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호세아와 고멜 (호세아서1장1절-11절)

남수연 2011. 5. 24. 18:34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좀 있습니다 .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주신 첫 사명이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자식들에게는 직접 저주의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아무리 선지자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도 이런 요구를 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단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전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절박하고 애절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본문에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심하며 불안한 인생을 사는 연약한 우리에게 성령께서 확신과 기쁨을 부어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본문의 시대적 배경과 호세아 선지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왕 이후에 두 나라로 분열됩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선택했기 때문이죠.

남유다엔 다윗의 왕조가 이어졌고 북이스라엘엔 쿠데타를 통해 불안정한 정권이 계속되었습니다.

두 나라 다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의 삶을 살다 결국 강대국을 통한 심판을 받고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은 금송아지 하나님과 주변국에 널린 가나안 우상들을 섬기다 주전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합니다.

남유다는 그 후 150여년 더 존속되다 주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며 두 나라에 각각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끊임없이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은 두 나라는 결국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망하고 백성은 학살당하고 강대국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오늘 본문의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멸망 직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0시의 예언자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심판의 카운트 다운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곧 닥칠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고하기 위해 마지막 선지자로 호세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의 전체적인 느낌은 이성과 논리보다는 다급하고 격정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칩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을 약속하며 어서 돌이키라 설득합니다.

그리고 또 죄와 심판을 경고하며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을 회개하라 재촉합니다.

거대 쓰나미가 옵니다. 고지대로 대피해 주세요!

지난 일본 지진 해일 때 쓰나미경보를 알리다 죽은 엔도 미키씨의 경고 방송처럼 긴박한 호소가 호세아 서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다급하지 죄에 깊이 빠진 이스라엘은 회개도 돌이킴도 없이 여전히 죄악의 즐거움을 탐닉할 뿐입니다.

가끔 학교에서 철없는 행동으로 일탈한 학생이 학부모와 함께 상담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달래서 정상적인 학교생활로 복귀시키려 애를 쓰시는 데 아이는 그 사이 친구 문자를 받고 도망가 버리는 때가 있습니다.

호세아서는 이렇게 혼냈다 달랬다 하나님 혼자 애를 쓰시는 예언서입니다.

대언자인 호세아가 오죽했으면 하나님 뜻을 그대로 전하다 답답해서 이렇게 외치며 끝을 냈겠습니까?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따르는 죄인에 대해 안타까운 탄식을 하며 호세아서는 끝납니다.

이 임박한 심판을 최후 통첩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가 바로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선지자들의 삶을 시청각자료로 사용하면서 까지 우리에게 말씀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속 선지자들이 가끔 해괴하고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봅니다.

내용을 잘 이해 못하면 시키시는 하나님이나 그대로 하는 선지자들이 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하시고 슬퍼하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그 누구도 서로를 위해 울어 줄 수 없게 참혹한 죽음을 당할 거란 메시지입니다.

남유다여 제발 돌아오라는 마지막 극약 처방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돌이키기 위한 사랑이 이렇게 지극하신 데 왜 그 종 선지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선지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기도 하십니다.

가난하던 옛날에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고 맏이가 희생한 집안이 많았습니다.

객지에 나가 벌어 부쳐 준 피 같은 돈을 받아들고 부모님들 또한 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아는 종들만이 현실의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선지자의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는 마지막 경고방송입니다.

그리고 감출 수 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애끓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파수에 함께 잡히는 것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다음은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니 호세아는 타락하고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호세아의 부정한 아내는 하나님의 타락한 백성 이스라엘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막 선지자의 직무를 시작하는 호세아에게 첫 사명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사명자라도 누군들 행복한 가정을 원치 않겠습니까?

거룩하게 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도 감당하기 힘든 게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가 그 동네 소문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호세아가 그 명령을 듣고 처음에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알았기에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3절에 보니 호세아 선지자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디블라임이은 무화과 떡이란 말로 그 당시 우상에게 제사한 떡을 말합니다.

아버지 디블라임이 우상 숭배에 관련 된 일을 했을 거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의 딸 고멜은 아마도 그 마을에서 소문난 문란한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가 부정한 고멜을 아내로 맞긴 했으나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서3장 1절을 보면 아이를 낳아 놓고 딴 남자를 좇아 나간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는 하나님이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영어 본문을 보면 다시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가 그래도 고멜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아내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해야 하는 뼈아픔이 호세아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싫어서 매일 집을 뛰쳐나가는 인간을 데리고 와 또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부정한 배우자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에이즈에 걸린 줄 모르고 1년간이나 윤락행위를 했던 가출한 여인의 이야기가 신문에 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남성들이 슬그머니 병원에 가서 에이즈 검사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고 사람들이 실소했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아내를 끝까지 사랑으로 기다렸다는 기사가 지방 신문에 게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전도연씨와 황정민씨가 출현한 너는 내 운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짜낸 원단 멜로영화 였죠.

어떻게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통속적이고 뻔한 내용을 뻔뻔하게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

수감 된 전도연의 손을 잡으려고 환풍기를 떼어내고 환기통에 매달린 황정민의 모습이 지나치게 과장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이즈에 걸린 여인을 끝까지 지켜주려는 순진한 시골 노총각의 사랑에 많은 사람이 눈물로 응답했습니다.

영화 서두에 보면 그 두 사람이 봄날은 간다란 영화를 봅니다.

그러다 극중 유지태가 헤어지자는 여인의 말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고 한 말을 두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그러나 '너는 내 운명'은 대답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다고.

호세아는 부정할 뿐 아니라 배신까지 한 아내를 찾아와 다시 사랑합니다.

배신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호세아서가 말씀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짚어 간 송태근 목사의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가슴에 확 와 닿습니다.

내겐 사랑만 남았다

남들의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문란한 아내를 사랑한 호세아의 결혼생활은 현실입니다.

아들도 낳았습니다.

4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성경에서 사람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바꿔 주셨고 약탈자란 뜻을 가진 야곱이란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새 이름을 주셨죠.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 된 끔찍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므드셀라입니다.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는 최장수 인간으로 969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의 이름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해가 바로 손자인 노아가 600세 되던 해였고 홍수 심판이 온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은 예언적 의미가 있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도 왜 이름 값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려 애를 쓰죠.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쁜 이름으로 인해 상처받기도 하고 좋은 이름에 대해 평생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개 한 마리를 사와도 이름 짓느라 온 식구가 머리를 쓰는 걸 봅니다.

그런데 4절에 보니 하나님이 호세아의 아들에게 지어 준 이름이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 즉 멸망시킨다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낳았는 데 이름을 멸망이라고 짓고 싶겠습니까?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게 아버지의 마음인 데 아들 이름을 부를 때마다 호세아의 마음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들을 축복해야 마땅한 아버지가 저주하는 이름으로 자식을 불러야 했던 것이죠.

아이의 이름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이 아들의 생명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호세아는 패역한 자식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과 멸망을 경고해야 하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호세아가 아들을 멸망 받을 자야라고 부를 때 사람들이 아들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물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라는 것을 듣고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생활에서 얼른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악은 막장을 향해 치달아 멈추질 못했습니다.

고멜이 다시 딸을 낳자 하나님은 로루하마란 이름을 주십니다.

그 뜻은 은총을 받지 못하다. 동정을 받지 못하다 입니다.

셋 째 아들 역시 로암미라는 저주의 이름을 받습니다.

이는 내 백성이 아니다란 뜻입니다.

막내 아들을 부르는 데 넌 내 아들 아니다 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버려야 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인 데 아무리 죄를 지은 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어떻게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사랑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죄인도 이렇게 사랑하시는 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얼마나 더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를 낙심과 절망 가운데 버려두시겠습니까?

우리가 때로 주님께 등을 돌리고 죄와 세상을 더 사랑한다 해도 하나님은 회개한 자녀에게 결코 긍휼과 자비를 잊지 않으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북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하나님은 남유다를 긍휼히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남유다가 하나님 마음에 꼭 들었냐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남유다에도 심판과 멸망을 경고한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남유다 역시 불의한 삶으로 하나님의 속을 썩인 자식입니다.

그럼에도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편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도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조가 끝까지 이어진 남유다는 그래도 간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 나와 타락한 종교와 백성들을 개혁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 역시 부패하고 타락하긴 북이스라엘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열국의 침략 앞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잘못했을 때 빌지도 않고 뻣대는 아이가 더 많이 맞는 거 아시죠?

남유다는 징계를 받을 때 성전에 나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부모의 징계의 목적은 원수와 다릅니다.

원수마귀는 철저하게 망가뜨려 못 쓰게 하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돌이켜 바른 믿음과 옳은 행동을 하라는 게 목적이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을 언제든지 용서하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죄악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면하면 곧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하나님과 은근히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딱 자기가 할 만큼만 신앙생활을 유지하며 절대로 더 헌신도 희생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매 맞을 만큼 불신앙도 아닙니다.

좀 멀리 갔다 싶으면 살짝 회개하고 돌아왔다 다시 세상에 슬쩍 발을 걸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지만 어느 순간 큰 시험에 빠지면 돌이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남유다는 세상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고 북이스라엘의 뒤를 이어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믿음이란 게 힘써서 은혜 안에 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없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불신앙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과 악한 영의 교묘한 훼방은 결코 쉬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의 믿음을 유지하려고만 해도 상당한 경건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왕 믿음의 삶을 살기를 결정한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 보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후회도 없고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누릴 때도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기쁨이 완전해 집니다.

아름다운 5월을 만드신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산행도 더 즐겁습니다.

차 한잔을 마실 때도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더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 즐거움에 대해 잠언14장13절에 기가 막힌 결론을 내립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그러나 항상 주님을 예배하며 살던 다윗은 시편 4장 7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서 사는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회복과 축복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9절과 10절을 잘 읽어보면 논리적인 모순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라고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즉시 10절에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잘못한 자식에게 호적을 파버리겠다고 호통을 친 아버지입니다.

그러더니 네 자손들이 내 모든 유산을 다 상속받고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될 거라 말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호적을 파버리겠다는 것이 자식을 완전히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이죠.

이스라엘은 그들의 범죄로 수치를 당하며 나라를 잃고 나그네처럼 방랑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결국 구원하시겠다는 확고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셀 수 없고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이 나타납니다.

좋은 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어 못 견디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범죄 한 인간에게 그런 축복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 대답은 11절에 있습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한 우두머리가 그들을 이끌고 그 저주 받았던 땅으로부터 올라올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유다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말한다고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나 없이 음란하고 범죄하고 소망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이 보내신 한 우두머리인 예수님을 통해 축복의 자녀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엔 조건이 있습니다.

본서의 3장1절에 보면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외갓 남자를 좇아 바람 난 아내를 다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호세아는 3장2절에서 이렇게 행동합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아내였던 고멜을 다시 찾기 위해 댓가를 지불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신부로 맞기 위해 댓가를 지불하고 데려 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죄에 팔려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의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3장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오늘 호세아서의 메시지를 아시겠습니까?

흠이 많고 못난 우리들을 예수님께서 영원히 신부로 맞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에 천국의 혼인 잔치를 예언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의 모든 부정한 행실과 죄악을 주의 피로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로 맞기 위해 고난의 값을 치른 남편 되심을 반드시 잊지마시길 축복드립니다.

언젠가 노 부부의 지극한 사랑이 TV에 소개 된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나이가 84세고 할머니는 85세입니다.

두 분이 보라색과 분홍색의 커플 룩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공원을 산책하십니다.

할아버지는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연신 할머니 자랑을 하시며 젊었을 때 여러분 보다 더 예뻤다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보다 더 예쁘다고 사랑을 표현합니다.

할머니는 수줍은 듯이 웃으며 마냥 행복해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노 부부의 사랑을 부러워 하며 지나갑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잠을 깬 할머니의 표정이 좀 이상합니다.

할아버지를 보고 딱딱하게 굳어 낯선 사람 대하 듯 불안 해 합니다.

기자가 저 분이 누구냐고 묻자 할머니는 몰라, 오빤가? 라고 대답합니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날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일 뿐입니다.

내가 누구예요라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우리 아버지라고 할머니는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 말에 할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기운을 잃습니다.

아침이면 자기가 남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할머니에게 날마다 남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할아버지 일과입니다.

어루만지고 사랑한다 말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드리면 기억이 깨어나고 서서히 할아버지를 알아보게 됩니다.

녹내장 치료시기를 놓쳐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에게 부부가 함께 했던 사진을 보여 주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매일 아침 손을 잡고 사랑한다 말하며 내가 당신 남편이예요라고 말하며 남편의 느낌을 찾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할아버지는 개척교회를 할 때 할머니 혼자 갖은 고생을 해가며 자식을 키우느라 치매에 걸렸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어떻게 든 기억을 돌리려 하지만 치매는 점점 더 심해가기만 합니다.

어느 날 의사는 말기 치매로 진행 중인 할머니가 더 이상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몸도 마비될 것이니 요양원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할아버지의 눈 시울이 붉어집니다.

다음 날 할아버지는 장미 꽃 한 다발을 들고 교회로 갑니다.

점점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할머니를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다시 결혼하기 위해서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날 밤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주며 말합니다.

다 잊어버려도 내가 당신 남편이란 건 절대로 잊으면 안돼요라고.

할머니는 웃으며 아이고 자기 남편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어딨어요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어느 날 남편이나 아내가 날 알아보지 못하고 낯 선 사람 처럼 대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잊어버리고 낯설어 하는 우리를 보고 주님이 날마다그런 고통을 느끼실 것입니다.

나를 값 주고 사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이 우리의 남편 되심을 잊지마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호세아서 전체에 간절하고 애절하게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안심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날 하나님의 품에 안길 소망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사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어제가 부부의 날이었죠.

하나님이 이끌어 부부가 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며 허물을 서로 덮어주고 용서하며 사랑과 믿음으로 끝까지 아름다운 동행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