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야고보서1장1절-8절(시련과 인내)

남수연 2025. 1. 14. 21:13

https://youtu.be/2QCm4XUjxW4

 

아직 기대와 소망을 갖고 싶은 새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시련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시련, 당할 만큼 당한 것 같은데,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는 시련을 대비해야 하는 것일까요?

전쟁이 나고, 사업이 망하고, 중병에 걸렸을 때 가장 크게 무너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근거 없는 낙관론자라고 합니다.

아무 근거 없이 잘 될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잘 되지 않았을 때 가장 큰 타격감을 느낀다는 것이죠.

우리는 올해도 시련을 대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미리 걱정하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면 환영하라고 하십니다.

신학자 칼빈은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하며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시련이 오면 이걸 신용장에 기입하고 경사로 여기라

지금도 어려운 시험 중에 있는 성도들에겐 이 말씀이 더 시험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자신도 시시각각 위협과 박해를 받고 있던 사도가 쓴 것입니다.

고난 당할 때의 어려움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도의 시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를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1. 야고보서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니

1) 야고보서 발신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소개하기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를 주님의 종이라고 여기게 되죠.

야고보는 열두제자에 들어가지 않지만,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수장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주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30년 가까이 함께 살았던 형님이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온 국민이 대망하던 그 메시야라는 걸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완벽한 가장이자 맏형으로 가족들을 위해 봉사하셨던 것이죠.

야고보가 예수님이 구주심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신 다음으로 여겨집니다.

고린도전서15장에서 바울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 기록합니다.

야고보도 바울사도처럼 부활하신 모습을 보고 나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게 된 것이죠.

그리고 베드로마저 박해로 인해 피신한 뒤, 끝까지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 교회를 지도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야고보가 이 야고보서를 쓴 뒤 약 2년 뒤 대제사장에 의해 투석형으로 순교 당했다고 전합니다.

 

2) 편지의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 성도들을 상대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죠.

그런데 당시에는 실제로 이 편지를 받을 수신자가 있었습니다.

이 편지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며 살던 성도들에게입니다.

여기서 흩어져 있는이란 말이 헬라어 디아스포라입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르는 말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입니다.

지금도 신앙 때문에 피해를 보고, 세상 속에서 소수로 살아갑니다.

인간사회에서 소수는 다수에게 불이익을 당하죠.

그렇기에 사회생활에서 대놓고 신앙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총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신앙 양심에 걸려도 좋은 게 좋다 그냥 넘어가는 때가 많습니다.

지금 흩어진 성도들도 예수님 믿는 걸 감추면 박해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을 숨길 것 같으면 애초에 고향과 삶의 터전을 떠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 가서든 그리스도인을 숨기지 않았기에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혹은 외딴 동굴로 도망 다니며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 밝혀 놓은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은 그릇으로 덮어 놓으라는 게 아니고 등잔대 위에 놓고 비춰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를 피하기 위해 믿음을 숨기는 게 옳은지를 좀 생각하게 됩니다.

켜 놓은 등불을 비추지 않으면 세상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되죠.

지난주 골때녀라는 축구예능 프로에서 잠깐 긴장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각 팀을 맡은 감독들이 둘러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전 시즌에서 김병0감독은, 우승을 가져다 준다는 행운의 라임 열매를 경기 때마다 계속 손에 쥐고 다녔습니다.

결국 김감독이 맡은 팀이 우승을 했습니다.

그날 새판을 짜던 중 맞은편에 앉은 이영0감독에게 그 라임을 던져주며 이걸로 한일전에서 우승 한번 해 보라는 거예요.

이영0감독이 얼떨결에 날아온 행운의 라임을 받았습니다.

이감독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크리스찬입니다.

순간, 저도 이감독이 어떻게 할지 좀 긴장이 되더군요.

그런데 이감독이 다시 라임을 김감독에게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죄송하지만 크리스찬이라 받을 수 없다. 선수들을 믿고 실력으로 이기겠다이게 예능프로인데, 순간 종교관의 충돌로 비치게 된 것이죠.

라임을 되돌려 받은 김감독도 아차 싶었겠죠.

분위기가 잠깐 난처하게 흘렀습니다.

그런데 꼴찌팀을 맡은 최성0감독이 얼른, 그거 나 달라고 하는 바람에 상황이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냥 행운의 상징인 라임 열매를 받고 웃음으로 넘어가야 했을까요?

이감독은 신앙 양심이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특히 그럴 때 이감독의 반응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메시지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 방송이 예능이지만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일반 사람들은 보면서 틀림없이 불편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편협하다, 예능에서 굳이 신앙을 밝히고 상대를 민망하게 해야 하나.

제가 반응이 궁금해서 이영0, 골때녀, 라임이라고 검색했더니 한 건의 기사가 올라왔더군요.

이영0가 신앙을 이유로 행운의 라임을 거절했다 그 정도였고 반응도 잠잠했습니다.

이감독이 독실한 크리스찬이라고 대충 다 알기에 굳이 시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대로 말하고 행동한 뒤 고초를 겪는 유명인들이 많습니다.

작년 연말 방송사 시상식에는 상을 받은 크리스찬 성도들이 수상소감에서 변함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장나라씨, 박신혜씨, 전미도씨, 이하늬씨 등등 많은 연기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있게 도와준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감사하며, 정말 자기를 거기에 세워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어떻게 빼겠습니까?

우리가 배려 때문에 믿음을 꽁꽁 싸매고 있으면 그런 불편함은 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주어진 필드에서 평생 생계를 위해 삽질하다 말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드러내야, 전도가 되든 박해를 받든 유의미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 첫 박해가 일어나고 성도들의 디아스포라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망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종류의 시련을 당하든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증인이 되는 일을 감당한다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2. 시험을 당하면 기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단 한 줄의 간략한 안부를 전한 뒤, 바로 시련에 대한 문제로 넘어갑니다.

이 편지를 읽을 성도들이 처한 문제이고, 가장 먼저 알리고 싶다는 뜻이겠죠.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으로 인한 시련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에서 만나는 시련 전부를 말합니다.

1) 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냐는 문제의 답이죠.

당시 유대인 성도들은 구약성경으로 하나님 신앙을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약속하셨죠.

메시야가 오시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고통이 끝나고 복된 나라가 올 것이라고 예언된 말씀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데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뭐가 잘못 된 건 아닌지, 사도들은 무엇이라 하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일을 주셨나 당황되고, 묻고 싶잖아요?

사람들 속에는 잘못했기에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자연법칙이 새겨져 있습니다.

맞습니다.

마지막 날 사람들은 자기의 죄과에 따라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성도들에겐 그렇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잘못해서 벌을 받고 시련을 당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반대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 시련, 고난을 만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기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련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수하거나 죄를 지어서 만난 고난이라 해도 목적은 똑같습니다.

시련이 주는 것들은 평안할 때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합니다.

인생이 평탄할 때는 그것대로 감사하지만, 시험의 때에도 낙심할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유익이라 해서 자청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찾아온 귀한 시험을 반가이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경험했듯이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고난 중에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고, 믿고 나서도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은 이후에 계속 형통한 게 유익이라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2) 이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인내는 버틴다, 견딘다는 뜻입니다.

인내는 좋은 것이죠.

누구든지 세상에서 인내하고 견딜 수 있으면 어떤 역경도 이겨냅니다.

견디지 못하고 버티지 못해서 관계가 끊어지고, 삶을 포기하고 그런 것이죠.

그런데 인내에는 짝이 있는데, 그게 바로 시련입니다.

시련이 없다면 인내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올 때 그 짐을 지고 버티는 것이 인내입니다.

전에 장미란선수가 베이징올림픽에서 역도 금메달을 딸 때입니다.

역도 경기는 평소 본인 최고 기록에서 20% 까지 무게를 올려서 도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수들은 누구나 자기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무게에 도전하겠죠.

그때 장미란 선수가 183킬로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신호가 날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그때 장미란선수의 다리가 후둘거리잖아요?

그걸 버텨서 금메달을 딴 것이죠.

우리가 시련의 때, 내게 얹혀 진 짐을 지고 버티면 금메달입니다.

버티는 것 자체가 금메달입니다.

하나님은 곧 성공을 인정하고 무거운 바벨을 내려 놓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은 짐을 질 수 있게 슬쩍 거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절대로 우리 무릎이 꺾여 주저앉거나 팔꿈치에 부상을 당할만한 무게를 얹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시련의 무게를 견디고 나면 다음에 시련이 올 때도 그래, 해 보자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독하게 마음먹고 환난을 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긴 고난은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걸 보게 됩니다.

전에 솜틀집을 해서 돈을 벌고 가게 건물까지 산 건물주 솜틀집 사장님이 어느 프로에선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구멍 난 양말을 신는다고 하더군요.

또 가난해질까봐 돈을 못 쓰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겪어온 가난이 너무 무서워 또 그렇게 될까봐 두렵다고 눈물까지 흘리더군요.

자수성가한 그런 분들 보상 심리로 흥청망청 쓸 것 같지만 그렇게 못합니다.

자식들은 그렇게 쓰더군요.

저도 가난을 겪어 보았지만, 그래도 감당하게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손길이 있었습니다.

또 그런 상황이 된다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또 다가오는 시련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일단 똑같을 것입니다.

다만 지나온 시련들을 견디게 하신 하나님이 또 도와주실 것을 알기에 해 낼 것 같습니다.

 

3) 인내가 가져오는 유익을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련과 인내가 없으면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고, 부족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 정반대죠.

우리는 고난이 없으면 내가 더 성숙하고 믿음도 좋아질 것 같은 데,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왜 시련과 인내를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까요?

시련이 없이는 아무도 죄의 본성을 다루고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시험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 외에 여러 가지 형벌이 추가됩니다.

노동의 강도가 쎄지고, 먹고 살기가 힘들고, 사람 관계의 난관을 예고하십니다.

시련이죠.

그것은 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벌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을 반역하고 비틀어진 본성으로 살아갈 인간들이 그나마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제동장치를 걸어 놓으신 것입니다.

교만과 탐욕과 시기와 악독과 같은 죄는 시련만이 조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없어지지 않기에 인생에 거듭 시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오는 시련들을 그냥 두시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죄의 뿌리가 칡뿌리처럼 굵어지고 결국 나를 칭칭 휘감고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작고 사소해 보이는 악이 있으면 그 속의 뿌리는 이미 상당히 자라 있습니다.

내 본성이 마음대로 활개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시련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시련은 밉지만, 사실 적군이 아니라 나를 위하는 아군인 것이죠.

올해도 그런 크고 작은 시련들을 통해, 우리 믿음과 성품이 온전하게 되고, 선한 일을 하기에 잘 구비되고, 부족함이 없게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3. 시련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시련은 우리 지혜와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시험이 유익하다 해도 평상적인 범주를 넘어가는 고통은 견뎌 내기 힘들죠.

우리교회에서 작년에 계속 건강으로 중보기도에 이름이 올랐던 분들이 믿음의 자이언트이십니다.

끝이 안 보이는 통증과 불편을 매일 참아낸다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구하라고 하십니다.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결국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시험에 넘어지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시련을 해결하고 견딜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죠.

야고보는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는 걸 수도 없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중대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유대교 출신의 성도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이 문제로 안디옥교회에 있던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교회를 찾아옵니다.

이 문제를 두고 논의를 한 뒤 야고보사도가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줍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의 짐을 지우지 말라 하고, 음행 등의 몇 가지 금지 사항만을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이런 중대한 문제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사도가 그런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사도가 죽임을 당한 뒤, 성도들이 시신을 수습하며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야고보사도의 무릎에 굳은 살이 박이고 딱딱해져 늙은 낙타의 무릎 같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풍랑 속의 교회를 이끌 수가 있었던 것이죠.

올해 크고 작은 모든 시련을 이길 지혜를 구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 그런데 고난 중에도 기도하지 못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이 오면 먼저 하나님께 화가 나고 원망이 됩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내게만 이런 고통을 주시냐는 반발심이 생깁니다.

사람은 거절당하거나, 힘들게 되면 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시험 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내게 인색하시다, 내게는 깐깐하시다는 섭섭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야고보사도가 정정해 주는 것입니다.

삼십여 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야고보만큼 예수님의 성품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또 고난 중에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의심입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설마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이런 마음은 겸손이 아니라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사람은 본성적으로 의심이 많습니다.

고난이 오면 더 의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을 격노하게 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번번이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럴 능력이 있으신가?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거나, 광야 생활이 막막할 때마다 이 두 가지를 항상 의심했습니다.

이게 고난 중에 우리에게도 드는 의심입니다.

결국 저들은 출애굽하고도 그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애굽을 그리워하다 광야에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자손을 광야에서 먹이시고 마침내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알잖아요?

우리를 죽음의 홍해를 건너 구원하신 하나님은 천국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도우시고 선하게 인도하십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다 아시고 내 모든 생활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항상 지혜를 구하여 시련을 이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무리 시련이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지만 그 불구덩이에 있을 때는 고통과 절망의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날을 돌아보니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견디고 버텼노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죠.

더 훗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때는 그 모든 아픔과 상처까지 다 잊게 될 것입니다.

올해도 견뎌야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큰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있다 해도 하나님이 더 좋은 나를 빚으시기 위해 허용하신 것을 믿고 잘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 원하는 게 더디 이뤄진다 해도 소망을 가지고 잘 견디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