁을 떠나 도망치죠.
그때 시종들과 함께 도망가는 노령의 다윗을 향해 사울왕의 신복이었던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습니다.
‘비루한 자여, 가거라 사울의 피를 하나님 네게 돌리셨도다’
다윗의 군대장관이 그걸 가만두겠습니까?
단칼에 처지하겠다고 할 때 다윗이 만류합니다.
‘저 자가 저런 말 하는 건 하나님이 시켜서 나를 저주하게 하는 것이다. 혹시 이런 모욕당한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지 누가 알겠느냐.’
다윗이 나중에 이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늙고 힘없어서 그런 것 아닙니다.
노욕이 얼마나 더 무섭고 늙은 권력자가 얼마나 더 잔인하고 오만합니까?
다윗이 이제 사람의 모욕 따위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더 중함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더 늙었을 때, 몸에 온기가 없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젊고 아름다운 아비삭이란 처녀를 불러다 시종을 들게 하고 다윗 품에 누워 자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함께 눕기는 하되, 동침하지는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늙어서 동침을 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이만큼 자신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십니까?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죽어라 훈련만 받는 게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시기 위해 매일 죄성에 이끌리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우리를 고치고 계십니다.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까지 우리를 키우시고 연단해 가십니다.
세상을 닮은 사람, 세상만 좋은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을 데려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살라고 하면 거기가 그 사람에게 천국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된 성품을 닮고, 희락과 화평과 사랑의 삶이 몸에 점점 좋아져 가는 성도들이 그 좋아하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들이 지치게 할 때, 더욱 예수님 곁에 바짝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가 살아계신 우리 주님 곁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주님 곁에서 주님의 아름답고 선하신 인격을 배우고 닮아가며 어느덧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어려운 문제들도 다 정복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계층사다리가 더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부모가 소득이 높으면 자식도 소득이 높고 부모의 소득이 낮으면 자식의 소득도 낮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할 일이 아니라 목동을 불러서 왕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녀를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맡으신 자녀를 이 땅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한 톨의 낭비 없는 귀중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청장년들 역시 매일을 주님께 굳게 의지해서 최상의 삶으로 인도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7년6월1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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