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호세아서의 마지막장입니다.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지만 호세아서가 말씀하는 요점은 ‘돌아오라’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렇게 쉴 새 없이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북이스라엘이 주전722년에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했다고 알려줍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을 경우 13장에서는 이런 무서운 결과를 예언하죠.
16절,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우리가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게 아닙니다.
패전국에 대한 잔혹한 살육은 당시 고대 국가들에겐 일반적인 전쟁 형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주처럼 보호하실 때, 아무도 이스라엘을 그렇게 학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천재지변이든, 세상의 재난이든, 개인사의 위기든, 특별한 은혜로 보호해 주십니다.
견딜 힘과 헤쳐 나갈 지혜와 돕는 손길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앞으로 더욱 잦아질 이런 재난을 대비하되, 가장 큰 핵우산은 진실되게 하나님 안에 사는 것임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오늘 호세아선지자의 마지막 호소입니다.
이 경고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며 우리 신앙에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1. 말씀을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2절,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이르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말씀을 가지고 돌아온다’의 원어의 뜻은 너희는 ‘말씀을 붙잡아라’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국문도 못 떼신 권사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기도실에 가면 나이 든 권사님들이 늘 성경을 펴고 읽으셨습니다.
성경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국문을 저절로 떼게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교회도 주일에 일찍 오신 성도님들이 성경을 펼치고 읽으시는 모습을 뵐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주일 아침부터 마음에 참 감동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 중 하나가 말씀을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선지자 당시 북이스라엘은 바알신을 섬겼고, 금송아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두 개나 어긴 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죠.
하나님을 형상으로 새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언약자손인데, 십계명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호세아4장6절에서 이스라엘이 지금 같은 지경이 된 이유를 지적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큰 위기가 오면 감정이 요동합니다.
있다고 생각했던 믿음은 감정에 파묻힙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구원의 체계를 세우고 확신하는 믿음만 위기에서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은 그냥 독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의해서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를 떠날 때 했던 말이 있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두고 떠나는 바울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사도행전20장32절에서 바울사도가 에베소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서 확실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왕을 통해, 선지자들을 통해 열심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8장12절,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
이것이 멸망한 북이스라엘만의 문제겠습니까?
현대 교회의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는 위기입니다.
성경을 읽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고, 혹시 설교를 들었다 해도 그 말씀과 관계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2024년을 상징하는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뇌 썩음’입니다.
하찮은 정보를 너무 과잉 소비해서 정신적, 지적 능력이 퇴보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재밌고 짧은 동영상만 뒤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루에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평균 2시간이라고 합니다.
일하는 시간을 빼면 짬만 나면 누군가 올린 의미 없는 영상을 한없이 뒤적인다는 것이죠.
우리 부모 세대는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자식들은 가르치려고 했습니까?
배운 사람하고 안 배운 사람하고 사는 계층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더 가치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룬 지식사회에서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등을 만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는 안 그렇겠습니까?
우리교회가 매일 성경을 펴서 읽고 또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3절,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신앙의 심각성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보호자이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평탄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 가죠.
그 다음은 반드시 삶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니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게 됩니다.
평소 보이는 것을 의지하던 사람이 위급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련을 이기는 성도들은 칭찬받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 틈에서 항상 어느 쪽과 동맹해야 유리할지를 계산해야 했습니다.
약소국이라면 다 그렇죠.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이 미국이 견제하던 중국 반도체 시장 정책에도 중국과 일부 교역했습니다.
그 결과 앞으로의 트럼프 시대에 큰 낭패를 보게 되었잖아요?
이스라엘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앗수르 편에 붙었다 애굽편에 붙었다 오락가락 정책을 폈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의 주변국들은 다윗왕 시절엔 반대로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던 처지였습니다.
이들의 세력이 커진 것은 손으로 만든 우상 종교를 들여와 열심히 섬긴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입니다.
우리가 정신차리고 믿지 않으면 하찮은 문제도 얼마든지 우리를 곤궁에 빠트립니다.
그럴 때, 나를 때리는 막대기에 빌게 아니라 막대기를 든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살면서 큰 위기를 만나면 문제만 바라보고, 도울 사람 없나만 애타게 떠올립니다.
저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만, 혹시나 했던 사람이 나를 도와준 적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위기를 넘어가게도 하십니다.
그렇다해도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보내셔서 돕게 하시는 걸 많이 경험했습니다.
평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위기를 만나면 왜 이런 일이 있는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있을지 하나님께 물어야죠.
우리나라도 하룻 밤사이에 비상계엄이라는 황당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 나라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는데, 우리가 그 사명을 진실되게 감당해 왔는지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세아선지자의 간절한 호소에도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는 걸 세계사가 전하죠.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의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진실 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3절,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라
잘 보면 이 모든 복된 상황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잖아요?
반역을 고치시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마음이 변한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의 마음엔 하나님을 반역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역하는 인간 본성을 고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나의 진노가 떠났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반역과 죄악에 대한 정당하고 공의로운 집행입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을 버린 것도 아니고, 반역하는 마음에서 회개하고 돌아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진노가 떠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제물이 되셔서 심판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돌이키지 못하니,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지난 주 뉴스에 불치병 어린 딸을 위해 국토장정을 하는 한 아버지의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근이양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4살 딸을 살리기 위해서 부산부터 서울까지 740킬로를 걸으며 모금활동을 한 것입니다.
최근 치료제가 나왔지만 치료약 값이 46억입니다.
아버지는 전국을 걸어서 46만명을 만나 만원씩의 후원금을 거두면 딸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만일 아버지에게 46억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돈으로 딸을 살렸겠죠.
아버지의 사투에 가까운 모금의 결과 13억이 걷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릴 방법이 있으신데, 아끼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주시고, 기쁨에 넘쳐 하나님이 노래하시는 게 바로 6절부터 8절까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실 축복을 늘어놓느라 흥분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백합화, 백향목, 감람나무, 풍성한 곡식, 포도나무 꽃, 포도주 향기, 열매.
아름다운 단어가 환희의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아마도 호세아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눈치채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9절에서 이렇게 자신의 예언서를 마무리합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느니라
이 예언서가 주님의 구원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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