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는 배경이 아주 특이한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선지자에게 음탕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비상식적이고 무리한 요구도 하신다는 게 놀랍죠.
호세아선지자 입장이 어땠겠습니까?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소문난 음녀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잖아요?
사람들이 얼마나 수근댔겠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은 회개를 촉구하다 많은 고초를 당합니다.
국가 멸망이 가까워올수록 박해도 심해져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순교하죠.
하나님도 임박한 멸망에 극단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주십니다.
에스겔선지자 같은 경우는 아내를 데려가시죠.
바벨론에 패전하고 곧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경고해도 농담으로 여기니, 충격적인 방법으로라도 깨우쳐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이죠.
호세아선지자와 결혼한 고멜은 아이를 셋이나 낳고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갑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아내의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에 얼마나 절실하고 진심이신지 이런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고 연단하시는 데 하나님은 정말 진심이십니다.
우리는 질질 끌려 억지로 따라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영혼에게 티끌만한 소망도 없다는 걸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오늘 호세아선지자는 아내를 찾으러 갔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살지는 않았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1) 지금 이스라엘 형편이 좋지가 않다는 걸 알 수 있죠.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으로 당하는 고난의 목적은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대체로 두가지 목적입니다.
연단이거나 죄에 대한 징계입니다.
연단을 목적으로 한 고난일 경우는 인내해야 합니다.
로마서5장,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징계로 당하는 고난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에 여호와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악한 행실에 대한 징계로 성치 않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지 않으면 반드시 정신도 삶도 병듭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잘만 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불안과 허무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것입니다.
옛날 가수 조성0씨가 방송3사의 가요대상을 휩쓸었던 때가 있습니다.
당시 주일마다 가요순위를 매기는 프로가 있었죠.
본래 예수님을 믿었지만 스케줄 대로 달리다 보니 4년간 교회를 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날도 연말 시상에서 최고 가수상을 받으러 나갔는데, 그때 드는 마음은 딱 ‘그냥 죽고 싶다’였다고 합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교회로 달려갑니다.
한없이 눈물이 쏟으며 하나님을 떠났던 자신을 회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알되 멀어진 사람이나, 절대로 그 마음에 평안과 복이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똑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란과 교만입니다.
영적인 음란은 바알신을 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들을 산당에 가득 세워 놓은 것이죠.
신자들에게 영적 음란은 무엇일까요?
우리 행복의 원천과 인생의 의미, 목적이 하나님께만 있지 않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돈, 성공, 건강, 인기, 자랑, 쾌락, 이런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값어치가 된 것이 영적 음행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없이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만심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그런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거’. 그리고 ‘하나님 생각 없이 사는 거’.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를 그렇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다 세상에 찢기고, 맞고, 할 만큼 해 보다가 하나님 앞에 온 사람들입니다.
경험한 사람은 그 반복이 두려워서도 하나님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3) 징계로 온 고난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연단으로 온 시련 중에는 하나님께 열심히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우리는 어리석어서 상황이 악화 될수록 더 문제에 매달립니다.
사람 관계가 나를 괴롭히면, 그 생각에 사로잡히죠.
절대로 사람을 묵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시간 있으면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일이 막혀있다면 어떻게 위기를 면할지 문제에만 집착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하신 문제이기에 반드시 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지만 바라본다고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지혜를 얻어야 답이 보이게 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다시 살리십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즉각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켰죠.
하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이틀 후에 살리시고 사흘 후에 완전히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이틀, 사흘이란 날의 의미를 아시겠죠?
막연한 날이 아니라 분명하게 정한 날에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푸는 과정이 우리에겐 길 수도 있지만 이틀 후, 셋째 날은 분명히 하나님이 고치실 날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1)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종교의 형태로 신을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야다’입니다.
많이 들어 보셨을 거예요.
그것은 부부가 결혼 관계를 통해 서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결혼관계는 ‘남편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냥 ‘남편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죠.
신자들은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내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구주이십니다.
거기서 스톱하면 안되는 것이죠.
그 예수님을 실제적인 관계를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배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야다’로 알아간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되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신 적도 없고, 음성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는 데, 어떻게 ‘야다’라는 관계가 되겠습니까?
2) 하나님을 ‘야다’로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시게 하는 것이죠.
이것이 실제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예수님과 야다의 관계가 되려면 주님 말씀에 나를 결합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다른 방법을 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사도 역시 이 중요한 원칙을 알려줍니다.
요일3장24절,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야다의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노력이 없다면, 인격만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야다의 믿음으로 변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그대로 살아보지 않으면, 하나님도 모르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자기를 잘 아는 게 쉽지 않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살려고 해봐야 내가 얼마나 비판적인 사람인 줄 압니다.
허물을 덮어주라는 말씀대로 살려고 해 보면 내가 얼마나 남의 허물 들추고 싶어 안달인지를 알게 됩니다.
말씀대로 지켜보지 않으면, 내 자신과 신앙에서 아무 문제도 못 느낍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도 알지만,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감사하게 되죠.
내가 죽어도 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속하실 수 밖에 없었던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야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목자교회에 어느 새신자가 자기 발로 찾아와 등록을 했습니다.
직업이 회계사였어요.
담임목사님이 어떻게 교회 오기를 결심하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자기가 회계사 일을 하다보니, 단 한사람도 정직한 사람을 못 봤다는 거에요.
다 세금 적게 내려고 온갖 방법으로 탈세를 한다는 것이죠.
정말 한 사람도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종교가 다 사람이 선하다고 가르친다는 거예요.
기독교만 사람이 악하다고 하니, 진리다 생각하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계명이라도 지키려고 살아봐야 내 속의 악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그것을 명하시는 하나님만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힘써 여호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써’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상대를 잡으려고 바짝 뒤쫒는 걸 말하는 단어입니다.
적을 놓치면 안되잖아요?
하나님을 놓칠까 봐 전심전력으로 쫒아 가라는 것입니다.
3)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하나님을 쫒아 간다는 게 때로 깜깜한 어둠을 더듬는 것 같죠.
그러나 하나님은 새벽이 어김없이 찾아오듯,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심령과 삶에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가을에 오는 비와 봄에 오는 비가 없으면 농사를 짓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처럼 나일강의 덕택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로를 내려주심으로만 농작물이 풍성히 결실하는 곳이죠.
우리 성도들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저수지 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서 내려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죠.
비가 안 오면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대주는 용수는 가물기도 하고 홍수로 다 쓸어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른비와 늦은비처럼 우리 영혼과 삶에 알맞게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지금 내 인생에 무엇을 뿌려 놓았는지, 밭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평안할 때든, 곤고할 때든, 항상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아, 내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른비와 늦은비로 영혼과 삶을 축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세아14장1절-9절 (누가 깨달으랴) (5) | 2024.12.04 |
---|---|
호세아14장1절-9절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0) | 2017.08.15 |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6장1절-6절) (0) | 2014.07.01 |
호세아와 고멜 (호세아서1장1절-11절) (0) | 2011.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