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사도의 편지를 통해 올바른 믿음의 길을 또 인도받고자 합니다.
믿음이 강해져야 사는 힘도 강해집니다.
이젠 지구기후까지 점점 독해져서 우리도 더 강해지지 않으면 이 삶을 버텨내기가 더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매 주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며 살펴보는 것은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는 시대는 변해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똑같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것이 과거에도 이미 있었다는 것이죠.
야고보서의 시대인 1세기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시대나 삶의 형태와 도구들은 발전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그때 성도들이 환경에 반응한 것처럼 우리도 살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현재 내 상황과 자신의 모습과 환경에 바르게 대응할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십니다.
또 하나는 야고보사도를 통해 당시 성도들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시대를 훌쩍 뛰어 넘지만 바로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본문에 충실하게 말씀을 준비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하실 말씀을 준비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로마서에서도 말씀하셨잖아요?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
그래서 우리는 자꾸 성경을 현재의 나에게 적용시키려는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예수님과 삼십여년을 같이 살았던 주의 형제입니다.경건하고 진실한 신앙과 인격으로 교회사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초기에 주축이 되었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지만 그 후 야고보사도가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바울이 기둥 같은 야고보라고 할 정도니 교회에 어떤 존재였는지 알만하죠.
유다서를 쓴 유다도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주님의 형제들은 메시야사역 당시에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변화되어 교회의 큰 일꾼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의 평범한 삼십년 생애 중에도 가족들을 경건하고 신실하게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은 요즘 같이 예수님 인맥을 동원한 게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인격이 어려서부터 오래 훈련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가족들이 모두 다 진실 되고 품위 있는 성도들이 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신실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거는 주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경건은 곧 나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가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듯이 성도들의 신앙이 형식화되고 행함이 없는 명목적인 믿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난 주 로마서에서 ‘율법의 행위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 것에 반대로 오늘은 ‘믿음보다 행위가 진짜’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그러나 두 말씀은 강조점을 어디에 두었냐의 문제이지 사실은 올바른 믿음의 본질을 두 군데서 정확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고, 구원받은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른다는 것이죠.
그런데 야고보서의 교회는 행함이 전혀 없는 믿음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초기 교회 신자들이 원래 어떻게 시작한 사람들입니까?
당시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 이미 국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사회에서 종교법인 율법이 곧 국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정치기구였던 산헤드린공회는 종교법정을 겸했고 모세 율법에 따라 재판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집사를 신성모독죄로 돌로 쳐서 죽인 유대인들은 합법이었습니다.
지금 이슬람교인들이 프랑스와 유럽에서 요구하는게 자기들만의 종교법정이잖습니까?
남에 나라에 살면서도 자기들을 이슬람종교법인 샤리아법정에서 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명예살인이나 이슬람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테러는 샤리아법으로 죄가 아닙니다.
지금 이스람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프랑스에는 이슬람자치 지역이 750곳이 있는데 자경단이란 자치단체가 스스로 치안을 담당합니다.
비무슬림인들은 접근 자체를 금지합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인격학대가 이뤄지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햄트램크라는 도시는 무슬림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시의회법을 이미 샤리아법에 유사하게 다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익산에 할랄단지를 만들겠다는 방침인 데 우려할 일입니다.
점잖은 무슬림만 상대해보고는 이슬람의 잔인하고 집요한 실체를 잘 모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범법자들이었습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 돌에 맞아 죽을지, 언제 재산을 몰수당할지 모르는 처지였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반기독교 국가에서 협박과 테러를 당하며 사는 기독교인들이 1억명이나 된다고 오픈도어선교회는 보고합니다.
그 중 1위가 북한입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오던 초기 신자들이 이런 박해를 당하며 신앙을 지켜 우리에게 전수해 준 것입니다.
신앙은 지키고 전수되지 않으면 그 다음 세대는 없습니다.
1세기 성도들이 그런 박해를 이겨낸 것은 처음 성령과 복음에 대한 체험이 아주 강력했고 예수님의 재림이 당대에 일어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십여년이 되어도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신 것과 계속되는 신앙의 시련에 용감했던 성도들이 점점 실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편지 서두에 한 줄 인사를 건넨 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왜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까?
성도들에게 인내는 반드시 갖춰져야 할 아름다운 덕목이지만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잘 참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을성이 없어 독촉하던 아이들도 세상에 부대끼면서 참는 것을 배우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용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견디는 것도 다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사도 역시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인내로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야고보서엔 시험을 견딘 사람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의 성도들이 이런 믿음의 시련과 역경, 생활고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새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감은 사라지고 믿음은 알맹이가 빠지고 형태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와는 신앙의 출발부터 달랐던 당시 성도들이 이렇게 된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성장은 고사하고 바르게 유지되기조차도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또 야고보사도가 본문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는 지난 주 설교였던 이신칭의 교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사도들의 편지들이 교회마다 회람되고 필사되어 보관되었습니다.
바울사도의 편지에 나타나는 이신칭의의 구원관은 신앙적인 열정이 식어가는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전한 핑계거리를 제공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그게 아니었잖아요?
기억나시죠?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잘못된 적용으로 교회 안에는 믿음만 자랑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죠.
야고보사도는 각 교회에 이 문제를 바로잡을 긴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이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형식적인 믿음, 이름뿐인 믿음의 결과로 교회에는 이미 수많은 문제들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교회 내에 있는 빈부갈등을 지적합니다.
성도들의 삶을 시험하는 가장 핵심요소로 이 빈부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합니다.
지금도 우리 삶을 괴롭히는 문제가 빈부격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어릴 때는 옆집이나 뒷집이나 다 똑같이 가난하고 물자가 부족하니 비교에서 오는 큰 갈등은 적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때도 깔끔한 파란 철대문집 양옥에 사는 아이들이 부럽기는 했죠.
야고보서의 교회 내에서도 부자교인과 가난한 교인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세상엔 빈부로 인한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지만 교회는 아닙니다.
풍부에도 비천에도 처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부자를 만드신 이도, 가난한 이를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교회는 그로인한 갈등을 구제와 연보로 균등하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교회는 금가락지 끼고 옷 잘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좋은 자리로 안내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오면 냉대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는 사회나 교회 내에서도 사실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런 차별로 인해 부자교인들은 점점 거만하게 죄를 짓고, 가난한 교인들은 불만과 피해의식이 쌓여 점점 공격적이 되었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사람이 거칠어집니다.
당시 교회 내에 험악하고 모욕적인 말이 서로 거침없이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룩하고 고상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교회에 지독한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죠.
신앙이 물러 간 빈 자리엔 개인이든 교회든 온갖 악과 부조리와 고통이 밀려들어 옵니다.
결국 성도들의 믿음은 지금 구원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하는 처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붙들고 있는 성도들에 대해 14절에서 이렇게 통탄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것은 교회 내에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는 도발적인 경고문입니다.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할 믿음을 좇고 있는 것을 볼 때 교회지도자 야고보사도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희생과 고통을 통해 부르신 성도들입니까?
사도야고보는 이들의 뼈아픈 현실을 예로 듭니다.
교회 내에 이젠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바짝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에서 똑같이 드러나는 문제가 아닙니까?
형제 자매의 필요에 무관심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이 냉담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때에 성도들이 어땠습니까?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스스로 자기의 논밭을 팔아서 교회로 가져왔던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성도들입니다.
그때는 믿음과 행함이 일치되었었죠?
그런데 이젠 단지 말로 때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굶주려 죽게 된 형제에게 단지 평안히 가라, 가서 덥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고 하고 끝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형제 사랑은 똑같은 말입니다.
며칠 전 요즘사람들이 얼마나 극도로 이기적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죠.
택시기사가 운행도중 심정지가 와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앞차와 추돌했습니다.
그런데 남녀 승객 둘이 트렁크에서 골프가방을 꺼내들고 다른 택시를 타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아무런 구호조치를 받지 못한 기사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119에 신고조차도 않고 떠났던 이 승객들의 말은 공항버스를 빨리 타야 했고, 다른 사람이 신고한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일용할 양식이 없었던 형제는 가난한 고대사회의 실정으로 볼 때, 집으로 돌아가 자식들과 함께 굶어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단체에도, 심지어 가족들 간에도 반드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곳은 없습니다.
교회는 다릅니다.
형제의 궁핍함과 절박한 형편을 안다면 능력이 닿은 대로 도와주는 것이 의무인 곳이 교회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이렇게 말씀할 정도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을 안다면 너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게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성경에서 너무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형제 사랑을 제시했거나 아니면 교회 내 성도들의 관계와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이겠죠.
성경은 분명히 참 성도들의 사랑은 자연적인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사랑임을 밝힙니다.
페루선교사이신 한 목사님이 성도들의 연합체인 교회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분이 어느날 동료와 함께 선교지를 찾아가다 반군이 득실대는 정글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란군들이 점령한 정글에서 길을 잃은 것은 붙잡혀 죽을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길을 찾아 정글을 헤매다 결국 정글에 위험한 밤이 왔습니다.
굶주림과 짐승의 공격과 반란군의 위험으로 죽음을 예감하던 찰나에 어디선가 사람의 기척이 들렸습니다.
반란군일수도 있고, 민간인일수도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목사님은 다급하게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목사인데, 이 근처에 혹시 믿는 형제가 있습니까?’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낯선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고 ‘할머니가 한 분 있소’ 하면서 목사님을 한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문을 빼꼼 연 할머니는 얼른 목사님 일행을 안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먹을 것이 없던 할머니 성도의 집에 반란군의 총격을 무릅쓰고 처음보는 형제들이 밤새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와 목사님을 섬기고 교제를 했다고 합니다.
이게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도들 간의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하나 됨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해되기 어려운 신비한 사랑으로 묶여 있습니다.
우리도 어디 가서 잘 모르는 관계인데도 진정한 성도를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대화가 잘 되고 급속하게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을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이고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있고 예수님의 핏줄이라는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교회가 아니라 그 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무형의 참된 교회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강인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약하게, 성도들의 결속을 그렇게 미미하게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잘못 쓰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이 없는 현대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사도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 누군가 이렇게 말할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은 진정한 믿음의 특징은 상대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형제사랑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대한 행함이 없다면 무엇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란 증거를 제시하겠냐는 것이죠.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성도들이 서로 차별하고, 돌아서서 헐뜯고, 집에 돌아와서 누군가를 험담하고, 조롱한다면 예수님도, 교회도, 성도들 자신도 다 우스꽝스럽게 되는 것이죠.
그래도, ‘무슨 소리냐,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으니 구원받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성도들을 향해 야고보사도는 안타깝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도 하나님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확신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치를 잘 이해하고, 내 죄를 용서하는 것이라면 ‘오케이, 뭐가 문제냐, 믿겠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에는 순종과 책임이 동반됩니다.
불상에 소원을 빌고 탑돌이를 하며 기원했다고 돌아와서 무슨 책임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라면 서로에게 대한 당부가 있고 관계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순종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 사는 게 벅차고, 남의 일을 돌볼 여력이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명령대로 성도들에게, 이웃에게 봉사와 수고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럴 여력도, 물질도, 시간도, 건강도 주시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의 교회들은 시련과 시험에서 인내하며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싸우지 못했고, 결국 구원에 대해서조차 의심받는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한주간도 생활의 터전에서 전쟁터와 같은 싸움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영적세계에서나 싸움은 불가피합니다.
영적세계를 위한 우리의 싸움은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계속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멈추면 오늘 야고보서의 교회처럼 퇴보가 오고 영적 피곤이 옵니다.
믿음의 삶에서 지치고 퇴보할 때는 자연의 법칙을 위배할 때와 하나님과의 교류를 차단할 때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행함으로 예수님과 교류하며 살지 않으면 신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으며 작은 일에도 지치고 영적 피곤을 느낍니다.
1세기의 교회들이 생긴 지 이십년이 지나지 않아 심각하게 성도들의 믿음의 퇴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도들의 신앙이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발전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역사 천년, 중세 천주교 역사 천년에 신앙은 성경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죄성은 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마귀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잘못 갈 때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길을 잡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맞춰보고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있나 내 스스로가 챙겨야 합니다.
오늘날은 야고보사도 처럼 단호하게 성도들의 잘못 된 신앙을 질책하고 바로 잡아줄 지도자들이 흔치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날 야고보처럼 교회와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눈물로 호소하며 ‘너희가 그래도 안되면 내가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의 고민이 있고 늘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문제들을 오늘 야고보에게서, 성경에서 직접 들으셔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사도는 구원받을 믿음은 사랑으로 수고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사랑은 힘든 일이지만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는 계속적인 회심의 자세입니다.
매일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 회개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사랑의 수고와 희생을 행함으로 우리 믿음을 가꿔갈 때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계속해서 공급되는 아름다운 성도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016년8월28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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