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야고보서2장1절-13절 (차별 금지)

남수연 2025. 2. 8. 00:06

최근 비행기 사고가 심상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안공항 사고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가슴을 쓸어내릴 사고가 있었죠.

지난 주 김해공항에서 이륙하려 대기하던 비행기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십 분 정도 이륙이 늦어지는 바람에 다행히도 176명이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워싱턴 근방 공항에서도 여객기가 군용기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죠.

안타깝게도 이 사고로는 탑승객 67명이 전원 사망했습니다.

탑승객 중에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였던 피겨스케이트 코치와 선수들도 타고 있었고 한국계 유망주인 어린 두 선수도 있었습니다.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거기 유명인이 있었냐는 데 관심을 보이죠.

그런 걸 보며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더 관심을 받는 죽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죽음도 있구나

사람이 평생 차별받고 살다, 죽어서도 차별을 받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야고보사도는 이 차별의 문제를 심각하게 깨우칩니다.

당시 성도들이 서로 차별하고 상처 주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야고보서 바탕에 깔려 있는 인생의 시련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죠.

우리가 서로서로 차별 없이 존중받고 대우 받는다면 거기서 얻는 행복이 클 것입니다.

오늘 그동안 무심히 지나왔던 차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배우고 지킬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이 세상은 평등사회가 아닌 차별 사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지 않고 차별합니다.

그 사실을 평소 잘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도 별로 경각심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엔 신분의 차별이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죠.

차별당하면 기분이 상하지만 세상이 다 그렇다고 분을 삭이며 넘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차별을 경험합니다.

다른 형제들과 비교당하며 부모에게 차별받고 자랐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려서 부모 마음을 잘 몰랐을거라고 치부할 일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받는지 아닌지 귀신같이 압니다.

부모라 해도 자기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지는 않잖아요?

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엄마의 밥상이라는 프로에 보니까 어릴 때, 어쩌다 나오는 고기 반찬을 아들들에겐 주고 딸들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떠올리는 출연자가 있더군요.

그게 수십 년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차별을 당하며 삽니다.

가난 때문에, 학력 때문에 차별당하고, 인종 차별당하고, 건강 때문에 외모 때문에 차별당하고, 사는 동네, 하는 일에 따라서 차별당하죠.

그리고는 똑같이 그대로 남을 차별합니다.

세상은 사람 사이에 엄연한 차별을 두고 지위와 가치를 매깁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그런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도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야고보사도가 분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절부터 4절까지 마치 어떤 교회를 들여다 보는 듯 사실적 사례를 듭니다.

회당에 금가락지 낀 사람과 허름한 옷 입은 사람이 들어옵니다.

교회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모이던 회당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교회는 믿는 성도들의 모임을 칭하고, 회당은 공식 예배를 드리던 예배당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당시 회당은 벽 쪽으로 돌아가며 돌로 된 좌석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너희가 어떻게 차별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눈여겨 본다는 말의 뜻은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보았다는 뜻입니다.

부유층이 나타나니 눈이 번쩍 띄었다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들이 오면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고 좋은 자리를 권합니다.

행여라도 좋은 옷에 더러운 흙이라도 묻힐까 봐 먼지를 털어줬을지도 모릅니다.

반면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의 차림은 남루했습니다.

3,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가난하게 사는 것도 힘든 데, 차별로 자존심까지 짓밟히는 것이죠.

사실 가난한 것과 부유한 것으로 그런 차별을 받는 게 합리적이지 않잖아요?

최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불법 이민자들을 체포해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니 사람들이 죄인처럼 두발에는 족쇄, 손에는 수갑을 차고 줄지어 군용기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누구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남미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가난을 받아들이지 왜 남이 일군 것에 숟가락 얹으려냐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 불법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넘어 온 것만은 아닙니다.

온두라스 같은 나라도 마피아 조직원들이 자식들을 잡아놓고 비싼 몸값을 요구하는 게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자식을 영영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생존을 위해 그들이 국경을 넘는 것입니다.

이런 차별을 세상 사람처럼 당연히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성도 내 나라의 혜택을 타국민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불법 체류자를 볼 때 사람들의 견해도 갈라집니다.

쫒겨날 처지에 있는 아동들이 불쌍하니 받아주자.

아니면, 왜 우리와 선조들이 피땀으로 일군 경제사회의 혜택을 거저 누리게 하냐.

나는 당연히 누려야 하지만 저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차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평등한 세상을 만드셨지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차별하며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차별하는 줄 아십니까?

하다 하다 나 자신도 차별합니다.

내가 맘에 들면 그런 나를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뭔가 실수하고 기대했던 만큼 잘하지 못했으면 실패한 나를 창피해하고 열등하게 생각하고 미워합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깊이 차별이란 본성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차별이 증오를 불러오고 끔찍한 악을 행하게 합니다.

지난 주 인도에서 누이를 살해 한 4명의 동생들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누나가 불가촉천민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 것에 대한 명예 살인이었습니다.

누나는 남편과 사이에서 2명의 자식도 낳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동생들의 증오도 사그러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명절에 왔다 남편과 함께 변을 당한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지독한 차별을 만들고, 접촉하면 불명예스럽다고 주저없이 살인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차별 심리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2. 하나님은 차별의 본성을 갖고 차별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차별하면 안되는 지를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설득되지 않으면 마음이 가는대로 계속 차별하며 살게 됩니다.

1절에서 그 이유를 알려주죠.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너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 믿음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차별하면 안됩니까?

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데 합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심판받을 그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는 걸 믿는 것이잖아요?

큰 죄인들끼리 무얼 차별하냐는 것입니다.

내 죄가 가볍고 하찮지 않다는 걸 보여주시는 게 십자가 책형입니다.

작은 죄를 두고 하나님이 그만큼 벌하시겠습니까?

내 죄가 하찮은데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중형을 대신 받으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책형의 장면을 그린 화가들이 많습니다.

그뤼네 발트라는 화가가 성당 제단화로 그린 주님의 십자가 참형의 모습은 너무 참혹하고 사실적이라 심장이 철렁할 정도입니다.

화가는 못 박히신 손가락에 그 고통을 생생하게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열 손가락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숨이 막히는 고통에 주님의 열 손가락이 사방으로 빳빳하게 뻗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저 십자가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지만 더 깊이 나를 위하신 십자가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 내가 남보다 더 대우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금반지 끼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사람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나보다 낮은 계층에서 사는 사람도 나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평등한 죄인끼리 차별하는 게 악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명품으로 차려입고, 외제차 타는 부자 앞에서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좀 잘 살고 나보다 낫다고 무시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실체도 보잘 것 없는 죄인이라는 걸 보고 상처받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나보다 좀 못한 사람을 차별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죠.

우월감도 없고 열등감도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세상의 성도들이 해야할 사명임을 잊지 않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예수님을 믿으면 차별을 그치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누구도 토 달지 못할 만큼,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바리새인에게까지도 차별 없이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차별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시니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 생각에서 하나님이 내게 불공평하게 대하신다는 오해도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차별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구별하십니다.

차별은 사람을 놓고 내 기준으로 평가해서 가치를 정하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고, 돈이 많고, 가까이 하면 실제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대에게 굽신대고 잘 해주는 게 차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런 잣대로 평가해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지 기준을 모르잖아요?

내가 남과 비교해서 더 착하고 정직하고 인간성이 좋아서 구원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열심히 봉사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고 구원하신 게 아닙니다.

구원받은 은혜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있죠.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구별하신 그 기준을 우리는 모릅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을 싫어했고 인정받을 일을 한 게 하나도 없는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유도 없이 구원받은 제가 제일 황당한 것이죠.

구별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죠.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가난한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택하셔서 구원하신 것처럼 들리죠.

그렇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과 부자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죠.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셨다는 말씀은 세상에 대해 가난한 사람이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세상에 대해 가난할 수가 있는 것이죠.

아니면 누가 가난을 원하겠습니까?

구원을 경험한 성도들은 영생의 가치에 비할 때 일시적인 세상 가치에 대해 욕심을 조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큰 경륜은 우리가 간단히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선택되어 구원받는 것과, 그냥 유기되어 살다가 심판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한 인간에게 엄중한 일입니까?

그것을 하나님 맘대로식으로 말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밤새 기도하시고 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잘 모르셔서 그러셨겠습니까?

우리가 내 목숨과 인생에 애틋하고 진심인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인생에 그만큼 신중하고 사려깊게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훌륭한 순서대로 줄을 세워서 상위 몇%를 구원하신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줄을 세워 차별하셨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너희도 사람의 값어치를 평가해 차별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 뜻대로 구별하셔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차별과는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대할 때의 나를 들여다 보면 내가 너무나 심하게 차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차별하지 않으시듯, 우리도 그렇게 세상과 점점 구별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3. 부자들에 대해서는 오늘도 다른 성경에서처럼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6절에 이렇게 말씀하죠.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이것은 교회 내 부자에 대한 게 아니라 보편적 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시에도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고 신앙을 깔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게 세속사회잖아요?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 만큼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왜 천국 들어가기가 어려울까요?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돈의 힘입니다.

권력을 탐하는 이유도 거기에 돈이 따라오기 때문이죠.

돈 없는 권력을 누가 탐내겠습니까?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뒤 드러나는 것은 돈에 얽힌 각종 비리잖아요?

권력만이 목적이었다면 그런 일을 왜 하겠습니까?

돈의 힘이 이렇게 막강하니 부자들은 더욱 돈을 의지합니다.

돈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이해가 안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부자라고 다 악하고 하나님을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을 인정받은 부자가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거부였고, 족장들이 다 부자였습니다.

다윗도 큰 부를 누렸죠.

신약성경에서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이 경건한 부자였고 바나바와 마가와 요한도 부자였고 루디아도 부유한 사업가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주신 부를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알파문구 창업주가 이동0 장로입니다.

이분이 젊을 때 남대문시장에서 문구점을 엽니다.

어릴 때 가난해서 몽당연필만 쓰던 아쉬움에 동경했던 문구점을 연 것입니다.

계시록1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에서 알파문구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여섯평 정도 가게를 얻는데, 집주인이 가게세를 주변 시세보다 더 비싸게 받는 거예요.

가난한 이장로입장에서는 주인이 너무 야속했죠.

왜 내게는 가게세를 더 비싸게 받냐고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아리송했습니다.

당신은 젊으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가겟세를 못 낼까 봐 더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장사가 너무 잘 돼서 6년 뒤 옆에 나온 가게를 하나 사게 되었습니다.

새 가게를 오픈하며 주인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갔는데, 통장을 하나 내밀었습니다.

시세보다 더 받았던 돈을 그대로 저축해 놓았던 것입니다.

젊은이가 버는 것을 낭비할까 봐, 장사 경험이 많은 주인이 지혜롭게 했던 것이죠.

그분이 새문안교회 권사였다고 합니다.

사려깊은 부자죠.

당시 이장로님 매장 앞에 단독으로 쓸 수 있는 수도가 있었습니다.

옛날엔 남대문시장에 수도시설이 부족해서 상인들이 물을 외부에서 사다 썼다고 합니다.

이장로님은 자기 집 앞 수도를 시장 상인들에게 무료로 개방했습니다.

한 달 수돗세로 한 사람 인건비가 나갔습니다.

그러나 시작할 때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께 받은 것을 계속 이웃과 나눈 것이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꾸준히 학용품을 기증했습니다.

이장로의 사업은 점점 번창해서 지금은 연 매출이 천억에 달합니다.

알파문고는 독특한 프랜차이즈입니다.

창업할 사람이 돈을 내고 내고 점포를 여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점포를 열고 운영하다 직원 중에서 선정해 경영을 완전히 넘깁니다.

창업할 돈이 한푼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죠.

벌어가면서 투자금은 갚게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이 부자가 되는 것은 불리한 조건을 갖고 차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축복하셔서 남에게 베풀 수 있다면, 사회를 변화시키진 못한다 해도 주변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도록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권유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라고 이 문제를 매듭 짓습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한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차별의 문제가 이웃 사랑 속에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하나만 어겨도 결국 율법을 범한 사람이 된다는 걸 알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살인해 놓고 나는 간음하지 않았으니 율법을 잘 지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차별했다면 이웃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어긴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너희는 이렇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기도 하라

우리는 착한 행실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마치 주님이 명령하신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경의가 아니겠습니까?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랑할 것이 있다면 긍휼을 베푼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긍휼을 많이 베풀어 자랑거리가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할지를 계산합니다.

결과는 늘 차별대우죠.

저 사람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어라고 무시합니다.

오늘 말씀은 너희가 자격없이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차별없이 긍휼을 베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차별당할 때 내 처지가 서럽고 화도 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차별해서 낮은 자리에 두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차별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하나님도 나를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차별의 시선을 느끼고,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나를 항상 아끼고 사랑하시니 담대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실패하고 실수했을 때도 잘 했을 때 나와 차별해 불행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항상 우리를 받아주시듯 여유있게 나와 이웃을 차별 없이 받아주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