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예배를 회복하라 (사무엘하6장1절-7절)

남수연 2010. 7. 7. 11:23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3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 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저희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전심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모인 우리 모두를 이 시간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만나 소통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하고 아름다운 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서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는 전 인격을 바쳐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천지창조란 그림을 아시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그린 벽화 입니다.

그 가운데 아담의 창조 부분은 우리에게 특히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과 아담의 손 끝이 서로 닿으며 아담이 살아있는 영이 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이티에서도 이 장면을 도용해 외계인과 인간이 교감하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은 누구나 이 두 손이 만나는 장면에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 그림을 볼 때 아담의 표정을 먼저 봅니다.

아담의 눈길은 존경과 흠모와 신뢰로 가득차 자기를 창조해 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봅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두 눈이 마주쳐 있고 거기에는 완벽한 사랑과 믿음의 관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역시 천재화가의 영감으로만이 표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장면이 가장 완전했던 예배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담이 예배자의 자리에 있기를 거부하고 예배 받는 자리를 갈망함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관계는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 예배의 회복을 원하십니다.

자녀인 우리와 함께 거하시를 지금도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예배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으십니까?

예배가 회복되지 못하면 우리의 심령은 점점 메마르고 삶은 곤고하고 세상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며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살지도 못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힘있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살 맛이 안 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의 회복을 원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언약궤를 모셔오려 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의 회복을 위한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회복할 수 있는 지 오늘 말씀 통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사울왕이 죽고 다윗이 왕으로 추대되어 왕권이 정립 되던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이 70년간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하는 과정에서 생긴 뜻밖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왜 성막에 있지 않고 아미나답의 집에 있게 되었는지 배경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70여년 전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은 숙적 블레셋과 큰 전투를 벌입니다.

싸움에서 불리함을 느낀 이스라엘은 경솔하게 법궤를 전쟁터로 메고 나갑니다. 하나님이 싸움에서 이기게 해주시리라 기대했지만 싸움은 처참하게 패배하고 설상가상 법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블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의기충천하였지만 법궤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재앙이 임해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궤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생각해서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법궤는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서 이스라엘 국경으로 넘어 벧세메스에 이르게 되는 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흥분하여 법궤 안을 들여다보다 70여명이 그 자리에서 죽게 되고 그들은 애곡하며 법궤를 받지 못하겠다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법궤는 블레셋 변방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모셔져 그 후 70여년간을 그 집에 있게 됩니다.

바로 그 법궤를 오늘 다윗성으로 드디어 모셔오려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보던 중 참 의아했습니다.

그 오랜 세월 아비나답의 집에 가 있는 법궤를 사울왕조 내내 방치해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아야 했습니다.

창세기25장22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역대상13장3절에 다윗이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말한 부분에서 사울왕은 법궤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의 방식으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사울의 영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경홀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들에게 지금도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왕 위를 이은 다윗왕은 사울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왕은 왕조를 시작하는 초두에 변방에 방치되어 있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는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 계획은 그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다윗 왕의 선한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간절히 원하던 예배를 회복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운반 하는 방법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주 세심하게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25장14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때는 레위지파의 고핫자손이 반드시 어깨에 메고 운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맬 때 즉 하나님을 섬길 때는 인간의 땀흘리는 수고와 헌신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소가 모는 수레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 이동했습니다.

법궤가 안치되어 있던 아비나답의 집과 다윗 성과는 16K정도 떨어져 있는 거리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마포까지 갈 거리 정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궤는 많은 부분이 밀도가 가장 높은 무거운 금속인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돌 판이 두 개나 들어있어 최소 200킬로그램이 넘는 엄청난 무게 였다고 추정됩니다. 이것을 메고 16k를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겠죠.

이스라엘의 그 사막지대를 무거운 법궤를 메고 행군하는 일은 끔찍한 노동이었으며 블레셋의 우상들을 운반할 때 수레에 실고 운반 하는 것을 늘 상 보아왔기에 다윗도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으로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기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는 헌신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매일의 기도와 회개와 몸과 시간을 드리는 봉사도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의 물질을 주님께 드려 헌신하기도 해야 합니다.

헌신이 두려우십니까?

저도 헌신이 두려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느끼는 것은 헌신보다 세상이 더 두렵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고 하루 하루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의 삶을 보니 신분이나 나이나 명예나 상관없이 정말 능력 있고 놀라운 사명자의 삶을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 헌신하는 것만이 우리를 가장 충만하게 채우게 된다는 것이 바로 영적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언제까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란 것이 그렇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지 않습니까?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소수의 사람들은 절대로 그것을 내놓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하지 않습니다.

진짜 좋은 게 무엇인지 비교해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헌신하는 사람만이 두려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인도가운데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실패하였지만 3개월 후 법궤를 모셔오기 위해 2차 시도를 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다윗의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게 되는 데요.

역대상15장13절을 보면 다윗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모시는 법을 깨달았다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아울러 속죄의 희생이 있어야 됨을 깨달았습니다.

사무엘하6장13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공적으로 메어 올린 다윗왕은 말할 수없는 감격과 열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다윗성에 입성하는 일행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막지대를 온종일 궤를 메고 걸어 온 일행들은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고 행로 중에 수시로 드린 짐승 제사로 인해 온 몸은 피로 얼룩져있었을 것입니다. 거지꼴이 되어 버린 예배자들이 온갖 악기를 힘차게 연주하며 기쁨으로 뛰며 춤추는 행렬은 예배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반드시 이같은 예배자의 헌신과 속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예배하기 위해 우리에게 속죄할 짐승은 필요치 않습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신 우리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우리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0장10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두 번째 시도에서 예배에 성공한 것 같이 우리도 주님의 언약의 피를 믿고 온전한 헌신으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실패한 둘째 이유는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께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궤를 모셔오려고 했던 이유 중에는 하나님을 각별히 사랑했던 다윗왕의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다른 마음도 있었습니다.

본문1절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3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라고 씌어있습니다.

아무리 법궤가 있는 곳이 블레셋과의 접경지대라 블레셋의 공격을 대비했다고는 하나 3만명은 좀 과한 숫자가 아닌가요?

이것은 아마 법궤를 가져오는 명분을 놓고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자신의 왕권을 견고하게 수립할 전진대회 쯤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역대상 13장 2절에 보면 다윗이 무리들을 모아 놓고 궤를 가져와도 되냐고 물어봅니다.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라고 다윗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궤를 메고 오는 것에 대해 회중의 반응을 살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매고 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있어서 복잡한 정치적 이유와 사람의 이목을 생각하는 인본적인 생각들이 저변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언가 자신의 속셈이 있을 때 사람은 신중하지 못하고 허둥대며 일을 급하고 경솔하게 처리할 때가 많습니다.

다윗의 1차 시도가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수레를 끌던 소가 뛰도록 살짝 건드신 것입니다.

그 순간 궤가 떨어질까봐 손으로 궤를 붙잡은 웃사는 하나님이 치심으로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결과는 어이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100%였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드러나고야 맙니다.

우리가 어떤 자들입니까?

예배조차도 단지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부패한 인간들 아닙니까?

우상 종교를 보십시오. 우상의 환심을 사 더 좋은 것을 얻으려고 자식까지 죽여서 바치는 게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예배 속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가대는 자신의 목소리를 한껏 자랑하며 아름다운 찬양을 합니다.

설교자는 회중의 비위에 맞는 평안과 축복과 사랑만 전합니다.

어떤 이는 사업을 생각하며, 어떤 이는 인맥과 교제를 생각하며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계십니까?

다른 어떤 목적이나 생각이 우리의 예배에 조금이라도 끼어들어서는 우리의 예배가 회복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 내려놓고 나오십시오.

하나님 한 분이시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예배에 성공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더 잘 알고 채워주십니다.

다윗이 장막으로 법궤를 옮긴 후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말씀드리자 하나님은 너무 기쁘셨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생각해서 집을 지어드린다고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저희 딸이 어릴 때 할머니께 수영장 딸린 집을 사드린다고 공수표를 발행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그 공수표가 백지수표나 되는 듯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걱정한 다윗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역대상17장 10절에 보면 다윗을 축복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지라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은 그 마음이 너무 기쁘셔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달려 오십니다.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면 우리에게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본문 가운데 웃사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려합니다.

많은 사람이 웃사의 죽음에 대해서 불편하게 느낍니다.

죽은 웃사를 동정하고 하나님을 엄격하고 편협한 분이라 오해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한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자기 할아버지의 집에 법궤가 오게 된 이유를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엘리아살은 거룩히 구별되어 궤를 섬겼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3대째 이르러 웃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으며 경외하지 않았던 자 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낡은 고리짝 정도로 취급 했을 지 모릅니다.

그도 역시 사울과 마찬가지로 예배자의 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4장15절에 궤를 메는 고핫자손일 지라도 성물을 만지지면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웃사는 급한 순간이 오자 두려움 없이 법궤에 덥썩 손을 댑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접할 때 즉사하게 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존재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죄인 웃사는 하나님의 영광에 손을 댔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사람을 대면하실 때 그들이 죽게 될까 염려하여 자신의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웃사의 죽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엄격하다고 불평하는 마음이고 자신이 하나님보다 너그럽고 인자하다는 교만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죽어야 할 자들이었다는 것을요.

반대로 우리는 오벧에돔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웃사가 죽고 분노한 다윗이 법궤 가져오기를 포기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가 보내집니다.

오벧에돔은 두려움과 공포로 법궤를 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벧에돔 집에 법궤가 모셔진지 석달 만에 하나님은 그의 집에 복을 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느낄 수 있도록 넘치는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벧에돔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언약궤를 통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올 때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기 싫어 하나님의 궤를 따라와 장막의 문지기가 되었음이 역대상 15장 24절에 나와 있고 오벧에돔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는 것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한 예배자는 이렇듯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복을 내려주시고 그 또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저는 우리가 참되게 예배드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임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우리 교회 위에 오실 때 우리가 그 강림하심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놀라운 은혜 가운데 들어가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던 다윗의 예배와 같이 헌신과 열정이 있는 예배를 우리가 드릴 때 그 일이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사무엘하6장 14절로15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다윗은 왕의 체면도 버린 채 뛰놀며 기쁨으로 하나님만을 높여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장막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긴 후 역대상16장37절을 보면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그가 하나님의 궤를 모셔온 후 날마다 예배하게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다윗의 그 진심어리고 열정적인 예배를 추억하며 그리워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5장16절에 이르시길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성막 중 유독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도 아니고 모세의 성막도 아닌 아무 화려함이 없는 다윗의 성막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자녀인 우리들이 열정과 진심을 품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동안 드린 예배가운데서 너무 좋으셔서 추억하시는 것은 어떤 날의 예배일까요?

정말 우리가 그 손의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만을 간절히 원하고 하나님 자체를 구하고 예배한 날이 어느 날 이었던가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우리에게 언제나 진심이고 간절하시듯 자녀인 우리도 매일 그런 마음으로 나아오길 원하십니다.

그런 예배라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받은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외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는 교회, 평생 한번 목회하는 교인을 세우는 비전을 가지고 있지만 안으로는 예배를 회복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는 하나님만 예배하고, 전심으로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히 나타나는 예배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희 목회자들은 매일 그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여 우리 예배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신지 안계신지 아리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느낍니다.

미국의 조지아 주의 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임하자 교회 안을 넘어서 교회 밖으로 까지 퍼져갔습니다.

그 교회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한 집에 까지 하나님의 임재가 밀려들어갔습니다.

거실에서 말보로 담배를 피우던 여인은 한 영이 자신의 집에 들어온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두려워 하며 그것을 피해 부엌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 하나님의 임재는 부엌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은 침실로 도망을 갔는 데 아침에 하나님의 임재는 침실 까지 밀고 들어와 더 이상은 도망갈 데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는 그 영의 임재가 근처 교회에서부터 오고 있음을 깨닫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그날 그 여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셔서 우리를 적시고 교회 밖으로 흘러 나가 온 지역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래서 많은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몰려 들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고 오직 하나님만 구하며 예배할 때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예배, 프로그램에 참여만 하는 예배, 마음에 여전히 목마름이 있는 예배를 더 이상은 원치 않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예배에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여 함께 기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런 교회에 강림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임하여 우리 모두를 안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간절히 사모하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 앞으로 나가고 또 나가서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