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는 할랑하게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겐 좀 껄끄러운 서신서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에 대해 죽은 믿음이라고 사망선고를 내린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귀신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연약한 성도들도 행함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들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고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우리 믿음의 행함이 부족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불러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돌보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세밀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녹록치 않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믿음도 부족하고 의지도 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힘써 행할 때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축복과 능력이 임하는지 모릅니다.
그냥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안주하라는 것은 우리의 성장과 축복을 방해하는 사탄의 흉계입니다.
이 땅은 영적 전쟁터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죠.
안일한 영적 대처는 오히려 악한 영의 공격에 시달리고 인생에 크고 작은 분란 속에 휩씁리기 쉽상입니다.
믿음으로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을 구하며 완전한 믿음으로 나가는 신앙이 영적인 축복도 육적인 축복도 보장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함이 부족하고 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에 안주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격려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결심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먼저 본문의 19절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말씀합니다.
사소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 관계에서 믿음의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사참배를 할 것이냐 순교를 할 것이냐 하는 거창한 문제에서만 발휘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상의 생활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야고보가 서신을 보낸 때는 초대교회가 설립되고 한 3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교회 안에는 짬밥이 30년 된 신자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젠 왠만한 설교는 제목만 들어도 첫째 둘째 셋째에 뭐 뭐가 나올지도 훤하다는 것입니다.
이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말씀으로 자신을 겸손히 살펴보는 게 아니라 판단하고 시도때도 없이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큰 소리도 나고 서로 성을 내고 서로 자기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다고 시끌벅적 했을 게 상상이 됩니다.
오늘날 교단이나 미성숙한 교회 내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실행해야 할 것은 먼저 말을 더디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급한 말을 내 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 성도들의 말에 대한 경계가 여러 차례 계속 이어집니다.
본문에서도 26절에 다시 한번 혀에 재갈을 물리라고 좀 과격하게 경고합니다.
본문의 뒷 부분에서도 계속 혀의 위력을 말씀합니다.
자연의 모든 것은 길들일 수 있어도 혀를 길들이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신기한 구속력을 가지게 되는 걸 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으니 인간의 말에도 신적인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선한 말이든 악한 말이든 그 말대로 열매가 맺히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말을 쏟아놓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권면입니다.
시편12장 4절을 보면 악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자기의 입술을 자기 마음대로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동안 내 입술은 내 것이니 나를 주관할 자가 누구냐하는 생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했다면 잘못 된 것이란 말이죠.
우리 혀는 반드시 주관하는 분의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복이 되는 말,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자신의 혀를 조절하지 못한다 것이 야고보서의 교훈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통제해 보려 할 때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 근질하고 다른 일에 집중이 잘 안됩니다.
그 말이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면 대개 다른 사람의 험담인 경우가 많은 걸 보게 되죠.
요즘 나는 꼼0다란 프로그램이 있죠.
세 남자가 나와 걸출한 입담으로 토크 쇼를 진행하는 데 진짜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더군요.
저는 공개적으로 어떤 사람의 부당함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인신공격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을 위시한 정치인들이 완전 그들의 대화 속에서 홀랑 벗겨집니다.
사람들이 이 프로에 폭발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 해주는 것에 대한 대리 만족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하고 정치권에 신물이 난다해도 매일 그렇게 악담을 쏟아놓는 그 사람들의 영혼이 좀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4장29절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말의 위력을 아는 우리들은 특히 원망의 말, 불신의 말을 금해야 할 줄 믿습니다.
특히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성급한 말로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해야 합니다.
어느 기독교 가정 사역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3%의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제일 상처 받은 말이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 있어?”였다고 합니다.
또 73%의 부모들은 자녀로부터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 큰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말은 결국 그대로 상대방의 마음에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일본의 파동 연구가 ‘에모또 마사루’ 박사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15년간 물의 파동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가 한 연구에 따르면 여러 개의 컵에 물을 담아 놓고 한 컵에는 미워한다. 정죄한다. 저주한다. 죽인다 등 악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물의 결정체가 무질서하고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한 컵에는 사랑한다. 감사하다. 축복한다는 말을 한 후 현미경으로 관찰하자 아름다운 육각수 결정체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물이 사람의 말에 반응을 하고 물이 사람이 한 말을 알고 있다고 책에서 말하지만 실은 사람의 말에 있는 능력이 물의 결정체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다는 것 알고 계시죠?
우리의 몸도 무의식 중에 우리가 하는 말에 따라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있다고 잠언16장24절에서 이미 말씀하십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니라.
우리의 말에 따라 악한 영을 이길 능력이 되기도 하고 마귀의 시험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을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인정합니다.
저도 부정적인 말을 한 다음 아차 했지만 역시 염려했던 대로 그 말 대로 시험이 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말에 사탄을 이길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이 영적인 세계와 자연적인 세계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성급한 불신앙의 말을 버리고 나와 가족과 이웃을 위해 축복의 말과 소망을 주는 말을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말씀입니다.
대개 성내는 것이 짧은 시간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성내기를 더디하라는 것은 좀 기다렸다 성을 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잠시 보류하면 어느새 폭발적인 화가 좀 가라앉는 것을 보게 되죠.
별 것 아닌 것에 벌컥 화를 내고 나서 조금만 참을 걸 하고 스스로 민망해지는 경우 많습니다.
화를 낸 사람은 민망하면 그만이지만 벌컥 화내는 사람에게 당하고 나면 당사자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이든 20절 말씀대로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이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는 로마서3장2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의는 죄를 지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길이 참으시고 전에 지은 죄를 예수님의 피로 인해 모른 채 넘어가 주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성내는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의를 결코 이룰 수가 없는 것이죠
화를 벌컥 내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자기가 재판관이 되고 자기 의를 기준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즉결 심판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된 듯이 상대방을 향해 전권을 휘두르는 것이죠.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의를 위한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성내는 것의 실체는 인간 죄성인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분해서 남을 정죄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을 보면 그게 실은 자신의 더러운 본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화를 내는 내면엔 상대를 얕잡아 보는 악한 마음도 숨겨있습니다.
야고보의 처방은 그런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행동도 습관적이 되기 쉽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마음을 성령님께 의지해서 울컥 올라오는 화를 잘 다스려야 할 줄 믿습니다.
분노가 가득 찬 마음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화를 내기가 쉽죠.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을 믿고 기도할 때 성내는 것도 고쳐지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의 온유한 열매가 우리 모두에게 맺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권면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면 그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그 사람이 명령한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나타납니다.
요즘 아이들 부모님 말씀에 시큰둥하죠.
그게 버릇이 돼서 학교에 와서 선생님들이 하시는 말씀도 귓전으로 듣습니다.
부모와 스승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뜻이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는지 여부가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 않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해서 말씀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말로는 내 인생에 주인이 하나님이라 말하며 실은 주님을 경외하고 있지 않다는 뜻일지 모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과 행하는 사람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단정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크던 작던 남을 속이는 행동을 조금씩들 합니다.
그런 행동은 나름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려가며 전인격을 사용해서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양심과 판단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그 이상의 죄입니다.
나중엔 인격이 완전히 파괴되고 어떤 방법으로도 손 쓸 수 없게 된 사람들을 가끔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깊은 곳에 두신 양심은 하나님을 잃은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센서인 양심을 의도적으로 마비시키는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도 전혀 뉘우침이 없이 자기 죄를 합리화 시키고 사회를 향해 댑서 화를 내는 사이코 패스 범죄자들이 그런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도 행함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 결과적으로 영적인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를 지운 바리새인 율법사 제사장들이 말씀을 모르던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직업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단 한 개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미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고 그것을 지키려고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열심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들은 것을 지키는 것은 문제가 다릅니다.
지키는 데는 희생과 자기 부인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 성향으로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것은 정말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려할 때 저절로 되는 일이 어디 있었습니까?
하나 하나가 다 우리 본성과 정 반대로 행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주님을 따를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본성에 충실하고 자기 감정을 따라 사는 것으론 절대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성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감정을 희생해야 하고 시간을 드려야 하고 물질을 남에게 흘려보내야 하고 본성이 좋아하는 은밀한 죄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들을 행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한 개도 행하지 않다보면 그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나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통해서나 혹은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들의 통찰력 있는 책을 통해서 큰 은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말씀을 듣고 영적 지식이 많아지면 마치 자기 스스로가 그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 착각을 한다는 것이죠.
듣기만 한 영적 지식은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23절에 보면 말씀을 듣고 좀체로 행하지 않는 사람을 거울을 보는 사람에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오늘 아침에 모두 거울을 보고 오셨을 겁니다.
거울에 대한 재미있는 보고를 보니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자신의 왼쪽 얼굴을 주로 본다고 합니다.
오른 쪽 얼굴은 수리와 논리를 관장하는 왼쪽 뇌가 지배하므로 좀 딱딱하게 되기 쉽다고 합니다.
예술과 창의력을 관장하는 오른 쪽 뇌가 지배하는 왼쪽 얼굴이 더 부드럽기 때문에 왼쪽 얼굴이 더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랍니다.
왼 쪽 얼굴이든 오른 쪽 얼굴이든 아침에 보고 나오셨는 데 아침에 거울에 비쳤던 그 모습을 다시 곰곰이 생각하신 분 있으세요?
거울을 들여다 보는 이유가 자기의 외적인 모습을 그 당시 일시적으로 드려다 보는 게 목적입니다.
돌아서는 순간 거울에 비쳤던 모습은 잊혀지고 맙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다는 것이죠.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말씀을 들을 때 잠시 자신을 비추어보다 돌아서서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25절에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는 사람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원어대로 해석하면 온전한 자유의 율법을 들여다 보고 곁에 머물며 실천하는 자란 뜻입니다.
말씀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며 실천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약속을 주십니다.
25절에 보면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킴으로 그 인생이 변하고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은 허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은 누구나에게 동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에는 모두 단서가 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제시 된 조건을 먼저 믿음으로 행할 때라는 단서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말씀을 들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킬 때라는 것이 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 된 증언입니다.
소망교회 김병0집사님이 경영하는 아모0이란 기업이 있습니다.
휴대폰의 정전기를 제거하고 잡음을 제거하는 칩을 개발한 벤처 회사로 올 3분기 매출만 해도 250억원에 달하는 중견 기업입니다.
회사를 차리고 온통 개발에 몰두하던 김집사님에게도 IMF가 닥쳐왔습니다.
부도의 위기 앞에 매일 새벽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기도하고 부르짖고 간신히 새 힘을 받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회사에 나가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극적으로 투자자를 유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원달러 환율이 치솟아 제품 하나를 팔아도 두 개값의 수익을 올리며 순식간에 회사가 안정권에 진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한 파도를 넘기고 얼마 후 또 다른 파도가 닥쳐왔습니다.
당시 중개기 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외부 사람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는 데 언제부터인가 핵심 직원이 하나 둘 사표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부사장이 거래처와 기술과 직원들을 다 빼내 따로 회사를 차렸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표를 낸 직원 20여 명이 다 그 사람이 차린 회사에 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회사 연구개발을 위해 박사과정을 지원해준 후배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배신감으로 몸서리가 쳐지고 고통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 사람을 경제사범으로 신고하고 잃어버린 사업권을 찾으라고 난리였습니다.
그는 노력한 모든 것을 이대로 허망하게 빼앗겨야 할지 하나님께 물으며 눈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자꾸 네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고뇌 끝에 말씀대로 그들을 용서하기로 하고 중개기부품 사업권을 포기하고 사업 방향을 돌려 핸드폰 부품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이 회사의 명운을 가르는 중차대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였습니다.
갑자기 핸드폰 사업 붐이 일어며 불과 몇 년 사이에 회사는 몇 배의 성장을 하게 됐습니다.
반면 중개기기 부품 사업은 사향길로 접어들어 김집사님을 배신하고 설립한 그들의 회사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축복을 좀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도 부흥돼서 주님이 주신 비전대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도 하고 재정을 축복해주셔서 좋은 사업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되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20장24절에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예배하는 사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5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6장18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의 무수한 약속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신명기15장6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서 천국에 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말씀대로 지키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마음에 위로와 평안만을 누리는 것으로 우리의 이 땅에서 필요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통해 듣고 말씀을 읽으며 깨달은 것들을 지켜서 약속 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마칩니다.
미국 아이오와주 작은 농촌의 이름 없는 교회에 다니는 한 남자 성도가 교회에 가던 도중 길거리에서 장난하고 있는 네 명의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소년들을 열심히 권고해서 교회에 데리고 가 성경공부반을 조직하고 말씀대로 행하도록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소년들은 장성하여 마을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932년 이 늙은 성경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에 편지 4통이 낭독되었습니다.
그 편지는 성경공부반을 조직 할 때의 처음 학생 네 명으로부터 온 축하 겸 감사 편지였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부터 온 것이고, 마지막 편지는 미국의 대공황시기에 미국을 이끌었던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시골의 이름 없는 교회에서 일어났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배운 제자훈련을 통해서 위대한 리더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또한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들로 키우시길 축복드립니다.
신명기5장29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 하나 순종하고 실행할 때 우리 마음에 참 기쁨과 평강과 담대함을 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약속해주신 복을 우리와 자손들이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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