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괴테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고 합니다.
‘내 존재의 맨 밑바닥에는 고통과 괴로움 밖에 없다.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는 것은 내가 75년간 존재한 모든 기간 동안 참으로 안녕했던 기간은 4주가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의 인생은 끝없이 무너지는 무거운 돌을 다시 세우는 것이 전부였다.’
저명한 작가이고 명예와 부를 누린 사람이 이렇게 인생을 회고하는 것이 참 의외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어땠을까요?
어느 날 귀족부인이 루터와 식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사님, 저는 당신이 앞으로 40년 이상은 더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40년을 더 사느니 차라리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겠습니다.’
누구든지 각자 인생의 힘겨움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찢기고 인생막대기로 얻어 맞고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는 소망의 하나님이 힘들게 삶을 헤쳐 나가는 우리 모두를 은혜의 말씀으로 강건하게 세워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 패망을 앞두고 호세아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세아선지자는 백성들이 죄에서 돌이키길 간절히 호소하고 패망을 예고했고 결국 그의 예언대로 멸망하는 북이스라엘을 지켜본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찢기고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이스라엘을 향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간절한 선지자의 호소입니다.
시대적으로나 우리 개인의 신앙면에서나 진지하게 들어야 할 말씀인 줄 믿습니다.
먼저 본문에서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신앙과 환경과의 관계성입니다.
우리 현실과 신앙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은 결과가 현실에 낭패와 고난으로 지금 나타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찢으시고 때리신 장본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 삶에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역사하십니다.
사무엘하7장14절에서 하나님은 성전을 세운 이스라엘과 솔로몬 왕 앞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우리의 실패와 질병과 고독과 힘든 환경은 우리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위한 박해 속에 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난이 무고하게 온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무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이 한결 같이 고백하는 것은 문제를 통해서 자기도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데 이렇게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지,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지, 왜 상황이 좀 더 나아지지 않는 지, 이런 배후에는 내 죄가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삶에서 불편과 위기를 느낀다면 생각해야 합니다.
상처받고, 아프고, 곤고하고, 생활이 빈곤해지고,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이 찢으시고 때리셨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다른 데서 상황을 해결해보려 한다면 문제가 쉽게 끝이 나질 않습니다.
삶의 모든 괴로운 문제를 당할 때 가장 먼저 우리가 할 지혜로운 태도는 내게 무슨 문제가 있냐를 정직하게 진단하는 것입니다.
남의 탓은 할 필요도 없고,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 때문에 내 환경을 흔들어 놓지 않으십니다.
내게 힘든 문제가 생겼다면 하나님이 나와 얘기하시자는 것입니다.
그걸 놓고 하나님이 내 죄를 다루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고하게 남북으로 찢어지고, 앗수르의 침략으로 얻어 맞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치가 잘못되고, 약소국이고, 악독한 대적이 나타나 괴롭히는 것 같지만 각자의 죄의 결과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미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경고를 받고 맞을 만큼 맞아서 자자하게 상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이제 패망을 불과 수년 앞 둔 시점에서 마지막 경고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게 있죠.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하인리히라는 사람이 업무상 사고를 처리하다 이런 통계를 얻었다고 합니다.
큰 사고가 있기 전에 29번의 작은 사고들이 있었고 300번의 작은 징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실제 운전을 할 때도 비슷하게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사고의 조짐을 몇 번 넘기거나 불안감을 여러 번 예감하다 접촉사고 같은 것이 날 때가 많습니다.
운전에 대해 그만큼 부주의해지고 경솔하거나 자만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신앙이 잘못 될 때도 먼저 그런 성령님의 경고를 여러 차례 주십니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 데, 정신차리고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하는 데, 이런 마음이 속으로 자꾸 들며 나태한 믿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자꾸 말씀을 통해 경고를 듣게 됩니다.
사람들을 통해서든 환경을 통해서든,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점점 직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경고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애굽으로, 앗수르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냥 세상을 향해, 그리고 뭔가 다른 데서 도움을 찾으러 갈 뿐이지 결국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과 이성은 그만큼 세속적인 삶이 편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보려는 게 더 안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위기를 느끼면서도 적당히 죄를 지으며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죄인에게 더 편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삶의 끝에는 그 행위대로 받는 심판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즐기던 것들 대부분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다고 드러날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본성과의 갈등과 세속을 거슬러 사는 힘겨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 끝에는 영원한 생명의 기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힘들지만 믿음의 길엔 때에 따라 심령에 부어주시는 비와 늦은 비의 풍족한 은총과 하나님의 은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희생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다시 사셨습니다.
절대 우리를 짐승 우리 속에 더럽고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깨끗한 자녀로 만들어 천국으로 불러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으로 오염되고 더러워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나오라고 불러내십니다.
그게 인생 막대기이고 사람을 통한 채찍이고 환경의 회초리입니다.
우리는 항상 호세아 선지자의 권고처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 앞에서 멀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매일 다시 예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찢기고 맞았다면 더욱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상처를 만지시고 치료해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호세아선지자는 하나님께 특명을 받았잖습니까?
음란한 여인 고멜을 데려다 결혼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나 정부를 쫒아 집을 나간 고멜을 돈 주고 다시 찾아오라고 그러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명령에 순종하며 호세아가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 되고 강하고 변하지 않는 것인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호세아3장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의 재물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호세아 2장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 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그러니 마지막 14장에서 이렇게 안타까움으로 탄식하며 끝을 맺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저들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때렸다면 뉘우치는 자식을 당연히 위로하고 만져주시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말 안 듣는 자식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 안으려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불순종과 실패로 찢기고 맞은 상처도 치료해 주실 분은 사랑의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사람에게 상처받으셨습니까?
그 사람이 절대로 그 상처를 깨끗하게 치료해 주지 못합니다.
상처 줄 만한 사람이라서 상처를 준 것입니다.
혹, 사과하고 후회한다 해도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다면 정말 강철같이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하나님께 가야 근원적으로 치유됩니다.
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나를 사랑으로 끝까지 참아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때 나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용서해주고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나를 구해주셨는 데 사람의 인정과 사랑은 없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악화 된 관계도, 건강도, 심각한 재정문제도 누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주겠습니까?
그대로 감수하고 살 것 아니면 하나님께 가야 해결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이틀 후에 살리시고 사흘 후에 완전히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이틀, 사흘이란 날의 의미를 아시겠죠?
막연한 날이 아니라 분명한 정한 날에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 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우리가 나서서 모든 계획을 세우고 해결하는 것 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사람이 내일을 계획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요즘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일도 하루 만에 어그러지고 방향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계획을 세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며칠 전 전도대상자 한 분이 놀라서 제게 있었던 일을 얘기하시더군요.
방이 사거리 아구찜 집에서 친구들하고 밥을 먹는 데 마음씨 좋은 주인이 웃으면서 서비스 안주거리를 좀 더 갖다주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마침 식사 끝나고 나가는 손님 차 빼는 것을 봐주러 나갔는데 잠시 후 119구급차 소리가 밖에서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나가 봤더니 차를 봐주러 도로로 내려가 수신호를 하던 주인을 주행하던 차가 그냥 치고 지나갔던 것입니다.
조금 전에 서비스 안주 주겠다던 주인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아무 의식도 없이 도로 위에 벌렁 누웠는 걸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더랍니다.
정말 3분 뒤도 알지 못하는 게 인간사란 것입니다.
우리의 뒷걸음질 뒤에 어떤 사고가 기다리는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에서 우리가 걸을 때 우리의 걸음은 가장 안전하고 모든 길에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시는 줄 믿습니다.
시편37편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길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그 길이 정말 우리에게 너무 잘 맞는 길이기에 마음이 기쁘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엄벙덤벙 가는 길이 아니고 내가 익숙한 걸음으로 걷는 길도 아닙니다.
내 죄짐을 지고는 갈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우리 인생이 장난이 아니듯, 구원의 길은 장난하며 가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씀을 따라 자숙하고 삼가며 한 걸음씩 진지하게 따를 때 우리 앞을 평평하게 하시고 걸음을 견고히 딛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2. 다음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왜 이스라엘이 찢기고 맞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죠.
6절에 하나님께서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아버지 앞에 돌아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형식적인 예배보다 차라리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3절에 보니 호세아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라고 강력하게 제안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점점 악령이 끄는 대로, 죄의 본성에 끌리는 대로 범죄의 늪에 깊이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한탄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 패망의 원인이고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기를 게을리 하고 하나님께 대한 지식에 간절하지 않은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의 경계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미신을 믿고 우상을 숭배할 때는 지식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차피 목석으로 만든 신에다 내 요구대로 복을 비는 것이지 목석신에 무슨 인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상숭배하듯이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든 미신이든 치성을 드려서 복을 받고 성공하기 위해서가 보통 사람들의 목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대 기독교만큼 지독하게 기복적인 것이 없습니다.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은 웬만큼 양심적인 선이 있습니다.
또 어차피 기대를 안해서인지 원하는 게 되든 되지 않든 별로 개의치도 않습니다.
우리는 참 간도 크게 복을 구합니다.
또 응답이 안되면 하나님께 삿대질이라도 할 태세입니다.
기복신앙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묘하게 얽힌 기이한 기독교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의 욕망을 채워주시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탐욕이 끝이 없고 계속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탐욕이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기에 절대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 철저하게 체득하셨습니다.
4장7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잘 되게 해주실수록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범죄하는 게 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잘되면 우쭐하고, 남을 우습게 알고, 침을 튀겨가며 자기 자랑을 하는 죄인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익히 보아오셨습니다.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를 감사하지 않고 그들은 곧 고기를 탐해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몰아다 진에 가득 덮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가 채 씹히기도 전에 원망했던 자들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광야의 여정에서는 하루 하루 만나를 먹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확증해야 할 때였습니다.
고기는 가나안 땅에서 얼마든지 만족하게 먹을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부족하다고 할 때, 구하는 것을 주신다면 그것은 응답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고기가 그들의 입에서 독이 되었듯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구한 것은 우리 영혼에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용해 욕심을 채우려고말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믿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안다, 이럴 때 사용하는 안다라는 원어의 의미는 직접 만나서 사귀는 관계 속의 앎을 말합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고 살아가면서 배우자를 속속들이 알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사귀고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 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시고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이 단지 듣고 배워서 알게 된 지식이라면 하나님을 사귀어 아는 지식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체험으로 알아야 우리 믿음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세상의 어떤 문제와 권력 앞에서도 담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식적으로 배워서 아는 하나님을 실제 관계를 맺고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감동과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우리가 관계할 바가 아니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무엇인지 알고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실제로 믿음으로 행하고 지킬 때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7장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그러셨겠습니까?
하나님의 가르침은 곧 하나님의 인격이십니다.
율법을 주시며 하나님은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즉 율법 속에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추수할 때 밭의 한 귀퉁이는 남겨두라고 하셨습니다.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식량을 위해서입니다.
그대로 지켜 봐야만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신 마음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만 가지 율법과 가르침을 들을 때, 자신과 관계없는 이상한 조항들이라 생각했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분명히 삶의 완전한 기준을 주셨는데, 그대로 따르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아가면 계명과 율법은 이상한 조항일 뿐입니다.
절대로 손해는 못 본다는 고집을 갖고 사는 신자라면 어떻게 왼뺨을 치면 오른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말씀을 주신 예수님도, 그 계명 자체도 나와 상관없는 이상한 교훈일 뿐이라는 것이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번제와 제사가 없었던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 중심으로 지키고 따르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모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가 없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때와 똑같습니다.
말씀과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계명과 교훈을 열심히 배우고 진심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교훈과 말씀에 담긴 생명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닫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 곧 더욱 힘써 하나님을 알기 위해 전념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다음, 두번째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서 인애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인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충성심과 이웃을 온유하게 사랑으로 대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인애가 아침 안개나 이슬처럼 쉽게 사라지는 변덕스럽고 피상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인애가 없어서 망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을 똑같은 눈으로 보십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지극히 작은 자를 대하는 나의 사랑을 보면 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상처를 주고, 평범한 누군가에게 매정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에게 야박하게 군다면 그게 바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인애가 부족한 신자들로 인해 예수님의 사랑이 불신자들에게 먹혀들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천국문을 가로막고 자기도 못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한다는 말씀이 딱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해주셨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대 이웃에 인애를 베푸는 사람들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받을 심판을 대신 십자가에서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목도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종교심이 깊고 예배 분위기를 좋아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겠다고 5장6절에서 무섭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양과 소를 떼로 끌고와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순종이 필요하고 우리의 육성을 굴복시키는 것이 필요하듯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의 마음으로 나의 가족과 형제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위기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따뜻하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쓸쓸하게 독거하며 사랑의 풍성한 기쁨과 위로를 모른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읽은 글을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독실한 성도인 플라워라는 사람이 폭우가 쏟아지는 퇴근길에 바퀴가 펑크가 나 비상등을 켜놓고 허둥대는 중년 여인을 목격했습니다.
플라워는 차를 멈추고 빗 속에서 타이어를 교체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너무 감사해서 무언가 사례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플라워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라고 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여인은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시켰습니다.
임신8개월 쯤 되어 힘겨워 보이는 여종업원이 흠뻑 젖은 여인을 보더니 얼른 수건을 가져와 꼼꼼하게 물기를 닦아 주는 데 음식보다 그 마음이 더 따뜻했습니다.
여인은 식사 후, 음식값 10불을 계산하며 천불을 더 내놓으며 나머지는 팁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종업원은 깜짝 놀라 극구 사양했지만 여인은 이미 자기가 받은 도움을 갚는 것이라며 나갔습니다.
그날 밤 여자 종업원은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잠이 든 남편에게 속삭였습니다.
여보, 플라워, 출산비용 걱정 없겠어.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빗속에서 차를 고쳐주었던 그 남자가 바로 여종업원의 남편이었던 것입니다.
2014.6.27 주일설교 남수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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