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통계청에서 직장인 1500명의 소득을 분석해서 월평균 소득을 발표했습니다.
딱 중간에 있는 사람의 월급은 241만원이라고 합니다.
직장인들의 절반은 241만원 이하의 월급으로 산다는 것이죠.
그중 30대의 평균 월급은 176만원입니다.
30대 청년들이 왜들 결혼을 못하고 있는지 알만한 통계 결과입니다.
넘보기 힘든 집값, 혼수마련, 출산과 육아문제를 해결하기엔 월급이 많이 부족하죠.
그런가하면 김앤장 법률사무소 같은 경우 월 7천만원 이상을 받는 사람이 148명이나 된다고 하네요.
다른 사람이 얼마나 보는지 이런 뉴스에 우리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을 안 할 수가 없고, 돈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에 관심을 갖고 돈을 더 벌려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야고보사도는 당시 교회 성도들의 경제활동에서 무심히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물론 그 안에는 신앙의 허점이 있었습니다.
돈에 대한 태도와 돈벌이의 양상은 결국 근본적인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믿음에 맞는 더 알찬 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지, 더 넓게는 성경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오늘 어떤 경제 전문가 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컨설팅을 한번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성경의 서신서들은 편지를 받을 교회와 성도들의 문제가 동기로 씌어진 것들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그 당시 성도들의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이 교회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이 야고보서의 기록 시기를 로마의 네로황제 박해 때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엔 시련과 인내에 대한 권면이 많이 나옵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세속화가 되어 교회가 황폐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아무리 물질이 교회에 모여도 부요해지는 게 아니라 심신과 영혼이 다 황폐해 집니다.
당시 교회엔 특히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갈등이 심했습니다.
교회 내에 빈부에 따른 차별이 있었고 부자들은 오만했고 가난한 성도들은 교회 와서 더 좌절을 맛봐야 했습니다.
교회 안에선 막말이 오가고 서로를 비난하며 싸웠다고도 합니다.
사르트르라는 작가가 남긴 말 중에 ‘타인이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인관계가 그만큼 괴롭다는 말이죠.
그런데 남에게 말 잘못하면 정말 같이 지옥에 떨어지는 괴로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대인관계의 모든 갈등은 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가 혀에 재갈을 물리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죠.
그러니 교회에 무슨 은혜가 있고 무슨 축복을 받겠습니까?
초대교회가 성령충만 할 때 세상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상종하지 못했다고 사도행전은 진술하죠.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적 도덕성에 세상이 압도된 것입니다.
그들은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자기 집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랬잖아요?
그때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삼십년이 지나 야고보사도가 편지를 쓰는 지금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현대 교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젠 세상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만큼 세속의 물결에 몸을 담그는 것이 사람들에게 편하고 천성에 맞기 때문입니다.
송태0 목사님이 이 설교를 하실 때 이런 경험을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송목사님 친구 한 분이 하도 교회가 안 되서 금식하러 기도원에 올라가셨다가 잘못되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긴급한 상태에서 친구 목사님들이 소식을 듣고 급히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소생하기 힘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뭔가를 자꾸 중얼거리고 있길래 송목사님이 가까이 귀를 대고 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 떠나기 싫어’
송목사님이 깜짝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목사로서 교회를 위해 금식 하다 죽게 되었는데 그 입에선 하나님께 가니 좋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좋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우리의 본성을 강력한 흡인력으로 끌어 당깁니다.
그러니까 세속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각성하고 버티며 살아가지 않으면 그냥 우리도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돈을 벌고 쓰는 문제에 있어서 세상신의 방법대로 끌려 다니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좀 더 벌어서 좀 더 호사스럽게 풍요롭게 살 것인지가 목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생활에 불편하게 끼어드시거나, 우리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시게 철저히 방어하는 것이죠.
신앙의 영역만 열어 드리고 경제생활 쪽엔 아예 발을 들여 놓으시지 못하게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교인들의 모습을 꼬집어서 문제삼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사업가, 상인들이 돈 버는 얘기를 하며 하고 떠벌이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죠.
교회에서도 끼리끼리 모여 큰 소리로 사업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업을 위한 모든 것들은 철저히 준비되었고 이제 오늘 내일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무역이 잘되는 도시에 가서 한 일 년 정도 상주하며 사업을 벌이면 확실하게 이득을 볼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업수완이 좋았고 경험도 많아 이번에도 손대는 일이 잘 될 거라 자만하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유대인들이 본래 장사 수완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유태인자본이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사업을 준비했지만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야고보사도가 조목조목 짚어 갑니다.
이들의 사업계획은 주도면밀했지만 놓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1. 모든 사업조건들을 고려했지만 인생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내가 계획한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신생기업 열 곳 중 네 곳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자영업자들이 폐업할 당시 월 평균 이익이 112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버티면 된다고도 하지만 버틸 수가 없는 것이죠.
저도 제이스도시락을 창업하고 넉달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렇게 될지 시작할 때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다들 창업 몇 달 만에 지점을 냈다는 화려한 성공신화를 꿈꾸며 개업을 하지만 미래가 계획한 대로 됩니까?
한 은퇴자는 일 년을 치밀하게 준비해서 고깃집을 열었지만 구제역 파동 때문에 넉달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고 합니다.
자영업을 일례로 들었지만 우리 인생의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꿈꾸고 준비하는 일들이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직장이나 학교 문제가 과연 목표한 대로 이뤄질까요?
지금 사귀는 상대와 마침내 결혼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자식들이 내가 바라는 대로 잘 자라줄지도 누가 안심할 수 있습니까?
미래를 전망할 수야 있겠지만 우리에게 보장되고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기 생각대로 모든 일이 될 듯이 허탄한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27장1절은 이런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그 다음 이들이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 또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2. 우리 생명이 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면 생활이 더 나아지겠지만 그것도 건강과 생명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이 순간 뿐이지 누가 내일을 보장받았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약속 날짜를 잡으며 ‘일주일 뒤, 내가 살아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평균 수명 이상은 더 살려니 생각하며 그만큼 보장된 줄로 압니다.
지난 주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췌장암을 다루더군요.
우리 어머니도 췌장암으로 돌아가셨기에 관심을 갖고 좀 보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생긴 분들이 한결 같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너무나 건강했다는 거예요.
하필 이렇게 치료가 어려운 췌장암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합니다.
몇 달 전에 건강검진을 받고 아무 이상도 없었는데 불과 반년이 안되서 발견된 췌장암이 벌써 3기, 4기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내일의 건강을 장담하겠습니까?
다녀오겠다고 인사하고 나갔던 가족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은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 오늘도 어디선가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 겨우 코의 호흡에 있잖아요?
접시 물에 코만 박고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설교말씀에서 노후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남은 평생 즐기며 살겠다는 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성경은 우리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을 때는 정말 대단하게 보입니다.
비행기가 땅에 묶이고 안개 속에서 몇 중 추돌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해가 나면서 안개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안개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도,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사람도 결국 인생의 끝을 보면 안개처럼 허무합니다.
정말 희한하게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게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듯 우리 현실 생활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아무리 영향력이 컸던 사람도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떠나면 안개처럼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의 인생을 안개 같이 사라지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개처럼 허무하게 호흡이 끊어지고 홀연히 끝나는 인생을 통해 영원한 것을 동경하고 자기의 창조주를 찾게 하신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은 사람만이 그 곁에서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17절에서 말씀하시죠.
이 세상도,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3.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도 이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그들의 인생에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속적인 성도들은 경제활동에서 하나님이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의 결정들을 통제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자유와 이생의 삶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주권적으로 인생을 통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올바른 방향을 잡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내가 원한대로 다 풀리지 않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미래가 불확실하고 여러 사람들에 의한 변수와 다양한 사회구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개입 때문입니다.
어느 일은 간절히 원했지만 허사가 되고 어느 일은 기대도 안했는데 불쑥 끼어 들어와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인생의 결정적이었던 일일수록 제 능력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잠언16장9절이 그런 역설의 이유를 확실하게 설명해 줍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므로 돈을 버는 일이건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건 가장 지각 있는 방식을 야고보사도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우리의 생존과 생활 속에 하나님을 모시라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겠다고 인정하고 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가장 복되게 살고 하나님의 뜻도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안전한 이유는 우리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제가 차를 빼려고 후진하다 화들짝 놀라 가슴을 쓸어 내린 일이 있습니다.
아파트주차장이라 주의를 안 하고 옆 좌석의 물건을 챙기고 무심코 후진했던 것입니다.
차를 움직이는 순간 뒤에서 요란한 경적이 울리고 폭스바겐차가 가까스로 비켜서 급정지를 해 있었습니다.
일초만 빨리 움직였어도 그 차의 운전석을 들이 받을 뻔 했습니다.
큰일을 면하게 하신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실수와 한계까지 선하신 하나님이 커버해 주시는 것이죠.
그렇기에 성경은 계속해서 범사에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이 위험하고 변칙적인 세상에서 안전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계획이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하루를 계획하고 미래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합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바울사도는 모든 계획 앞에 항상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주님의 뜻이라면’ 이란 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되어지는 대로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시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결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서 이뤄지길 위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돈 벌 때 정직하게 하라시니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직장 시간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말라시면 그러면 됩니다.
성경대로 살면 축복해 주십니다.
그리고 특별한 계획은 기도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문을 살짝 열어 놓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내 생활과 함께 이뤄져 가는 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그렇게 해서 내게는 가장 안전하고 복된 생애가 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를 하늘나라 사업에 동참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경영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대단할 것 없이 소박한 삶이라 해도 반드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내 몸 하나 위하다 가는 게 아니라 영원에 남을 고귀한 사명을 반드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도 값어치 있는 일을 해 낼 기회를 분명히 주십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서 살면 그런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순종하고 그 일을 해 낼 때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유경험자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가 안타깝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세속적인 성도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산 것이 불행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은 일들은 결국 죄로 향합니다.
세속적인 방법으로 번 돈으로 세속적인 교인들은 결국 자만에 빠집니다.
그리고 돈을 치부하는 것에 점점 도취되어 근로자들의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 악덕 기업주가 되었다는 것이 본문 뒤에 이어집니다.
야고보사도의 무섭고 통렬한 심판이 그들에게 쏟아집니다.
결국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 죄와 심판으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느새 죄의 자리에 가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경을 보면 정말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반면 아무리 큰 일이 난 것 같아도 그 결과를 보면 그것을 디디고 더 성공적인 자리에 올라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그 차이가 간단히 말해 무엇일까요?
야곱은 자기 꾀로 살며 온갖 풍상을 처절히 겪은 뒤에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맞추는 방법을 알았지만 요셉은 일찍이 자기 인생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맞췄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도님들이 생각하는 계획과 미래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직장에서 하나님을 고려하십니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우리 길을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속세상에 살면서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점점 더 연마해 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땅에서 안개같이 잠시 있다 떠날 우리 생을 현세와 내세를 위해 가장 복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생각엔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손과 발이 항상 성실히 행한다면 우리의 생애가 아름답고 풍성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런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4월8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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