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도 끝나고 부활주일도 지났는데, 왜 우리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 지난 한주간도 시험 없이 사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큰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가 좀 무사안일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무사안일한 삶이 없다는 것이 문제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의 삶도 가까이서 보면 그렇지가 않더군요.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오늘 말씀 역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세상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네로황제 치하에서 박해받던 성도들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예수님의 혈육의 동생인 야고보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교회를 맡았던 지도자이죠.
박해와 순교의 혹독한 시련에 주신 해답이면 오늘날 여러 가지 고난으로 시달리는 우리에게도 충분한 해답이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시험을 이겨내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강력한 동기와 믿음을 갖게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성도들이 현재 당하는 시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먼저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고난과 시련 앞에서 항상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의문을 갖습니다.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게 억울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만 그런 시련을 당하는 것은 아니죠.
믿음이 있건 없건 사람들이 살아가며 당하는 시련은 거의 비슷합니다.
믿음이 없이 사는 분들도 시련에 맞서며 살아갑니다.
때로 팔자려니 체념하며, 때로 처지를 원망하며, 때로 시련을 준 사람을 원수로 삼고 이를 악물고 버텨내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시련도 비슷합니다.
신앙의 박해시대가 아닌 곳에선 대체적으로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인생고 수준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몸에 병이 들고, 먹고 사는 게 어렵고, 인간관계에 상처받고, 자식 문제로 속상하고, 이런 문제들이죠.
그런데 성도들의 고난은 때로 신앙차원에서 오히려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믿고 기도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문제 해결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 문제를 과연 알기나 하시는지, 듣기나 하시는지 답답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낙담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 비신앙인들은 다 자기 탓으로 알고 차라리 쿨하게 당하지만 신자들은 자기가 저질러 놓고도 결국 하나님 탓을 하는 형국이 되고 맙니다.
오늘 야고보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도 계속되는 시련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사도는 먼저 성도들이 왜 이 땅에서 시험을 당하는 지를 확실히 인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환경과 나쁜 세상구조로 인해 오는 무고한 시련 뿐 아니라 자기의 죄성이 세속과 마귀에 유혹 당해 일으킨 시련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를 괴롭게 하는 총체적인 시련이 다 포함됩니다.
이 중 어떤 시련이라 할지라도 절망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이런 말씀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지금은 힘들지만 반드시 그 결과가 좋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학자 칼빈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시련이 오면 이걸 신용장에 기입하고 경사로 여기라’
우리는 시험이 올 때 신속하게 위기를 벗어나길 원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사도의 교훈은 시련은 당장 벗어나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그걸 통해 반드시 챙겨야 할 중요한 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고난 중에 우리 기도를 응답하신 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시련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이 있기에 그걸 위해 기도응답의 과정은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원론적이고 분명히 보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응답이 일어나는 과정에까지도 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내라는 보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기 때문에 시련없이 인내를 얻을 방법은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즉시즉시 풀리는 데서 무슨 인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이고, 불행이고, 당장 떨쳐버려야 할 일이 아니라 인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인내가 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인내에 대해 성경이 중시하는 것 만큼 관심이 많지는 않습니다.
성질 급한 것을 무슨 장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그걸 말해줍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고난을 통과한 인내가 귀하고 값진 자산이란 것을 인정합니다.
세상 일도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것을 얻지 못합니다.
학생이 인내하며 공부하지 못하면 학업과 진로의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한 우물을 파라는 이야기는 큰 하자가 없다면, 좀 힘든 정도는 견뎌내야 열매를 볼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러시아 속담은 인내의 위력을 이렇게 과장되게 말합니다.
‘병사여, 인내하라. 곧 장군이 될 것이다’
서양속담에는 ‘세계는 인내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 입증하는 역사도 있습니다.
일본 춘추전국시대에 일본열도를 주름잡았던 세 영웅이 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이 세 인물을 평가한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이란 시조가 있습니다.
울지 않으면 죽여 버릴 터이니 두견새야,
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두견새야,
울지 않으면 울 때 까지 기다리마 두견새야.
한 사람은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고, 한 사람은 어떻게든 울게 하고, 한 사람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을 풍자한 것입니다.
일본 천하를 통일해 평화의 에도시대를 연 사람은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성질 급한 오다가 쌀을 찧고, 꾀많은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기다리던 도쿠가와가 먹었다고 말합니다.
인내하는 자가 떡을 먹은 것이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명언을 남깁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둘지 말라 인내는 탈 없이 장구하게 하는 근원이다"
인내는 이 땅에서도 귀하고 값진 것을 차지하게 합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의 따님이 결혼을 전제로 한 청년을 사귀고 있습니다.
가정도 괜찮고, 성품도 괜찮고, 집도 하나 있으니 요즘 같이 청년들이 결혼준비가 어려운 때 꽤 괜찮은 조건이죠.
그런데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더군요.
왜냐하면 이 청년이 한 직장에 일년 정도 밖에 다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윗 사람이 좀 부당한 걸 요구하면 그걸 견뎌내지 못하고 따지다 나와 버리는 것이죠.
인내심이 없는 게 문제가 돼서 자매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견디고 인내하는 게 얼마나 인생에서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귀한 인내를 우리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 얻을 것이기에 기쁘게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인내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아무렴 그 피눈물나는 고난을 겨우 이생에서 잠시 쓸 무기 하나 장착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의 인내라는 본래 단어 안에는 기대와 소망이라는 의미가 이미 들어 있습니다.
세상의 인내는 세상에서 얻는 것으로 끝나지만 믿음의 시련을 통한 인내에는 영원한 것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인내가 필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야고보사도는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신앙에서 인내는 본질적으로 믿음과 관련됩니다.
당장 응답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내는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증표입니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인내가 얼마나 이뤄졌는지 간단히 측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발끈하냐 하는 것입니다.
발끈하는 성질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앞서는 성급함 내 맘대로 안되면 못참는 성질머리가 들어 있습니다.
대개 나를 발끈하게 만드는 사람이 정해져 있죠.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측정기입니다.
모세도 결과적으로 발끈해서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거예요.
우리가 기도응답이 더딜 때 뿐 아니라 내 신앙이 부진하다 느낄 때조차 발끈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믿음에 대한 열망 같지만 위장 된 옛사람입니다.
성경의 인내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교회나오고 신앙을 키워가야 구원에 이릅니다.
저도 발끈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하고 나면 아주 창피합니다.
이러니 모든 일이 승승장구하는 데서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의 인내가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평생 끼고 걸어야 할 것이 바로 시험과 고난입니다.
그런게 없어도 아름다운 신앙으로 살면 좋겠지만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허락하는 하나님이 문제가 있으신게 아니라, 그게 없이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없는 죄질 나쁜 우리가 문제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절대 우리 죄질을 다룰 수가 없습니다.
고난이 없이 죄의 본성대로 사는 건 영구적으로 사람을 파멸시킵니다.
하나님이 벌써 해보시고, 성경에 다 증거를 밝혀 놓으셨잖아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가나안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시고, 지키면 모두가 행복할 계명을 주시고, 모든 것에 부족함 없이 하셨지만 결과가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에게 또 얼마나 선지자들을 보내 가르치고 책망하고 타이르며 할 만큼 하셨지만, 인간이 안되잖아요?
사람의 죄의 본성을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지난 주 뉴스에 보니 전주에서 전과81범이 출소한지 세시간만에 다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더군요.
죄가 얼마나 끈질기게 사람의 인격을 끌고 다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수 밖에 없는 유일한 해법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았지만 우리에게도 본성적인 죄질이 남아 있기에 시련이 필수적인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시련을 통과한 성도들이 한결 같이 고백하는 것은 그 시련이 없었다면 현재의 은혜도 믿음도 없었을 거란 것입니다.
조지 마티슨이란 사람이 성도의 시련에 대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과거의 위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풍요의 자리가 어디였던가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모리아의 번제단을 가리키리라
요셉에게 물어보라
차가운 감옥을 가리키리라
다윗에게 물어보라 그의 시가 깜깜한 밤에 씌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한 사람 더 예수님께 물어보라
겟세마네의 피 땀 흘린 밤에 왕관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리라.
우리에게 묻는 다면 어디를 가리키시겠습니까?
생각해보면 고난의 자리가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자리였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빛을 발하며 번영한 때가 아니라 탄식 속에 눈물이 저절로 흐르고 혼자 가슴을 치던 그 곳이 우리가 아름다운 인내를 얻은 바로 축복의 자리였지 않습니까?
지금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시련이 올 때, 이것을 견디고 얻게 될 인내와 축복을 믿으시고 담대히 이겨내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 시련 중에 인내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고난당하는 현실은 위로의 말 몇 마디로 해결될 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련 가운데 믿음으로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야고보사도는 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알려줍니다.
이 문장 앞에는 ‘그러나 만일’이라는 말이 원문에는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나 만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시련을 이겨 낼 지혜가 부족하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시련과 문제가 생기면 성도들은 당연히 하나님께 그 문제를 기도하며 의논합니다.
그런데 막연히 해결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 사건 전체를 이해할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해주실 건지, 이런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선을 베푸시고, 고난받고 멸시받는 자의 고충을 홀로 알아 주십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시편22편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합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우리가 남에게 한두 번 도와달라 하면 사람들은 금새 우리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돈도 한두 번 빌려달라고 하면 관계가 서먹해집니다.
고민도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하소연해봤자 다음에 만나보면 전혀 내 걱정해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모든 시련 중에 함께 하시고, 진짜 도우실 마음이 있고, 능력이 있고, 질리지 않고 우리의 요청에 응대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누구나 인생을 반 정도만 살아보면 좋은 일 뒤엔 어김없이 어려움이 온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도서 7장 14에서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거듭된다는 것이죠.
형통한 날엔 기뻐하고 감사하며 믿음의 훈련으로 곤고한 날을 대비하고 곤고한 날이 오면 오늘 말씀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련의 날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이 시련은 결코 우연도 아니고 무의미한 고생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통해서 구원의 소망을 품은 아름다운 인내를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힘으로 이런 각종 시험과 시련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매일 지혜를 구해야 되요.
신앙에 노하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과 믿음으로 오늘도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승리와 경험, 그것 조차도 우리 죄성에 의해 곧 변질됩니다.
어제 멀쩡히 믿음의 승리를 했지만 오늘은 안되잖아요?
우리 죄의 부패성이 그만큼 강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 기도로 의논하고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잘 인식하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내 편으로 모시고 모든 시련과 시험을 잘 이겨 인내를 이루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4월23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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